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72
신필천하(神筆天下) 72화
까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왕자헌이 뒤로 훌쩍 튕겨났다. 그의 손이 찌릿찌릿 울리고 있었다.
‘이놈! 내공이 대단하군!’
왕자헌은 눈썹을 구기고 진양을 보았다.
한데 얼굴이 낯이 익는 듯하면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실 지금의 진양은 표국에서 연회를 벌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분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바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왕자헌은 곧 진양이 든 수호필을 보고 그의 정체를 파악했다.
“이게 누구시오? 양 대협이 아니시오?”
진양이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오랜만에 뵙소, 왕 당주.”
“이렇게 만나서 반갑소만, 어째서 본 련의 귀하신 손님을 납치하려고 하시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왕자헌의 수하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어느새 진양의 앞뒤 진로를 모두 차단한 채 포위해 버렸다.
진양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대들이 유 낭자를 함부로 데려와 놓고 낯짝이 두껍군!”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손님을 다시 놓아주시오.”
“그럴 수는 없소.”
“이러면 곤란하오. 지금 본 련에는 정파의 손님들이 와 계시오. 그들이 만약 양 대협의 이런 무례를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심히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오.”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무슨 무례를 말이오?”
왕자헌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양 대협이 본 련의 손님인 유 낭자를 기절시킨 후 납치하는 것이 무례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뭐요?”
진양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왕자헌의 간계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 왕자헌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골칫거리를 진양에게 떠넘기고 모든 책임을 전가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간악하기 짝이 없는 이화강동(移禍江東)의 계책이었다.
진양이 수호필로 왕자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흥!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작자군!”
“뻔뻔한 건 그쪽이 아니오? 자, 이러지 말고 어서 유 낭자의 혈을 풀어주고 놓아주시오.”
진양은 주변을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앞뒤의 길목은 창천당의 무인들로 꽉 막혀서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창천당 외에 다른 무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자헌이 간계를 써서 책임을 전가시키긴 했지만, 어쨌거나 천상련의 입장에서도 이런 일은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으리라.
순간 진양이 몸을 번쩍 솟구치며 옆의 벽을 타고 날아올랐다. 그가 자양신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니 유설을 업고도 건물 지붕 위까지 가까스로 올라설 수 있었다.
“쫓아라!”
왕자헌이 소리치자, 무인들 모두가 몸을 날려 벽을 타고 지붕 위로 뛰어올라 왔다.
진양은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진양은 지붕 위에서 도망치다간 어디에서든 훤히 보이기 때문에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건물 사이로 뛰어내렸다. 추격자들이 줄을 이어 뛰어내리며 진양을 뒤쫓았다.
진양은 무인들이 앞을 가로막고 나타날 때마다 길을 꺾었다. 그는 이대로 도망치다 보면 끝내는 천상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천상련의 건물은 애초에 외부의 침입을 대비해서 미로 같이 설계되어 있었다. 때문에 창천당 무인들이 이미 진을 펼쳐 자신을 몰고 있다면 결국은 련 내에서 방황하다가 사로잡히고 말 터였다.
‘이대로는 벗어날 수 없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진양의 뇌리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진양은 방향을 틀었다.
그가 달리는 방향은 창천당의 무인들로서도 전혀 뜻밖이었다.
때문에 그의 앞길을 막으며 나타난 무인은 고작 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
진양이 순간 그들을 지나가며 수호필을 꺼내 들고 휘둘렀다. 한 줄기 은빛 섬광이 번쩍이자 검을 든 두 무인의 손목이 그대로 싹둑 잘려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두 무인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진양은 그대로 전방으로 돌진하더니 몸을 날려 담장을 뛰어넘었다. 담장 안의 정원은 진양에게 매우 익숙한 풍경이었다.
바로 그곳은 천보각의 정원이었다.
순간 천보각 지붕 위에서 무인 십여 명이 진양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천보각을 지키는 천보심육검(天寶十六劍)이라 불리는 무인들이었다.
진양은 체내의 모든 자양신공을 오로지 경공에만 집중하여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그가 순식간에 열여섯 무인의 틈새를 실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천보십육검의 열여섯 자루 검은 번번이 허공을 베어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검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쳤지만, 가벼운 검상만 남기고 말았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사실 진양은 과거 천보각에서 지내면서 천보십육검의 훈련 모습을 수 없이 지켜봐 왔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침입자를 대비해서 검진을 펼치는 훈련을 해왔다. 때문에 진양은 천보십육검의 검진을 본능적으로 파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짧은 거리였고 단 한 번의 시도였기에 성공한 것이다. 만약 다시 한번 이런 시도를 했다가는 검날이 목을 스치는 선에서 끝나지 않으리라.
천보각 정문에 다다른 진양은 다시 모든 공력을 수호필에 집중시키고 휘둘렀다.
꽈당!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 큰 소리를 울리며 벌컥 열렸다. 늦은 밤이어서 그런지 천보각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양은 곧바로 천보각 지하 보관실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실의 육중한 철문을 닫아걸었다.
이 모든 과정이 숨 몇 번 쉴 동안에 이루어졌으니, 천상련의 무인들은 눈 뜬 봉사라도 된 양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왕자헌과 그의 수하들이 뒤늦게 쫓아 들어왔지만 육중하게 닫힌 철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천보각 지하 보관실의 철문은 원래 안에서 잠그면 밖에서 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 지하실은 비상시의 탈출로가 있는 곳이기도 했기에 밖에서 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천보각에서 오랫동안 지냈던 진양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천상련을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우선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밖에서 왕자헌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는 가서 출구를 봉쇄해라!”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그저 천보각의 출구를 봉쇄하라는 말로 생각하겠지만, 진양은 그것이 비밀 통로의 출구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수하들의 우렁찬 대답 소리가 들리더니 다수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이어서 왕자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양 형,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소? 그곳엔 먹을 것이 없소. 어차피 우리에게 사로잡히게 될 몸, 그냥 포기하고 나오시오. 우리 천천히 대화로 오해를 풀어봅시다.”
진양이 짐짓 여유있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나는 이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니 언제든 나갈 수 있을 거요!”
그 말에 왕자헌은 잠시 침묵했다. 아마도 진양이 비밀 통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에 놀란 듯했다.
잠시 후 왕자헌이 다시 말했다.
“그곳에 비밀 통로 따위는 없소, 양 형.”
“하하하! 그대는 정말 뻔뻔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이곳의 책 하나를 꺼내고 바닥의 단추를 누르면 벽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모를 줄 아시오? 게다가 이 기관장치는 안에서만 작동하니 이보다 안전한 곳도 없겠지!”
진양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왕자헌도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그걸 어찌 아셨소?”
“나는 이미 천상련으로 올 때 모든 정보를 입수한 뒤에 잠입했소!”
“흐음. 하나 양 형이 그 비밀 통로로 정말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미 그 비밀 통로 출구에는 내 수하들이 매복하고 있소이다. 그러니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소.”
“그렇다면 여기서 굶어 죽지요, 뭐.”
“양 형, 그러지 말고 우리 대화합시다, 대화.”
“지금 하고 있지 않소?”
진양이 빈정거리며 나오자 왕자헌은 분을 삭이는 듯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결국 왕자헌이 버럭 소리치며 몸을 돌렸다.
“흥! 좋소! 어디 거기서 얼마나 견딜지 두고 보지!”
이윽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더니 인기척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진양은 그제야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우선 한시름 놓았군. 그나저나 흑 형님은 어찌 되셨을까?’
아직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사로잡히진 않았을 것이다. 흑표의 특기가 민첩하고 빠른 경공이니 어쩌면 천상련을 무사히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진양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구에 놓인 야명주의 빛이 희미하게 지하실을 밝히고 있었다.
세상의 온갖 귀한 무공들이 존재하는 곳.
이런 곳에 들어섰으니 이제 천상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유설을 살려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왕자헌은 천보각 정문에서 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서성거렸다.
오늘은 천상련이 생긴 이래로 가장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화산파와 종남파가 찾아와서 골치가 아픈데다 진양과 유설이 천보각 지하실로 들어갔으니 이 노릇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제길!”
콰가가각!
그가 분통을 터뜨리며 검을 휘두르자 천보각 외벽에 굵고 긴 검상이 새겨졌다.
그는 숨을 식식 몰아쉬며 생각했다.
‘도대체 그놈이 어찌 지하 통로를 알았을까?’
그러고 보면 천보각으로 들어갈 때도 놈의 움직임은 몹시 민첩했다. 제아무리 고수라고 할지라도 천보십육검의 검진을 피하기는 어렵다.
한데 놈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움직였고, 정확히 단 한 번에 지하 보관실을 찾아갔다. 그 행동에 망설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천상련에 대해서 조사를 했다지만, 유설이 잡혀온 지 겨우 얼마나 지났던가?
그 짧은 시간에 천상련의 모든 비밀을 이처럼 완벽하게 알아낼 수는 없다.
역시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곽연이 수하들을 이끌고 천보각 정문에 도착했다. 왕자헌은 그를 보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 모든 것이 곽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그가 곽연에게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뺨을 한차례 올려붙였다.
짜악-!
곽연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가 곧 중심을 잡았다.
왕자헌이 소리쳤다.
“이제 어떻게 할 참이냐? 그놈이 천보각 지하실로 들어갔다!”
곽연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천보각 지하실로 갔습니까?”
“그렇다! 네놈이 한순간의 욕정을 이기지 못해서 이 꼴이 된 게 아니냐!”
“죄, 죄송합니다!”
“쫓아간 놈은 어찌 됐느냐?”
“놓, 놓쳤습니다. 놈이 워낙 경공이 뛰어나고 민첩…… 컥!”
곽연이 말을 마저 잇지도 못하고 종잇장처럼 날려가서 벽에 처박혔다.
왕자헌이 그의 가슴을 발로 걷어찬 것이다.
왕자헌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곽연에게 다가가서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이 멍청한 자식!”
왕자헌이 단검을 뽑아 그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온통 더럽힌다더니! 네놈이 딱 그 미꾸라지구나!”
“용, 용서를……!”
“닥쳐라!”
왕자헌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곽연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는 순간 단검을 단단히 움켜쥐더니 단숨에 곽연의 왼쪽 눈을 콱 내찔렀다.
“끄으읍!”
곽연이 입술을 꽉 깨물며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눌러 참았다.
왕자헌은 곽연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돌아섰다.
“네놈의 잘못은 목숨을 끊어도 부족할 지경이다. 하나 내 마지막으로 네놈 목숨을 남겨두지. 또다시 날 실망시키지 마라. 그땐 너 하나의 목숨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천보각으로 숨어든 쥐새끼들은 필살한다.”
“옛!”
말을 마친 왕자헌이 어디론가 저벅저벅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