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74
신필천하(神筆天下) 74화
왕자헌이 뜨끔한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이시오?”
“조금 어수선한 듯해서 묻는 것이오.”
왕자헌은 그를 가만히 눈여겨보았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어제 진양이 찾아와서 일으킨 소동은 이곳에서도 한참 떨어진 위치였다. 물론 내공이 깊은 자들이라면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내공을 끌어올리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어제는 깊은 밤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석군평과 봉상탁이 가만히 있는데 그가 불쑥 나서서 묻는다는 점이었다. 얼핏 보면 상당히 무례해 보일 수도 있었다.
왕자헌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본 련에서 어젯밤 모의훈련이 잠시 있었을 뿐 특별한 일은 없었소이다.”
“그랬군. 잘 알았소.”
왕자헌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객당을 벗어났다.
만약 이 자리에 진양이나 흑표, 혹은 유설이 있었다면 방금 화산파의 무리 속에서 질문을 던졌던 그 중년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바로 종지령이었다.
그의 곁에는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노인도 함께 있었다.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진양의 목숨을 위협했던 금곤삼왕 갈지첨이었다.
하지만 왕자헌과 곽연은 이들과 마주친 적이 없었기에 별생각없이 돌아갔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복잡한 상태였다.
대청을 나온 왕자헌이 곽연에게 나직이 말을 전했다.
“혹시 모르니 비밀 통로 출구에 인원을 보강하도록 해라. 풍기대를 그쪽에 배치시키는 것이 좋겠군. 풍기대주에게 말을 전해라.”
“알겠습니다.”
“양진양과 유설이 나타나면 즉살이다.”
왕자헌이 서슬 퍼런 표정으로 읊조렸다.
* * *
진양은 수호필을 들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유설은 한옆에 앉아서 그런 진양의 모습을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진양 앞에는 한 권의 책자가 놓여 있었다.
바로 화산파가 그토록 찾고 있는 칠절매화검이었다. 천보각 지하에는 각종 천하 무공들이 보유되어 있지만, 칠절매화검은 확실히 검증된 무공이 아니던가.
진양은 우선 급한 상황인만큼 칠절매화검을 익히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진양이 눈을 떴다.
그는 수호필을 쥔 손에 힘을 주더니 스윽 획을 그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은잠사에는 먹물이 묻어 있지 않았으므로 글씨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하실에 쌓인 먼지가 닦이면서 필적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신산지화(辛酸之花).
이것은 일곱 가지 절초로 구성된 칠절매화검의 바로 첫 번째 절기였다. 진양은 다시 그 위에 같은 글씨를 행서체로 적었다. 이어서 초서체로 적고 나중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광초체로 적었다.
진양은 일필휘지로 붓을 움직여 갔는데, 그의 표정이 시종일관 진지했다.
‘신산지화란 매운 향기가 나는 꽃이란 뜻이다. 즉, 아름다움 속에 숨어 있는 매서움을 나타내는 것이 이 초식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화(花) 자의 경우에는 최대한 아름답게 필획을 흘려야 할 것이며, 신(辛) 자에서는 최대한 강렬하게 표현되어야 할 터이다. 이 절기의 요체는 바로 이 두 글자에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거의 무의식중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진양은 그저 본능에 몸을 맡긴 듯 움직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유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진양의 붓놀림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떤 필획에서는 힘이 넘치고, 또 어떤 구간에서는 마음이 녹아들 만큼 부드러움이 묻어 나오니, 그야말로 일획에 사람의 마음을 움켜잡았다가 또 일획에 사람의 마음을 놓아 버리는 듯하구나.’
유설은 경외감에 찬 눈빛으로 진양을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양이 대단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진양은 그다음 절기인 향류천리(香流千里)를 적었다. 이번 역시 해서체에서 행서로, 행서에서 초서로 변형해 갔다. 진양의 붓놀림은 막힘이 없었고, 그 부드러운 각각의 움직임이 숨막힐 듯 아름답게 보였다.
곧 지하실 안에는 어느새 진득한 꽃향기가 가득 차오른 것만 같았다.
유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심이 우러나와 눈물마저 고일 것만 같았다.
‘절세의 화공이 꽃을 그리면 벌과 나비가 날아든다더니, 그의 글에서는 꽃향기가 나는구나.’
이어서 진양은 또 그다음의 절초인 향만천지(香滿天地)를 적었다.
이번에는 지하실에 꽃향기가 질식할 만큼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진양의 얼굴이 붉은빛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칠절매화검법에 걸맞도록 내공을 운기하다 보니 혈색이 붉어진 것이었다.
아까의 꽃향기는 수호필에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와 멀리 퍼지는 형태였다면, 지금의 꽃향기는 그 농도가 짙어져 온 세상이 꽃향기로 가득 차오른 듯한 느낌이었다.
진양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을 느끼며 유설은 답답함을 느꼈다. 이제는 그 꽃향기가 멋있거나 아름답다기보다는 무섭기까지 했다. 이대로 질식해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진양의 붓놀림은 고요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다음 순간 진양의 붓놀림이 자못 거칠어졌다.
매영난세(梅影亂世).
바닥에 새겨지고 있는 글귀는 분명 매영난세였다. 이는 칠절매화검의 네 번째 절기로서, 매화의 그림자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내용이었다. 진양의 글씨는 점점 거칠고 흉폭해졌으며 쾌속하게 이어졌다.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움직임과 비교하자면 전혀 다른 글씨가 새겨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역시 난폭하며 어지럽게 퍼져 나가 지켜보던 유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 내가 아직 칠절매화검의 검초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벌써 알 것만 같구나. 세상에 이토록 어려운 절초가 또 있을까?’
분명 진양의 붓놀림과 기의 순환은 몹시 거칠고 불안정해 보였지만, 그 모든 것이 기묘하게 짜 맞춘 듯했고, 혼란 속에서도 질서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진양의 붓놀림이 또다시 변했다.
유설은 다시 그가 새기는 글씨가 무엇인지 가늠해 보았다. 이제 바닥의 먼지는 이미 다 닦이고 흩어져 오히려 광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진양의 필체가 워낙 또렷하기에 그녀는 곧 그가 해서체로 무엇을 쓰는 중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낙매여우(落梅如雨).
바로 칠절매화검의 다섯 번째 절초였다. 이는 이름 그대로 매화꽃이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떠 만든 초식이었다. 진양의 필획은 점점 더 거칠고 강하게 이어졌다.
이는 먼저 적었던 매영난세와 상당히 비슷해 보였지만 엄연히 다른 절초였다. 때문에 진양의 붓놀림과 기의 흐름 역시 비슷해 보이면서도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조금 전 진양의 붓놀림은 거칠고 무섭게 보였다면, 지금 진양의 붓놀림은 오히려 그 기세가 약해 보였다. 대신 지금의 초식에는 실속이 있고, 강맹한 기운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유설이 마음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그렇구나! 매영난세는 그림자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뜻이니, 즉 허초가 무수히 섞인 검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낙매여우는 매화꽃이 현란하게 떨어져 내리는 것이니, 허초보다는 실초에 무게를 실은 것이로구나. 아, 이 두 검초를 연환식으로 펼친다면 얼마나 무서운 검법이 나올까? 만약 이 두 초식만 반복적으로 펼쳐도 어지간한 고수는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말 거야. 화산파가 어째서 오늘날의 명문정파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 알 만하구나.’
유설은 지금 이 순간이 어쩐지 즐겁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단지 붓놀림 하나로 무공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치고 몸으로 느낄 수 있다니. 어디서 또 이런 멋진 광경을 볼 수 있겠는가?
그녀는 점점 진양의 글씨에 빠져들었다.
진양은 오로지 온 정신을 글씨에만 집중하며 다음 초식인 만화성막(萬花成幕)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이는 수많은 꽃이 가득 피어 장막을 이룬다는 뜻으로, 앞서 적은 매영난세와 낙매여우에 이어진 쾌검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 해석하자면, 철저한 방어의 형태를 지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검초의 핵심은 바로 만(萬) 자와 막(幕) 자였다. 진양의 붓놀림은 점점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눈으로 보기 힘들 만큼 순식간에 이어졌다.
분명 그리 요란한 움직임도 아니었건만, 어떻게 그 글이 쓰인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광초까지 적어낸 진양은 다시 마지막 절기를 해서체로 써나갔다.
이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글을 적어갔다.
암향부동화(暗香不凍花).
바로 칠절매화검에서 마지막 절기다.
은은한 향기의 얼지 않는 꽃이라는 뜻이다. 매화는 이른 봄에 추위를 뚫고 피어나 봄이 왔음을 알린다. 즉, 아무리 힘겨운 추위가 찾아와도 매화는 끝내 얼지 않고 피어난다.
진양이 이 초식을 적을 때, 유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차분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양이 필획을 그었을 때, 유설은 알 수 없는 기운이 자신을 향해 무섭게 날아드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뒤늦게 그녀는 암향부동화가 어떤 절초인지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고요하면서도 은밀한 움직임만을 치밀하게 준비하다가 한순간에 모든 침묵을 깨고 피어나는 검식인 것이다. 이는 검초를 펼칠 때마다 그 방식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은밀하고 고요하리라.
이윽고 진양이 수호필을 내려놓으며 긴 숨을 토해냈다.
그의 전신에서는 자색의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양은 눈을 지그시 감고 내공을 한차례 다스린 후 고개를 돌려보았다.
한데 유설이 한쪽 곁에 단정히 앉아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눈빛에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진양이 가만 보니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빙그레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제야 유설이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아, 양 소협의…… 무공은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
“하하. 제 무공이 아니라 화산파의 무공이지요.”
유설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제 말은 매화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양신공을 말하는 것이었어요. 자양진경 때문에 모든 무공을 서예로 익힐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요. 유 낭자도 한 번 자양진경을 익혀보시겠습니까?”
“아니에요. 전 오늘 양 소협의 글씨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그 진경 역시 보통의 재능으로는 익히기 힘들겠다는 것을요.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자양진경의 가치를 오해했겠죠. 양 소협은…… 정말 글씨를 잘 쓰시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유 낭자.”
유설이 얼굴을 붉히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싫어요. 그런 말……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이잖아요.”
그녀가 몸을 돌리며 내뱉는 말에는 은근한 애교가 서려 있었다. 진양은 낯빛이 달아올라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푸근하고 달콤했다. 동시에 이제는 자신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 유설이 안쓰럽고 딱하기도 했다.
원래 진양은 그녀를 아름답다고 여기긴 했으나 그 이상의 감정을 발전시켜 나가지는 않았다. 아니, 애써 억눌렀다는 표현이 맞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