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71
신필천하(神筆天下) 71화
그날 밤 이경이 막 지날 때쯤 진양과 흑표는 천중산을 올랐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몹시 은밀하고 민첩했다.
진양은 어렸을 때 오랜 기간 천상련에서 머물렀기에 천상련 내의 지리나 방비에 대해서 굉장히 세세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천상련의 외벽을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건물 지붕을 타고 날렵하게 이동했다.
과연 화산파와 종남파가 방문해서인지 넓은 객당은 밤이 깊었는데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진양은 파수를 서는 무인들의 이목을 피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마침내 창천당 맞은편 건물의 지붕까지 옮겨갈 수 있었다.
진양과 흑표는 경공을 펼쳐 창천당 지붕으로 이동한 뒤에 처마 아래로 조금씩 접근했다. 마침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성난 고함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자네는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한낱 욕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사사로이 수하들을 움직인단 말인가?”
진양이 숨을 죽이고 안을 들여다보니 왕자헌이 곽연을 앞에 세워두고 질책하고 있었다. 아마도 곽연이 유설을 데려온 것에 대해서 나무라는 모양이었다.
왕자헌이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찌했나?”
“지금 청운루(靑雲樓)에 있습니다.”
“참 잘하는 짓이군, 잘하는 짓이야! 화산파와 종남파가 몰려든 이 시점에 금룡표국 유 국주의 여식을 잡아 가두다니! 만약 이 이야기가 두 정파 놈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들이 가만있을 것 같은가?”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금 걱정을 안 하게 생겼는가! 언제 터질지도 모를 폭탄이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데! 자네 정말 풍 각주처럼 천중옥에 갇혀봐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그러자 곽연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순간 엿듣고 있던 진양은 몸을 흠칫 떨었다.
‘풍 각주님이 천중옥에 갇혀 계신다고? 도대체 그분이 왜 천중옥에 갇힌단 말인가?’
그때 왕자헌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 여자가 절대로 천상련을 벗어나면 안 되네. 그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든지 아니면 죽이게.”
“알겠습니다.”
곽연이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왕자헌은 한차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곽연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그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만 가보게.”
곽연은 창천당에서 나온 후 곧바로 청운루로 향했다. 청운루는 까마득한 벼랑 끝에 세워진 건물이었는데, 그곳은 들어가는 문만 지키면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 곳이었다.
곽연이 청운루 안으로 들어가자 유설이 창문을 열고 너른 창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넋을 빼놓고 있는지 곽연이 들어선 줄도 모르는 듯했다.
곽연은 그녀의 뒷모습만 봐도 마음이 떨렸다. 그는 비록 간사하고 비열한 면이 있긴 하지만 유설을 대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곽연이 막 그녀를 부르려는데, 창밖을 보던 유설이 갑자기 몸을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창밖을 자세히 보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유설은 그대로 몸을 던지려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란 곽연이 얼른 소리치며 달려갔다.
“유 낭자!”
그가 순식간에 유설의 허리를 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결국 유설은 창밖으로 몸을 던지지 못하고 그에게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 놓으세요!”
“유 낭자! 어찌 그리 허무하게 목숨을 버리려고 하시오!”
순간 유설이 손바닥으로 곽연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나요?”
“유 낭자, 난…… 난 정말 당신을…….”
“닥쳐요! 난 당신에게 몸을 빼앗길 바에 죽어 버리겠어요!”
곽연은 유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 나의 어디가 그리 싫은 것이오?”
“처음에는 하나가 싫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당신의 모든 것이 싫어요!”
곽연은 그녀에게서 이처럼 절망적인 소리를 듣게 되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가 유설의 손목을 콱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흥! 당신이 죽음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소? 난 당신을 죽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오!”
“이 악마 같은 인간!”
유설이 다시 손을 후려쳤다. 하지만 그녀의 가녀린 손은 곽연의 다른 손에 또 붙잡히고 말았다.
곽연이 이를 악다물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후 그가 지독한 애증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으시오. 나는 한번 한다면 하는 놈이오. 그대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소. 하지만 나는 그대를 품을 것이오. 그리고 내 곁에 평생 둘 것이오.”
“그딴 게 사랑이라고…… 헛!”
유설은 소리치다 말고 헛바람을 삼키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느새 곽연이 그녀의 혈도를 찍어 버린 것이다.
곽연이 유설의 턱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이제 당신 의견은 듣지 않겠어. 그런 눈으로 날 보지도 마.”
곽연은 다시 한번 손을 뻗어내더니 유설의 혼혈을 짚었다. 순간 유설은 온몸이 허물어지듯 그대로 주저앉으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곽연은 그런 유설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그가 청운루를 나서며 무인들을 향해 명했다.
“청운루의 창문을 모두 막아 버려라! 그리고 여자가 허튼짓을 할 수 없도록 사지를 묶어둬라!”
“알겠습니다!”
두 명의 무인이 청운루 안으로 들어갔고, 곽연은 성큼성큼 걸어 사라졌다.
곽연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청운루 지붕 위에서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진양과 흑표였다.
“무리하게 움직이는 것보다 화산파와 종남파를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소?”
“어떻게요?”
“화산파와 종남파는 그래도 명문 정파가 아니겠소? 내일 아침 당당하게 천상련을 찾아와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는 곳에서 말을 하는 거요. 유 낭자가 이곳에 인질로 잡혀 있다고. 그렇다면 천상련이 그들 두 문파를 의식해서라도 유 낭자를 순순히 내어줄 수도 있지 않겠소? 내 보기에 유 낭자에게 집착하는 것은 곽연 혼자인 것 같은데, 천상련이 여인 한 명 때문에 모든 정파를 상대로 전쟁을 할 것 같지는 않소.”
하지만 진양이 고개를 저었다.
“그 방법은 분명히 좋습니다만, 지금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왜 그렇소?”
“화산파가 요구하는 칠절매화검은…… 사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흑표가 뜨악한 표정으로 진양을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소?”
“칠절매화검은 제가 보유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저는 천상련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천상련에서 훔쳐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화산파를 찾아가 돌려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진양이 품에서 칠절매화검을 슬쩍 꺼내 보여주었다. 흑표는 한동안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흐음, 일이 꼬였구려.”
“그렇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지요. 만약 지금 나서서 화산파에게 무공 비급을 전해주었을 때, 물론 일이 잘 풀린다면 다행이지만 자칫하다간 화산파와 종남파, 그리고 천상련 세 단체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애매하게 됐습니다.”
“그럼 어쩌시겠소?”
흑표의 질문에 진양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요.”
“하긴, 지금과 같은 경우라면 오히려 은밀히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도. 그럼 갑시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지붕 아래로 몸을 날렸다.
청운루 문을 지키던 두 명의 무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두 무인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곽연의 명을 받아 실내로 들어갔던 동료들이 벌써 나올 리가 없었다.
그 순간 검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왼쪽에 선 무인의 목을 단숨에 그었다.
사악!
“컥!”
한 명의 무인이 울컥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왼쪽의 무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함을 지르려고 했지만, 그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킬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의 등에는 뾰족한 무언가가 요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진양의 수호필이었다. 공력으로 인해 칼날처럼 빳빳하게 곤두선 은잠사 붓털이 척추의 요혈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 살려…… 큭!”
무인은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진양의 수호필이 그의 혼혈을 찌른 것이다. 목이 베여 죽은 무인에 비하자면 운이 좋은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양과 흑표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갔다.
마침 이제 막 유설의 몸을 밧줄로 묶으려던 두 무인이 흠칫 떨며 돌아보았다.
“누구……!”
쉬쉬잇! 쉬이잇!
무인 둘이 입을 떼자마자 진양과 흑표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흑표의 반수검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상대의 심장을 꿰뚫어 목숨을 끊어놓았지만 진양의 수호필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요혈을 찔러 기절시켰다.
이를 본 흑표가 씁쓰레 웃으며 말했다.
“양 형은 어지간해서는 살생을 하지 않는구려.”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고는 유설을 묶은 밧줄을 풀었다.
하지만 이미 혼혈이 짚인 유설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양이 맥을 짚어 보니 그녀를 깨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추궁과혈을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흑표가 말했다.
“지금 그녀를 깨운다고 해도 곧바로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은 힘들 거요. 우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다음 혈을 풀어줍시다.”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가지요.”
진양은 얼른 유설을 등에 업은 후 청운루를 나왔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 청운루 모퉁이를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왕자헌과 곽연이 두 사람과 정확히 마주친 것이다.
“엇?”
왕자헌과 곽연이 깜짝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그 순간 흑표가 얼른 진양의 소매를 이끌며 뒤돌아 달렸다.
“갑시다!”
두 사람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하자 왕자헌과 곽연이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얼른 뒤쫓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무인들이 일제히 뒤를 쫓기 시작했다.
진양은 천상련 내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막힘없이 질주했다.
두 사람이 한참을 달리는데 마침 갈림길이 나타났다.
흑표가 재빨리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길을 나누는 것이 좋겠소!”
“흑 형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걱정은 말고 유 낭자를 잘 보살펴 달아나시오!”
“알겠습니다!”
진양이 대답과 함께 먼저 왼쪽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흑표는 그 갈림길에 잠시 서 있다가 왕자헌과 곽연이 보이자 얼른 오른쪽 길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자헌은 노련한 무인이었다. 그는 얼핏 달아나는 자가 한 명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갈림길에서 멈췄다.
“자네는 저자를 쫓게!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예!”
왕자헌과 곽연은 길을 나누어 쫓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무인들 역시 두 갈래로 자연히 나뉘어졌다.
왕자헌은 얼마 가지 않아서 진양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양이 아무리 련 내의 지리가 익숙하다지만 천상련에서 지내는 사람보다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거기에다 등에 실신한 사람을 업고 있으니 자연히 걸음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서라!”
왕자헌이 공력을 끌어올리고 단숨에 진양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 순간 진양이 왼팔로 유설을 앞으로 돌려 안더니 오른손으로 수호필을 쥐고 세차게 휘둘렀다.
느닷없는 공격에 왕자헌이 깜짝 놀라 검을 앞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