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69
신필천하(神筆天下) 69화
진양은 이 순간 임패각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어려운 자들을 위해 힘을 쓰고 선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협의가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단순히 흑표의 죽음을 말리려고 꺼내게 된 말이 지금은 진양의 인생 지표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지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 분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진양이 포권을 취하며 흑표를 진중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흑 형님,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버리려는 그 목숨을 제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와 함께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흑표가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양 형은 문파를 세울 생각이오?”
“그것이 문파이든 학당이든 형태는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와 뜻이 맞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협의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방법은 많다.
반드시 칼을 뽑고 악을 찌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문인은 글로 싸울 수 있을 것이고 무인은 힘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진양은 협의를 실천하는 조직을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국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애초에 진양이 목표한 대로 서예만 널리 가르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참뜻을 깨우치게 할 수 있으리라.
흑표는 진양의 다부진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경외감이 느껴졌다. 적어도 이 순간 허무하게 목숨을 버리려는 자신보다 진양이 한참은 위에 서 있는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진양의 포부에 감동한 것이다.
순간 그가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양 형을 위해서 이 흑표가 목숨을 바치겠소!”
진양이 얼른 반례하며 그를 잡아 일으켰다.
“지나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십시오. 흑 형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겠다니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양 형, 우리 이럴 것이 아니라 혈사채로 돌아갑시다. 양 형의 계획을 유 낭자에게도 알리는 것이 좋겠소. 혈사채도 양 형을 은공으로 대하니 많이 도움을 줄 것이 아니겠소. 서두릅시다.”
“그러지요.”
진양도 흔쾌히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이곳에 언제 관병이 들이닥칠지 모르기에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진양은 은자를 계산대 위에 던져 두고는 말을 타고 곧장 혈사채로 향했다.
두 사람이 경석산 아래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들이 언덕을 내려가려는데 먼발치에서 한 무리의 인파가 산에서 내려와 서쪽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대략 서른 명 정도의 인원이었는데, 마차 하나를 호위하며 달리는 모습이 저마다 날렵하고 무공이 상당한 수준인 듯 보였다.
진양이 말을 세우고 흑표에게 물었다.
“흑 형님, 저들은 누구일까요? 내려온 길을 보니 혈사채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흠. 무공이 제법 수준급인 듯하오. 혈사채를 찾아온 손님일지도 모르겠소.”
“혹시 역모 사건과 관련해서 무림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요?”
“한번 저들을 불러서 물어나 봅시다.”
두 사람은 곧장 말을 달려 그 무인들을 뒤쫓아 갔다. 대략 삼 리 정도를 달려가니 소리치면 목소리가 들릴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진양이 고함쳐 불렀다.
“보시오! 멈춰주시오!”
그러자 그 무리가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예닐곱 명이 말을 돌려 세웠다. 하지만 나머지 무인들은 여전히 마차를 호위한 채 제 갈 길만을 고집했다. 아니, 오히려 아까보다 더욱 빨리 달리는 듯했다.
진양과 흑표가 가만 보니 여간 수상쩍은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달려가자 앞서 말을 돌려 세운 예닐곱 명의 무인들이 살벌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뭐냐?”
진양은 초면에 무례한 말을 던져 오는 이들을 보고 슬쩍 눈썹을 구겼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고 물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오시는 길이오?”
그러자 앞서 말한 무인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진양과 흑표를 훑어보며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거듭된 무례함에 흑표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정중히 묻는 말에 어찌 묻는 말로 대답한단 말인가? 그대는 강호의 예절도 모른단 말인가?”
“흥! 묻는 말로 따지면 내가 먼저 물었다. 당신들 정체가 뭐지?”
진양은 이들이 극도로 경계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한 가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어쩌면 이들은 우리가 황궁의 무인일까 봐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예민할 수도 있겠지. 이들은 혈사채의 손님인 듯하니 무례하게 굴지 말자.’
마음을 굳힌 진양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는 혈사채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는 자들이오. 여러분은 혈사채를 찾아오신 손님입니까?”
그러자 상대가 코웃음을 쳤다.
“너희가 알 것 없다.”
그러더니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만 가자!”
그들이 막 말머리를 돌리는데 흑표가 그 앞으로 달려 나가 길을 막았다.
“아무래도 수상하군! 네놈들, 정체가 뭐냐?”
“알 것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억지로라도 알아내야겠다.”
그러자 상대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쳐라!”
그 순간 무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흑표를 덮쳐 갔다. 그들의 몸놀림이 매우 신속하고 민첩해서 흑표는 말에서 얼른 뛰어내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엇! 형님!”
진양이 깜짝 놀라며 수호필을 꺼내 들었다. 그가 몸을 훌쩍 날려서 적들을 향해 휘두르니 수호필을 막은 자들이 저마다 큰 소리를 지르며 뒤로 튕겨 나갔다. 흑표 역시 검을 꺼내 들고 곧바로 응수했다.
두 사람의 무공이 뜻밖에도 고강하니 무인들의 표정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진양과 흑표로서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추격하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들은 갑자기 적들이 달아나니 허탈한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저들은 누구일까요?”
“모르겠소. 하지만 혈사채를 찾아온 손님은 아닌 듯싶소.”
“하긴, 혈사채를 찾아온 손님이라면 우리에게 이렇듯 무례하게 굴 이유가 없겠죠. 아, 가만!”
진양이 고개를 돌려 흑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흑표의 머릿속에도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저들은 혈사채를 습격하고 달아나는 천의교 무인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문파를 습격하는데 누가 마차를 타고 온단 말인가?
진양이 얼른 말했다.
“아무래도 저들을 쫓아가기보단 혈사채로 먼저 돌아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은 말에 올라타고 곧바로 산을 올라 혈사채로 갔다.
두 사람이 혈사채에 도착하자 위사령이 얼른 달려와서 맞이했다. 진양은 그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다그쳐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문제가 생겼소, 양 소협.”
“무슨 일입니까?”
“천상련이…… 그놈들이 유 낭자를 데리고 갔소.”
“뭐라구요?”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그들이 왜 유 낭자를 데려갔는지 모르겠소.”
진양은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들이 마차를 타고 돌아갔습니까?”
“그건 모르겠소. 어쩌면 마차를 산 아래에 대기시켜 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혹시 수상한 자들을 보았소?”
“혈사채로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본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 바로 혈사채로 오는 길입니다. 대략 서른 명 정도 되어 보이더군요.”
“이런! 그 마차에 바로 유 낭자가 타고 있을 거요. 우선 혈사전으로 갑시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진양과 흑표는 위사령을 따라 혈사전으로 갔다. 그곳에는 조전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는데, 곡전풍이 내공을 불어넣어 그를 치료하고 있었다.
진양이 놀라서 다가가 물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양 소협,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전이 그간 있었던 사정을 이야기했다.
천상련의 무인들이 혈사채를 찾아온 것은 정오쯤이었다. 그때 혈사채에는 조전이 남아 있었고, 곡전풍과 위사령은 산을 내려가서 볼일을 보는 중이었다.
조전은 수하로부터 천상련의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문전까지 마중을 나갔다.
“천상련의 창천부당주 곽연이오.”
“본채의 좌검부장 조전이오. 곽 부당주께선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
곽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에 금룡표국의 유 낭자가 와 있지 않소?”
“그렇소만.”
“유 낭자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왔소이다.”
조전은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훑어보니 곽연을 따라온 수하들은 모두 무공 실력이 제법 높은 듯했다. 단지 전할 말이 있어서 온 사람치고는 그 수하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몹시 날카로웠던 것이다.
조전이 짐짓 아무것도 모른 척 웃으며 답했다.
“그럼 따라오시오.”
조전은 그들을 혈사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전각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오.”
그런 뒤 조전은 수하들을 불러 곽연 일행을 감시하게 한 후 유설을 찾아갔다. 유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소 곽연이 있는 전각까지 내려왔다.
“곽 부당주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그렇소, 낭자. 이번 사건으로 마음고생이 많으시지요?”
“제게 하실 말씀이 뭔가요?”
유설의 냉랭한 반응에 곽연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가 곧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낭자께 전해 드릴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요? 뭐죠?”
아니나 다를까, 유설의 표정이 흔들렸다.
곽연이 내심 사악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유 국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아! 아버지가요?”
“그렇습니다. 저희 천상련이 유 국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말에 유설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얼른 그녀를 부축해 주는 조전 역시 내심 깜짝 놀랐다.
유설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울컥 감정이 복받쳤다.
“아,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니…….”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꼭 모아 잡았다.
하지만 조전은 영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진양을 구하기 위해 금룡표국을 찾아갔을 때만 해도 유인표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물론 천상련 무인들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천상련에서 유인표를 구했단 말인가?
반면 유설은 지금 지푸라기만 한 희망만 있어도 그것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에 어떤 딸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거라고 단정하고 의심부터 하겠는가?
곽연은 그러한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그때 조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상하군.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금룡표국이 멸문을 당하고 유 국주님의 행방을 알 도리가 없었소. 천상련에서는 언제 움직인 거요?”
“우리는 사건이 벌어지던 날 천만다행히도 응천부에 있었소. 그때 유 국주님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돕게 된 것이오.”
“흐음.”
조전은 그저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조전이 사건 당일 날의 정황을 꼬치꼬치 캐묻자 뜻밖에도 곽연은 막힘없이 그날의 상황을 술술 이야기로 풀어냈다. 조전은 몰랐지만 사실 곽연은 진양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수하로부터 계속 금룡표국 근처에서 감시를 하게 했었다. 때문에 멸문당하던 날의 상황을 직접 본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곽연이 유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해서 오늘은 이렇게 유 낭자를 모시러 왔소. 우리와 함께 갑시다. 국주 어르신께서 낭자를 몹시 보고 싶어 하시오.”
“아버지는 건강하신가요?”
곽연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중상을 입으셨소. 하지만 천상련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곧 쾌차하실 거라고 생각하오.”
유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버지는 그날 이미 부상을 입고 계셨으니까.’
그때 조전이 유설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전했다.
“아가씨, 양 소협이 사정을 알아보러 응천부로 갔으니 기다렸다가 그분이 오시면 함께 움직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