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7
신필천하(神筆天下) 7화
붓은 서책을 만들 종이에 글씨를 써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작은 크기였다.
양진양이 처음으로 필사할 책은 비호도법(飛虎刀法)이라는 무공서였다. 물론 표지의 글씨는 가장 나중에 적을 것이었기 때문에 진양은 본문부터 펼쳐 놓았다.
양진양은 제일 첫 글자인 호(虎) 자를 해서체로 적었다. 필획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 적으니 한 글자를 적는데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다음으로 조(爪) 자를 옮겨 적었다. 이번에는 필획이 적은 관계로 첫 글자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다음은 파(爬)에 이어서 지(地)까지 적었다.
즉, 호조파지(虎爪爬地)라는 초식으로 비호도법의 기수식에 해당되는 이름이었다.
이 초식명은 글자 그대로 호랑이가 발톱으로 바닥을 긁는 자세를 뜻하는 것인데, 그저 글자 하나하나에만 정성을 쏟아붓고 있는 진양으로서는 초식의 뜻까지 상기시킬 여유가 없었다. 이는 풍천익의 경고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진양은 계속해서 초식에 대한 풀이를 적어갔다.
마침내 한 장을 가득 채운 진양은 자신이 쓴 글귀들을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다.
한데 종이를 들여다보던 진양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글자 하나하나에만 집중하여 쓰다 보니 전체적인 조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각각의 필획은 아름답게 표현됐지만, 정작 포백(佈白:전체의 골격)에서는 조화를 이루지 못해 실패한 글씨가 되고 만 것이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일부러 글귀를 외우지 않기 위해서 글자 하나하나에만 집중하여 쓰다 보니 전체적인 구도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양진양은 망설임없이 종이를 찢어 버렸다. 써놓은 것이 아깝긴 하지만 글자가 중앙을 지키지 못하고 비뚤비뚤 춤을 추니 책을 구성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양진양은 다시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앞서 실패한 것을 의식해서 먼저 쓴 글자를 고려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이 방법 또한 완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앞서 적은 것보다는 훨씬 나은 듯했다.
진양은 이런 식으로 하루 종일 필사를 했다. 필사를 하다가 글자가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포백이 아름답지 못하면 가차없이 종이를 찢어 버리곤 했다.
어느덧 점심이 지나고 저녁도 지나 밤이 깊었다.
탁자에 놓인 등불이 슬쩍 흔들렸다.
진양의 방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필사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진양은 방 안에 누가 들어선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언제부터 쓴 것이냐?”
양진양은 낯익은 목소리가 불쑥 들려오자 그제야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눈길을 돌려 보니 어느새 풍천익이 다가와서 진양이 필사한 종이를 들고 훑어보고 있었다.
“각주 어르신 오셨어요?”
진양이 얼른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풍천익은 진양을 힐끔거리고는 계속해서 필사한 글씨를 훑어보았다.
“저녁은 먹은 게냐?”
“네, 어제 곽 부각주님과 함께 먹었어요.”
“어제 말고 오늘 저녁 말이다.”
“오늘이요?”
양진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아!’ 하는 소리를 뱉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되지 않았는가? 필사를 하던 중 주위가 어두워서 아무 생각 없이 불을 밝혀놓은 것인데, 어느새 해가 진 것이었다니…….
양진양을 곁눈질로 훑어보던 풍천익은 대략의 사정을 짐작하고는 퉁명스레 물었다.
“언제부터 필사를 시작했느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했어요.”
“그럼 조반은?”
“못…… 먹었어요.”
“오반은?”
“오반도…….”
“설마 석반도 거른 게냐?”
양진양이 주눅이 들어 대꾸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풍천익이 차갑게 일렀다.
“세 끼니를 모조리 거르다니, 굶어 죽을 생각이냐?”
“그게 아니라…….”
“시끄럽다! 다음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끼니를 챙겨야 한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글씨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네놈이 맡은 일이 얼마나 막중한지 알란 말이다. 알겠느냐?”
“네.”
양진양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뒤늦게 허기가 몰려오는데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으니 서러움이 배가 된 것이다.
한편 풍천익은 매섭게 야단치기는 했어도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끼니를 거르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했다니. 글을 쓸 때만큼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군. 알수록 살려둘 수 없는 녀석이로다.’
풍천익은 냉정한 표정으로 필사본을 훑어보았다. 과연 글자 하나만큼은 정갈하고 깔끔해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알아보기 힘든 글자는 없었느냐?”
“아직은 없었어요.”
“다음에도 끼니를 거르면 안 되니 내가 하루에 쓸 분량을 정해주겠다. 앞으로 오늘 적은 분량만큼만 적도록 해라. 그 이상 적어서는 안 된다.”
“만약 시간이 남으면 어떡해요?”
“흥! 네가 오늘 첫날이긴 하지만 끼니도 걸러가면서 적은 분량이다. 그렇게 빨리 필사 속도가 늘 것 같으냐? 혹시라도 시간이 많이 단축되면 다시 내가 분량을 정해주마. 그 전에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져도 좋다.”
“알겠어요.”
양진양이 순순히 대답하자 풍천익이 고개를 돌려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소부 있느냐?”
“예, 각주 어르신.”
공소부가 얼른 뛰어왔다.
“진양이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하니 가서 요깃거리를 좀 가져오너라.”
“알겠습니다.”
공소부가 황급히 나갔다.
양진양은 자신의 부주의로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풍천익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주의를 주고는 진양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진양은 공소부가 가져온 육포 조각과 만두 몇 개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다음 날부터 양진양은 정해진 분량만을 필사했다. 물론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하루 분량을 채우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날에는 자정이 다 돼서야 정해진 분량을 모두 끝낼 수가 있었다.
실수를 많이 하거나 알아보기 힘든 글자 때문에 풍천익을 찾아가야 하는 날에는 하루 분량을 미처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필체가 안정되자 필사 속도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양진양은 석반을 먹기도 전에 이미 하루치의 분량을 모두 끝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여유가 생기면서 양진양은 각종 심부름도 겸하게 됐고, 때로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럴 때면 천보각 일층에 진열되어 있는 서적을 자신의 방으로 가져와서 읽곤 했다. 일층의 장서들은 대부분이 무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논어나 도덕경 같은 책도 있었고 의술에 관한 서적도 있었다.
필사하는 무공서를 제외하고는 어떤 책을 읽어도 상관없다는 풍천익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양진양은 새로 필사할 무공서를 가지러 가기 위해서 천보각 지하로 내려갔다. 마침 지하에서는 풍천익이 장서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양진양이 인사를 건네고는 구석진 안쪽으로 걸어갔다. 여느 때처럼 필사할 서적을 챙기고는 돌아 나오려고 하는데, 문득 책장 사이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서적들이 보였다.
호기심이 동한 진양이 가까이 걸어가서 살펴보니, 온갖 화려한 제목이 붙은 각종 무공서였다.
그때 마침 안쪽 진열장으로 걸어오던 풍천익이 진양을 보고 물었다.
“거기서 뭘 하는 게냐?”
“책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어서요.”
“놔둬라. 그것들은 전부 버릴 거다.”
“이걸 전부 버릴 거라고요?”
“그래.”
양진양이 놀란 눈으로 다시 책을 내려다보았다. 쌓여 있는 서적들은 하나같이 상태가 깔끔해 보였다. 오히려 자신이 필사하는 서적들보다도 종이 상태가 좋아 보였다.
결국 진양이 호기심을 못 이기고 물었다.
“왜 멀쩡한 책을 버려요?”
“흥! 거죽이 멀쩡하면 뭐하겠냐, 속이 형편없는데. 그것들은 전부 이름만 번지르르할 뿐 하나같이 삼류 무공들이다. 그것도 아니면 사기꾼들이 책 팔아먹으려고 아무렇게나 적은 잡서일 뿐이다.”
양진양은 서적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무적검법(無敵劍法), 수라천마공(修羅天魔功), 극강진경(極强眞經), 절대강공(絶對强功) 등…….
풍천익의 말대로 제목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번지르르했다.
한데 그중에서도 유독 진양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서적들에 비해 비교적 낡아 보였는데, 표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자양진경(字陽眞經).
무엇보다 글자를 뜻하는 ‘자(字)’ 자가 들어있다는 것이 진양의 호기심을 이끈 것이다.
양진양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이상하게 책을 들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양은 방에서 창문을 통해 천기각의 입련생들이 무공을 익히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진양의 방에서는 천기각의 연무장이 일부나마 보였던 것이다.
그들을 볼 때마다 진양도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양은 자신이 무공에 재능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끔씩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것을 시도해 보면 영 품이 어색하고 이상해서 금방 그만두곤 했다.
한데 이 책은 어쩐지 진양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자양진경은 어떤 무공일까? 왜 제목에 ‘자(字)’ 자가 있을까? 별로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그때 진양의 귀에 풍천익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리 멍하니 서 있는 게냐?”
“각주 어르신, 여기 책들을 버리실 거면 제가 가져가도 돼요?”
“흥! 무공이라도 익혀보고 싶은 게냐? 글쎄, 너는 재능이 없다니까.”
풍천익이 노골적으로 무시하자 양진양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도 알아요. 단지 궁금해서 보고 싶은 거예요.”
“하필이면 사기꾼들이 적은 책들을 보고 싶은 게냐? 뭐, 상관없겠지. 보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풍천익의 말이 떨어지자 양진양은 얼른 자양진경을 품에 넣고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풍천익의 생각이 바뀔까 봐 진양은 곧장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날 밤 하루 분량의 필사를 마친 양진양은 필사본을 풍천익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홀로 방에 남아서 오늘 아침에 가져온 자양진경을 펼쳐 보았다.
양진양은 책에 쓰인 글씨가 보기 드문 명필이라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다. 게다가 기이하게도 이 책은 서체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대략이나마 훑어보니 마지막에는 무공 구결이 광초(狂草:매우 흘려 쓴 서체)로 적혀 있어 읽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진양은 우선 첫 장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구절마다 하늘에 뜬구름이요, 한밤의 꿈결 같은 소리였다.
그래도 진양은 억지로라도 읽어갔다.
하지만 결국 절반 정도 읽고 났을 때 진양은 긴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고 말았다.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감도 잡기 힘들었던 것이다.
‘풍 각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삼류 잡서일 뿐이구나. 아니, 난 정말 재능이 없나 봐.’
양진양은 씁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책을 침상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