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75
신필천하(神筆天下) 75화
그녀는 어디까지나 명문의 자녀였고, 자신은 반역가문의 후손이었다. 때문에 그녀에 대한 마음이 지극하면서도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랬기에 연서가 탄로 나면서 더욱 어색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한데 지금은 그녀 역시 반역가문의 딸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제 삶과 죽음을 함께 하게 된 처지에 놓이게 되니,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변한 것이다.
진양은 유설이 예전처럼 격식을 차려야 할 여인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지켜주고 보살펴 줘야 할 여인으로 보였다. 유설 역시 진양에게 점점 의지하게 되면서 그에 대한 마음이 깊어만 갔다.
진양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유설이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 소협, 저는 이제 양 소협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됐어요. 하지만 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이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양 소협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요.”
“낭자…….”
진양은 마음속에서 기쁨이 샘솟듯 솟구쳐 올랐다.
그가 일어나 유설에게 다가가자, 유설 역시 일어나서 진양을 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윽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가 있었다.
진양은 아무 말 없이 유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유설 역시 그의 너른 품에 안겨 얼굴을 묻었다. 진양은 가슴으로 유설의 체온을 느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낭자, 절대로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이 되지 않을 것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낭자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오.”
진양의 말투가 변했지만, 두 사람 모두 의식하지 못했다.
유설은 그저 진양의 너른 품과 그의 단호한 말투가 좋았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럴 것이에요.”
진양은 더욱 감격해서 유설의 가녀린 어깨를 힘주어 껴안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유설이 물었다.
“그런데 화산파에서 칠절매화검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 어쩌죠?”
“글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봅시다. 당장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어찌 그런 것을 따질 수가 있겠소?”
“의외로 융통성도 있으시군요?”
유설이 빙그레 웃었다.
진양도 큰 소리로 웃고 나서 말했다.
“유 낭자도 여기 있는 무공 중에서 하나 익혀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아까는 당신의 필체가 너무나 수려해서 그만 정신을 빼놓았지 뭐예요.”
유설이 이야기를 하며 책장 사이로 걸어갔다. 책장에는 온갖 진귀한 무공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것도 많았고, 한 번쯤 들어본 것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익힐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진양은 자양진경 덕분에 어떤 무공이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녀로서는 짧은 기간에 절공을 익힐 수 있을 만큼 재능이 뛰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내공 역시 진양에 비하면 훨씬 뒤처졌다.
이러한 사실을 진양도 알고 있었기에 말을 뱉어놓고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만 유설은 무슨 생각인지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무공서를 꼼꼼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문득 진양에게 물었다.
“지금 천상련을 찾아온 정파가 화산파와 또 어디라고 하셨죠?”
“종남파요.”
“흐음. 종남파의 무공서는 실전된 것이 없을까요?”
그제야 진양은 유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무공을 익히려는 것이 아니라 무공서 하나를 가지고 나가서 종남파를 회유할 생각인 것이다. 밖에 막상 나갔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경우든 대비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양이 알기로는 종남파에 실전된 비급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더욱이 천보각에서 지내는 동안 종남파의 무공서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들어본 적이 없소.”
“그렇군요.”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오?”
“글쎄요. 제가 단기간에 절공을 익힐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은 그대도 잘 알잖아요? 몸으로 안 되면 머리를 써봐야죠.”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제대로 먹힐 꼼수가 나왔으면 좋겠소.”
“너무해요. 꼼수라뇨. 비책이라고 해두죠.”
“하하! 좋소! 그럼 나는 낭자가 비책을 연구하는 동안 다른 무공서를 한 번 살펴봐야겠소.”
“그래요. 저도 이제 정신 팔지 않을 거예요.”
두 사람은 웃으며 책장을 살펴보았다.
누군가 이들을 본다면 절대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로 보지 않으리라.
천보각 지하실에 때아닌 웃음꽃이 피었다.
9. 탈출
사흘이 지났다.
하지만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천보각 지하실에서는 정확한 시간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대략 느낌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진양은 그동안 칠절매화검 외에 두 가지 무공을 더 익혔다. 하나는 검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공이었다. 무공 비급에 관한 지식은 유설이 진양보다 뛰어났다. 때문에 진양은 그녀가 추천하는 것 두 가지를 더 익힌 것이다.
사흘 만에 절세의 신공을 세 가지나 익혔으니 이 사실을 누가 믿기나 할까?
반면 유설은 단 하나의 무공도 익힐 수 없었다.
천보각 지하실에 소장되어 있는 무공서들은 전부 천하의 절세 신공이었기에 보통 사람이 진양처럼 하루아침에 익히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대신 그녀는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비급 중에서 한 권을 꺼내 들어 품에 넣었다.
이제는 지하실에서 나가야 할 때였다.
더 이상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는 지하실에서 버틸 수는 없었다.
진양이 말했다.
“천보각으로 나갈까 생각하오.”
“비밀통로로 가지 않고요?”
“내 생각에 비밀통로 출구에는 많은 사람이 매복해 있을 것 같소. 설마 우리가 천보각으로 나올 것이라곤 그들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요.”
“사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어요. 천보각으로 나가는 쪽이 변수도 많이 생길 것 같구요.”
원래 어떤 계획이든 변수가 많은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경우라면 다르다. 이럴 경우에는 변수가 생길 때, 불리한 상황이 유리하게 바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진양과 유설은 고개를 끄덕인 후,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진양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철문을 힘껏 열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천보각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천보각 밖에서 두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진양과 유설은 이미 한 번 각오한 뒤였기에 망설임없이 정문을 열고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지붕에서부터 그림자가 떨어져 내리며 진양과 유설을 공격해 왔다.
진양이 재빨리 유설을 등 뒤로 돌려세우고 수호필을 꺼내 들었다. 순간 수호필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떨어져 내린 두 그림자를 베어 버렸다.
쒜에엑! 깡!
“크읏!”
한 명은 가슴에 검상을 입고 뒤로 성큼 물러났고, 다른 한 명은 아슬아슬하게 진양의 수호필을 검으로 튕겨내며 물러났다.
극히 짧은 순간에 진양은 천보십육검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다.
천보십육검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수신호로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순간 여덟 명의 무인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진양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호필을 뽑아 들고 재빨리 휘둘렀다. 역시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기 힘들 만큼 빨랐다. 언제 붓통에서 수호필을 꺼내 들었는지도 모르게 한 줄기 섬광이 그어졌고, 이어서 다시 한번 섬광이 번쩍 터져 나왔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금속성이 시끄럽게 고막을 찔렀다.
까랑! 깡깡!
그 모습을 보던 우두머리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변했다.
“저건…… 벽력섬광도(霹靂閃光刀)가 아닌가!”
예전에 도황이라고 불렸던 철목진(哲木眞)이라는 고수가 있었다. 그는 도 한 자루로 한때 강호를 제패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벽력섬광도는 바로 그 철목진이 창안한 도법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철목진의 도날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도가 뽑아지는 것과 동시에 적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빨랐다는 뜻이다.
그가 죽은 후 벽력섬광도의 비급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오늘날 천상련이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진양이 펼치고 있는 도법이 바로 그 벽력섬광도였다.
물론 철목진이 펼치는 것만큼 완벽한 모습은 아니겠으나,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도법이었기에 진양의 수호필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진양이 천보각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것은 단 사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사이에 벽력섬광도를 익혔단 말인가?
어쨌거나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다면 분명 진양이 펼치는 것이 벽력섬광도가 확실했다.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조심해라! 놈이 펼치는 것은 벽력섬광도다!‘
그러자 진양을 향해 쇄도하던 무인들이 주춤거리며 자세가 흐트러졌다. 상대가 쾌도를 구사하는 만큼 대응 방식을 바꾼 것이다.
그 순간 진양은 지둔도법을 펼쳤다.
진양의 수호필이 번개처럼 쏘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무인들은 갑자기 느려진 움직임에 내심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진형이 흐트러지고 대응 체계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진양은 그 틈을 파고들어 수호필을 후려쳤다.
은잠사의 붓털이 날카롭게 곤두선 채로 무인들의 팔목을 베어 들어갔다.
“크읏!”
“아악!”
여덟 무인 중에 두 명이 팔목에 깊은 검상을 입으며 물러났다.
다른 여섯 무인은 진양의 도법이 느려지자 다시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벽력섬광도를 익혔으니, 그 도법이 제대로 펼쳐질 리가 없다. 오히려 벽력섬광도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바람에 우리가 당했구나!’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지켜보던 우두머리 역시 그처럼 생각했기에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진양은 지둔도법을 펼치며 그들의 공격을 막아갔다.
역시나 그의 움직임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아주 적은 움직임으로 적들의 공격을 우직하게 막아내고 있으니 화려해 보일 것도 없었고, 위협적인 느낌도 들지 않았다.
여섯 명의 무인은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었고, 팔이 베였던 두 무인은 뒤에 남아 보조했다.
그 순간 진양의 수호필이 번쩍 빛을 터뜨렸다.
지둔도법을 펼치던 그가 순간 벽력섬광도를 펼친 것이었다.
여섯 무인은 진양과의 거리가 몹시 가까웠기에 이번의 공격은 그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진양을 찔러 들어오던 검은 모두 여섯 자루.
그 여섯 자루의 검이 모두 바닥에 떨어지며 금속성을 울렸다.
챙그랑! 챙그랑!
“크으읏!”
여섯 명 무인 모두 오른쪽 어깨를 깊숙이 베이면서 더 이상 검을 들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진양의 도법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쾌도가 튀어나온다 싶으면 둔도가 이어지고, 둔도가 지속된다 싶으면 느닷없이 쾌도가 날아왔다.
“노옴!”
우두머리를 비롯한 남은 무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진양은 그 순간 수호필을 곧게 내찌르며 마주쳐 갔다. 한데 그의 필봉이 물결처럼 흐느적거리는 듯하더니, 곧 수 갈래로 나뉘면서 달려드는 무인들 각각을 찔러가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무슨 도법이지? 아니, 찌르는 형태로 보아서는 도법이 아니라 검법 같은데?’
위기의식을 느낀 무인들이 급하게 물러서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진양의 필봉은 그들이 후려친 검날을 가볍게 타넘듯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무인들의 옆구리와 복부에 깊이 박히고 말았다.
“커억!”
“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천보십육검의 우두머리는 그제야 진양의 검식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이건…… 분명히 능파검(凌波劍)이 아닌가! 어떻게…… 어떻게 이놈이 능파검까지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