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66
신필천하(神筆天下) 66화
진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 뒤를 따르는 유설은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달리지도 못했다. 결국 진양은 유설을 안아 든 다음 경공을 펼쳐 내달리기 시작했다.
숲을 헤집으며 한참을 달려가고 나니 뒤쫓는 병사들의 인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진양은 주변을 한 번 살펴본 뒤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개울물을 마시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버지…….”
유설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진양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내가 은혜를 갚고자 일 년 동안 금룡표국을 돕기로 했는데 그 일 년도 채우지 못하는구나. 군자의 도리를 다하기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진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빼곡하게 박힌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했다. 진양은 가만히 침묵하며 개울물 흐르는 소리와 유설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낭자, 이럴 때일수록 기운을 내야지요. 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낭자를 지켜주겠습니다.”
유설은 다정하면서도 강한 의지가 담긴 진양의 목소리를 듣자 더욱 서글픔이 밀려왔다.
“이미 양 소협께 받은 은혜가 많은데 제가 어찌 다 감당하겠어요.”
“당치도 않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제가 송구할 따름입니다.”
진양은 유설을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유설이 한 걸음 막 내디디려는데, 순간 그녀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린 데다 하루 동안 받은 충격이 커서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던 것이다.
진양이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우선 근처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봐야겠군요.”
“괜히 저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진양이 따뜻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유설은 새삼 진양의 어깨가 넓어 보였다. 이제 믿을 사람이라고는 그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진양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됐다.
그때 멀찍한 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저기다!”
“거기 서라!”
곧이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진양과 유설은 깜짝 놀라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벌써 이곳까지 따라왔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잡힐지도 모른다.’
진양이 얼른 유설을 부축해서 걸음을 옮기려는데, 이상하게도 인기척은 다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진양은 유설을 진정시킨 다음 옆의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멀리 내다보니 한 무리의 병사가 횃불을 들고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불빛이 퍼졌다가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하니, 틀림없이 그곳에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곳에 누가 있는 걸까?’
진양이 내려와서 유설에게 이야기하니 유설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혹시 아버지가 여기까지 도망쳐 오신 건 아닐까요?”
“아!”
진양이 제 허벅지를 탁 치며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곧 어두운 표정이 됐다.
‘아니다. 국주 어르신이 벌써 우리 뒤를 쫓아왔을 리가 없다.’
유인표의 성품으로 보나 그가 입은 상처로 보나 그럴 확률은 매우 적었다.
진양의 표정을 읽은 유설도 한 가닥 희망을 버렸다.
“역시…… 그럴 리는 없겠죠?”
“흠. 하지만 도 표두님이나 정 표두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어서 가서 도와줘요.”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여 있는 횃불의 수를 봤을 때 그리 많은 병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도장옥이나 정여립이라면 병사들을 함께 처치하고 같이 도망가는 것이 좋으리라.
“그럼 잠시 여기 계세요. 제가 다녀오지요.”
“아니에요. 저도 돕겠어요.”
“지금 상태로는 무리입니다.”
“그래도 함께 가서 숨어 있을게요. 저 혼자…… 남긴 싫어요.”
유설이 마지막 말을 작게 내뱉었다.
진양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세요.”
두 사람은 다시 나무 사이를 헤집으며 빠르게 나아갔다. 횃불이 모인 근처에 다다라서는 두 사람 모두 나뭇가지를 밟고 이동했다.
가까이 가서 상대를 확인하니 그는 도장옥도 정여립도 아니었다.
‘저자는…… 흑 형님이 아닌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왼손으로 검을 부리는 자는 다름 아닌 흑표였다. 아마도 남옥을 호위하다가 둘이 갈라지면서 그 혼자 여기까지 도망치게 된 듯했다.
흑표의 반수검은 확실히 위력이 상당했다. 그가 검을 든 왼손을 움직이면 반드시 병사 중 한 명은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흑표는 신출귀몰하게 병사들 사이를 누비며 싸웠다.
하지만 병사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이미 오랫동안 싸워왔기 때문인지 흑표 역시 체력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찢어진 오른쪽 팔뚝에서는 선혈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진양이 유설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흑 형님을 구하고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요?”
“이 정도 인원이라면 해볼 만하겠습니다.”
“알겠어요. 부디 조심하세요.”
유설이 두려움에 젖은 눈빛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은 그녀의 눈빛을 보자 더욱 마음이 저려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가 몸을 날려 병사들 틈에 내려섰다.
“앗! 웬 놈이냐?”
병사 하나가 버럭 소리쳤다.
진양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병사들을 향해 수호필을 휘둘러 갔다. 공력을 한껏 끌어올린 탓에 수호필에 달린 은잠사 붓털이 빳빳하게 뻗어 있었다.
진양이 옆구리, 목, 겨드랑이 등의 요혈을 찌르자 달려들던 병사들이 저마다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쓰러졌다.
“이놈도 역적이다! 죽여라!”
병사들이 둘로 나뉘어져 진양에게도 덤비기 시작했다. 진양은 수호필을 마구 휘둘렀다. 어쩔 때는 지둔도법을 펼쳤고, 어쩔 때는 십절류를 펼쳤다. 또 어느 순간에는 월야검법을 펼쳐 닥치는 대로 적을 공격해 갔다.
진양은 가급적 살인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방에서 적이 벌떼처럼 달려들었기 때문에 공력을 세심하게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있는 대로 자양신공을 끌어올려 매 순간 절초를 펼치니, 수호필에 얻어맞거나 붓털에 베인 자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져 갔다. 한번 쓰러진 자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한편 흑표는 진양이 등장하자 더욱 힘을 얻어 매서운 검법으로 병사들을 휘몰아쳐 갔다. 그의 움직임이나 현란한 검술을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부상을 당한 몸 같지가 않았다.
대략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병사 중 두 발로 서 있는 자가 남아 있지 않게 됐다. 그제야 진양은 유설을 불러 내려오도록 했다.
진양이 말했다.
“흑 형님도 저희와 함께 가시죠.”
“나는 갈 수 없소. 도와줘서 고맙소, 양 형.”
뜻밖의 대답에 진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함께 갈 수 없다니요?”
“대장군께서 놈들의 손에 잡혔소. 지금 당장 구하러 가야 하오.”
“하지만 대장군은 지금 황궁에 잡혀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럼 황궁으로 가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건 안 될 말입니다. 만약 흑 형님께서 황궁으로 가신다면 틀림없이 사로잡혀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찌 대장군을 버리고 간단 말이오? 그럴 수는 없소!”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단순히 감정으로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 흑 형님이 황궁으로 가신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입니다.”
그러자 유설도 얼른 나섰다.
“그래요. 아마 대장군께서도 흑 선배가 무모한 행동을 하길 바라시진 않을 거예요.”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니 흑표의 눈빛도 조금 흔들렸다.
그가 갑자기 기합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아!”
써걱!
단 일 검에 기둥이 베인 커다란 나무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이는 자신의 생각을 베어낸 것과 다름없었다.
진양이 다독이듯 말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선 여기를 피하시지요.”
결국 흑표는 검을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은 함께 숲속을 달려갔다.
세 사람은 서쪽을 바라보고 줄곧 내달렸다. 어느새 날이 밝아올 무렵, 세 사람은 비로소 산속의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몸을 숨겼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오?”
흑표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진양과 유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막상 닥친 화를 피해서 도망치긴 했지만 정작 목적지는 아무도 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유설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호광(湖廣) 남쪽 지방에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백부님이 계세요. 그곳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진양이 흑표를 바라보니 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광 남쪽 지방이라면 직례 일대에서도 제법 거리가 있으니 당분간 몸을 의탁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목적지가 정해지고 나자 진양은 숲으로 나가서 멧돼지 한 마리를 사냥해 왔다. 세 사람은 어제부터 한 끼도 먹지 않고 줄곧 달리기만 했기에 몹시 허기가 진 상태였다. 그들은 서로 말도 나누지 않고 돼지고기를 먹어치웠다.
그들은 낮 동안 동굴에서 잠을 잤고, 해가 떨어지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낮에는 활동을 삼가고 밤마다 이동해서 수일이 지났을 때 호광 지방의 장사(長沙)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설이 찾아간 백부의 집은 이미 불에 타 버려서 한 줌 잿더미로 변한 뒤였다. 백부 역시 역모의 죄에 연루되어 멸문당하고 만 것이다.
먼 길을 달려온 진양 일행은 결국 허탈한 마음으로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다시 목적지를 놓고 고민해야 했다. 천하는 넓은데 갈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참을 고심하던 진양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내보았다.
“혈사채로 가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혈사채요? 그들은 우리 금룡표국을 습격한 자들이 아니던가요?”
유설이 적개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안심시켰다.
“한 때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그들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난번 그들은 제게 언제든 도움을 주겠노라고 약속했었지요.”
진양은 스스로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왠지 민망했지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 듣고 있던 흑표가 힘을 실어주었다.
“맞는 말이오. 그들은 양 형을 은인처럼 여긴다고 했으니 그들이 진정 대장부라면 양 형을 봐서라도 우리를 내치지는 못할 것이오.”
“그렇습니다. 비록 남에게 손을 벌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굽힐 때를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가 아니겠습니까?”
진양의 말에 유설도 조금씩 마음이 움직였다.
그녀는 진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양 소협. 저는 소협의 말씀에 전적으로 따르겠어요.”
그녀가 다소곳이 대답하자 진양은 괜스레 낯이 뜨거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세 사람은 다시 혈사채가 있는 경석산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