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73
신필천하(神筆天下) 73화
8. 절세신공을 익히다
진양은 입구에 놓인 야명주를 들고 돌아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유설의 초췌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외모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진양은 야명주를 옆에 내려놓고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등에 양손을 댄 후 천천히 기를 주입시켜 갔다.
대략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유설이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랫배에서부터 따뜻한 진기가 샘솟듯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완전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등에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상대로부터 강물 같은 힘줄기가 끊임없이 흘러들어 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가 기쁜 마음으로 물었다.
“양 소협이에요?”
“정신이 드셨습니까?”
진양이 부드럽게 물어오자 유설은 마음속으로 격한 감동을 느꼈다.
그녀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는데, 진양이 말을 덧붙였다.
“우선은 정신을 집중해서 운공하세요.”
“아, 네.”
유설은 얼른 눈을 감고 전신의 진기를 운기하기 시작했다. 등에서부터 진양의 진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설은 정신이 더욱 맑아지고 푸근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후 그녀가 눈을 뜨고 말했다.
“전 이제 괜찮아요. 양 소협도 그만 쉬세요.”
“그럼…….”
진양은 그제야 양손을 거두었다.
꼬박 한 시진 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진기를 주입한 뒤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진양이 잠시 자양신공을 다스리고 나서 눈을 떴다. 어느새 유설이 몸을 돌려 진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양이 먼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기분은 좀 괜찮으신지요?”
“괜찮아요. 감사해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여긴 어디인가요?”
유설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보물 창고입니다.”
“보물 창고요?”
유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진양이 재미있는 듯 웃으며 답했다.
“천보각이라고 들어보셨겠지요?”
“천보각이라면 천상련의…….”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뭔가 떠올랐는지 깜짝 놀라 물었다.
“에? 그럼 여기가 그 천보각이란 말인가요?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진양이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유설에게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유설이 그제야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서 책장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여기 있는 것들이…… 전부 천하에서 끌어모은 각종 무공이란 말인가요?”
“그렇지요.”
문득 유설이 웃었다.
“풋. 궁지에 몰린 것치고는 너무 근사한 곳이네요.”
“그렇죠? 이제 어떻게 나갈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엔 나갈 수 있는 문이 두 곳뿐이라면서요?”
“맞습니다.”
“어떻게 나가죠?”
유설의 물음에 진양의 눈길이 책장으로 향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으니 힘을 좀 빌려보는 수밖에요.”
말을 내뱉는 진양의 표정에는 묘한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왕자헌은 아침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아니, 침상에는 엉덩이도 닿지 않았다.
갑자기 벌어진 이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손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곽연이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왼쪽 눈을 흰 천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벌겋게 배어 나온 핏물 때문에 천은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왕자헌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한 가지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또 뭐냐?”
왕자헌이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유설을 찾아온 양씨 녀석의 정체를 알 것 같습니다.”
“알 것 ‘같다’는 뜻인가, ‘안다’는 뜻인가?”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자헌이 차가운 표정으로 곽연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확실히 할 줄 아는 게 뭐야?”
“하지만 우선 들어보시면…….”
“네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왕자헌이 검을 꺼내 들고 곽연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내려칠 듯 검날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불똥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마치 곽연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검을 거두었다.
“우선 들어나 보지. 말해라.”
“그 녀석의 정체가 양진양인 것 같습니다.”
“양진양? 양진양…… 그게 누구지?”
왕자헌은 무림 인사 중에서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양진양. 예전에 천보각에서 무공 비급을 필사하던 녀석입니다. 그놈은 원래 살인멸구 대상이었으나 절벽에서 추락하는 바람에…….”
“아!”
왕자헌이 그제야 기억이 난 듯 탄성을 터뜨렸다. 그가 곽연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 녀석이 그사이에 그토록 강해졌단 말이냐? 내 기억에 놈은 무공에 재주가 없지 않았더냐?”
“그 연유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천보각의 무공서를 필사하던 중 남몰래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닐까요?”
“흐음. 그렇다면 그가 양진양이라고 확신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이냐?”
곽연은 자신의 생각을 막힘없이 이야기해 갔다. 천상련에서 지낼 때 자신을 대신해서 연서를 써주었던 것부터 시작해서 진양의 인상착의, 그리고 천상련의 내부 구조를 너무나 명확하게 잘 알고 있는 사실까지.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니 왕자헌도 곽연의 말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곽연을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흥! 결국 네놈의 실수로 살아남은 녀석이 또 말썽을 부리는 것이었군. 네놈은 처음부터 천상련의 무인으로서 자격이 없었어. 이번 일이 끝나면 내 네놈의 문제를 련주님께 보고해야겠다.”
곽연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당, 당주님!”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네놈과 관련이 있지 않느냐?”
왕자헌의 질책에 곽연은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낯빛이 어둡게 변하자 왕자헌이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두 연놈을 죽여야 한다. 이번 사건을 네가 잘 마무리만 짓는다면 지금까지의 일을 내 묻어주지.”
그제야 곽연의 얼굴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서렸다.
“감, 감사합니다!”
“혹여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느라 실수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다가 곽연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문득 왕자헌을 보고 입을 열었다.
“당주님, 이런 건 어떤지요?”
“뭘 말이냐?”
“우선 화산파와 종남파를 만나는 겁니다. 그리고 양진양과 유설이 우리 천보각의 무공서를 노리고 잠입했다가 지금 그곳에 갇혀 있다고 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장 칠절매화검을 넘겨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왕자헌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공교롭게 됐다. 화산파와 종남파가 우리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네놈이 다른 문파를 찾아갔는데, 하필 그런 일이 생겨서 무공서를 넘겨주지 못한다고 하면 믿겠느냐? 게다가 양진양과 유설이 어떻게 나올지 그 변수도 알 수 없다. 자칫하면 오히려 커다란 악수를 두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각각의 일을 따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그때 무인 한 명이 들어서며 보고했다.
“당주님, 화산파와 종남파에서 뵙고자 청합니다.”
“제길. 또 시작이군. 알았다. 곧 가보마.”
무인이 물러가자 왕자헌이 곽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마라.”
“예, 당주님.”
두 사람은 곧 창천당을 빠져나갔다.
왕자헌과 곽연이 객당 대청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탁자를 앞에 두고 두 노인이 근엄한 풍모로 앉아 있었다. 왼쪽은 화산파의 장문인인 매화신검(梅花神劍) 석군평(石君評)이었고,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종남파의 수석장로인 비뢰검(飛雷劍) 봉상탁(鳳尙卓)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화산파와 종남파의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왕자헌과 곽연은 그들 앞에 멈춰 서서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간밤에는 편히 주무셨는지요? 두 선배님께서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석군평이 다짜고짜 탁자를 쾅 내려쳤다.
“도대체 언제까지 미적거릴 작정인가? 칠절매화검을 내놓으라 하지 않았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련주님께서 따로 답변을 주실 겁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왕자헌이 더욱 깊이 읍을 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주십…….”
“흥! 나는 그렇게 느긋한 사람이 못 되네! 만약 내일까지 칠절매화검을 내놓지 않으면 우리도 더 이상은 가만있지 않을 걸세!”
왕자헌의 안색이 굳어졌다.
만약 칠절매화검이 천상련에 있었다면 이미 화산파에게 건네줬을 것이다. 화산파는 그동안 칠절매화검을 되찾기 위해서 천상련에 모든 방법을 동원해 왔다. 어쩔 때는 정파의 체면을 뒤로한 채 갖가지 예물을 보내오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사람을 보내 은근한 협박을 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적으로 평화적인 방법을 써왔다. 그러는 동안 화산파와 천상련은 제법 두터운 친분까지 쌓게 됐다.
하지만 화산파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칠절매화검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칠절매화검이 지금 천상련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천상련은 화산파의 칠절매화검을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천보각 지하실을 샅샅이 뒤졌다. 한데 칠절매화검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칠절매화검은 무공서가 낡지 않은 관계로 따로 필사해 둔 것도 없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칠절매화검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에 책임을 물어 천상련은 천보각주 풍천익을 천중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그런다고 사라진 칠절매화검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화산파는 더욱 간절하게 요구해 왔고, 천상련은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놓인 것이다.
만약 이제 와서 칠절매화검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화산파가 믿지도 않겠지만,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천상련에 묻지 않겠는가?
문제는 칠절매화검이 어디로 사라졌느냐다.
이에 대해 천상련은 양진양이 칠절매화검을 훔쳤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건 최악의 경우였다.
진양이 천상련을 탈출하던 날 벼랑에서 떨어져 급류에 휩쓸렸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천상련은 진양이 죽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무공이 나름 고강한 곽연이 거의 죽다 살아났으니 한낱 어린아이는 틀림없이 죽고 말았으리라. 그렇다면 칠절매화검은 이제 영영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진양이 살아 있다고 해도 칠절매화검은 물에 젖어 실전됐을 터였다.
조금만 일찍 진양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모든 책임을 진양에게 뒤집어씌우기에도 좋았으리라.
하지만 이제 와서 책임을 전가시키려고 해도 화산파에게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그들에겐 어떤 변명도 필요 없다. 오로지 칠절매화검이 중요할 뿐이다.
왕자헌이 내심 근심하며 대답했다.
“련주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명심하게. 내일까지네. 더 이상은 우리도 기다릴 수가 없네.”
“그럼.”
왕자헌과 곽연이 다시 두 손을 맞잡아 보인 뒤 몸을 돌렸다.
그때 무리 중 누군가가 불쑥 물었다.
“한데 어제 무슨 일이 있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