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68
신필천하(神筆天下) 68화
위사령과 조전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객점 건물을 이용한 것이었는데 그 선택은 탁월했다.
위사령이 정여립을 향해 소리쳤다.
“정 표두! 당신이 어째서 병사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는가? 양 소협은 어디에 있는가?”
“후후!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내가 묻고 싶군.”
“네놈이 금룡표국을 배신했단 말인가?”
“배신? 처음부터 나는 금룡표국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었으니 배신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 않겠는가?”
“뭣이?”
“위사령,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구나. 네놈이 금룡표국에 잡혀 끌려가던 날 누가 널 풀어줬는지 아느냐?”
“그야 천의교에서…….”
“천의교 무인이라는 건 어찌 알았는가? 그자의 모습을 보았나?”
“그자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 얼굴을 모를 수밖…… 설마…… 그렇다면 그자가…… 너…… 너……!”
위사령이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정여립을 가리켰다.
정여립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알겠나? 어찌 보면 이 어르신이 너의 은인이다.”
“그, 그럼 네놈은…… 천의교 소속이란 말이더냐?”
“만약 그날 내가 제대로 지령을 받을 수만 있었어도 너를 그 자리에서 풀어주지 않고 그냥 죽였을 텐데…… 아쉽군, 아쉬워.”
“네놈이 감히!”
위사령이 우렁찬 고함을 터뜨리며 도를 휘둘렀다. 그 순간 앞을 막아서던 병사 하나가 그대로 튕기면서 창문을 부수고 나가떨어졌다. 이어서 휘두른 일도에 정여립이 검을 들어 막았으나 역시나 무거운 힘을 이기지 못해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바로 그때 진양이 달려와서 정여립을 부축한 것이다.
“그럼 정여립이 천의교 무인이란 말입니까?”
진양이 놀라서 묻자 위사령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았소.”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유설이었다. 그녀가 가늘게 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그럴 수가……!”
“미안하오. 내가 그날 복면인이 누군지 확인만 했어도…….”
위사령이 면목없는 표정으로 말하자 진양이 그를 부드럽게 달랬다.
“선배님의 탓이 아닙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정여립 그자는 정말 용서할 수가 없군요.”
진양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정여립을 생각하며 살심을 떠올렸다.
진양 일행은 그 길로 경석산을 올라 혈사채로 갔다. 혈사채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소식을 들은 채주 곡전풍이 제일 아래 문까지 몸소 나와서 진양을 맞이했다.
진양 일행은 혈사전에서 융숭한 접대를 받았다. 혈사채 무인 중 누구도 진양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가 없었다.
“불편한 것이 많겠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오.”
곡전풍의 말에 진양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씀은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채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허허, 그래도 잠자리와 먹을 거리가 어디 목숨보다 귀하겠소?”
“은혜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 했습니다. 이미 저는 채주님께 깊이 은혜를 입은 몸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소협은 정말 이 늙은이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려.”
곡전풍은 환하게 웃으며 진양 일행을 객당으로 안내했다.
진양은 목욕을 마치고 잠시 쉬다가 유설의 방으로 향했다.
“낭자, 계십니까?”
잠시 후 유설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한데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이 아마도 눈물을 흘렸던 모양이다. 진양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짐짓 모른 척하며 말했다.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요?”
“좋아요.”
유설이 대답하며 진양을 따랐다.
두 사람은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묵묵히 길을 걷다 보니 앞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폭포가 흐르고 있었다.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는 물이 넓게 고여 있었는데, 그 위로 달빛이 교교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면에는 둥그런 파장이 끊임없이 퍼져 나갔다.
지금은 한밤중임에도 대단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두 사람은 폭포 옆의 커다란 바위에 나란히 앉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상심이 큰 사람은 바로 유설일 것이다. 진양은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유설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걱정돼요.”
그 말에 진양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 그러고 보니 국주 어르신의 생사 여부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나는 이미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기에 너무 부끄럽구나.’
사실 유인표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유설은 차마 그런 생각까지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양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내일 응천부로 가서 국주 어르신의 소식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괜히 저 때문에 그러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국주 어르신은 제게도 소중한 분입니다. 어쩌면 흑 형님도 내일 응천부로 갈지 모르니 우리가 가서 알아보고 오지요.”
유설이 진양을 돌아보았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와 다부진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오늘처럼 힘들 때 그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 소협, 저는 이제 양 소협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전 앞으로 양 소협이 하는 일에 전적으로 따르겠어요.”
진양은 갑자기 유설에게 이런 소리를 듣자 가슴이 뛰었다. 동시에 마음 깊이 감동을 받았다.
‘유 낭자가 나를 이처럼 생각하니 내가 반드시 낭자를 지켜주어야겠다.’
진양은 저도 모르게 유설의 하얀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낭자,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낭자만은 꼭 지켜 드리겠소.”
다부진 각오를 한 탓인지, 아니면 유설의 약한 모습을 보아서인지 진양은 평소와 달리 단호한 말투로 다짐했다. 유설은 마음이 격동하여 저도 모르게 진양의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눈물을 주룩 흘렸다.
“고마워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댄 채 오랫동안 바위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진양은 흑표와 함께 응천부로 향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 얼굴에 고약을 붙이기도 하고 가짜 수염을 달아서 변장을 했다.
흑표가 말을 타고 가며 진양에게 물었다.
“양 형, 만약 유 국주가 살아 계신다면 어쩔 작정이오?”
“구해야지요.”
“어떻게?”
“글쎄요. 혈사채에도 도움을 구해서 계획을 세워야겠지요.”
흑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그럼 이미 돌아가셨다면?”
진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실 흑표와 진양 모두 그럴 확률이 굉장히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양이 담담히 대답했다.
“만약 그렇다면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살아갈 작정이오?”
“나는 유 낭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할 생각입니다. 만약 그녀가 복수를 하고 싶다면 복수를 해줄 것입니다.”
“그녀가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녀가 하고 싶은 다른 것을 할 것입니다.”
그러자 흑표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녀를 사랑하나 보군.”
진양이 흠칫거렸다.
사실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게 정의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리라.
한데 흑표를 통해서 이런 말을 들으니 진양은 부인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양이 씁쓰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두 사람은 말에 박차를 가해 빠르게 응천부로 달렸다.
하루를 꼬박 달려 응천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성벽을 보고 그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남옥 대장군과 유인표의 수급(首級)이 성벽 쇠창살에 꽂힌 채로 효수(梟首)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양은 침통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고, 흑표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진양이 눈물을 흘리며 겨우겨우 그를 달래고 나서야 흑표는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돌아오는 동안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저마다 각자의 감정과 생각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진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임 어르신의 유지를 받들어 협의를 실행하고자 맹세했는데, 그것이 이처럼 어려울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내게 은혜를 베푼 사람조차도 지켜주지 못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을 이 고통에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보면 유설은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었다.
진양의 부모님 역시 역모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진양은 계속해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 못내 괴로웠다.
두 사람은 영벽현(靈璧縣)에 이르러서 객점에 들렀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입맛이 없어 밥 대신 술만 시켰다.
진양은 유설에게 이 소식을 어찌 전해야 할지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흑표는 술병을 들어 나발 불더니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다.
“제 주인을 지키지도 못한 놈이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더니 갑자기 검을 거꾸로 쥐고 자신의 배를 찔러 들어갔다. 진양이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술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술잔이 산산조각나면서 깨졌고, 검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흑표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매서운 눈초리로 진양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무슨 짓이오?”
“흑 형님께서는 어찌 허무하게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 목숨을 아끼십시오.”
“나는 주군을 지키지 못했소! 그런 놈이 살아서 무엇하겠소?”
“흑 형님께서는 복수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복수? 흥! 세상에 천자를 상대로 복수할 사람이 있을 수나 있단 말이오?”
그가 큰 소리로 외치자 주위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옥의 역모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데 객점에서 웬 낯선 남자가 황제를 상대로 복수 운운하고 있으니 저마다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다.
진양이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흥! 양 형이라도 유 낭자가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내가 볼 때 그 낭자는 양 형의 말에 따를 것이오. 그러니 양 형도 복수를 하진 않을 것이 아니겠소?”
진양은 어떻게든 흑표를 진정시키고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꺼냈다.
“흑 형님께 말씀드리지요. 저희 부모님도 역모에 연루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흑표가 흠칫 떨더니 물었다.
“양 형의 부모님이?”
“물론 이번 역모 사건은 아닙니다. 두 분은 십삼 년 전 호유용 사건에 연루되어 돌아가셨으니까요.”
“……!”
“그리고 이번에는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국주 어르신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원한으로만 따지자면 저 역시 흑 형님 못지않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흑표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럼 양 형은 복수를 계획하는 것이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저는 이러한 비극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황제는 무고한 사람들을 의심해서 무작정 죽이고 있으니 민심의 성토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나는 이런 억울한 죽음을 막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자들과 뜻을 모아서 힘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위기에 처한 자들을 구하고 싶습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협의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