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76
신필천하(神筆天下) 76화
능파검은 이십여 년 전에 죽은 악군청(岳君靑)이라는 무인이 창안한 검법이었는데, 창안 할 당시에는 굉장히 획기적이고 실험적이어서 잠시 사공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능파검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됐고, 그 방식이 새롭고 모험적이긴 하지만 사악하다고는 볼 수 없어 나중에는 정공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능파검 역시 어느 날 비급이 사라졌는데, 이를 천상련이 찾아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퀭한 눈길로 진양을 쏘아보았다.
“넌…… 도대체…….”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천보십육검이 이처럼 허무하게 무릎을 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두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첫째는 진양이 일필득도(一筆得道)의 능력을 가진 기재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고, 둘째는 천보각의 침입자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탈출자를 막으려다 보니 천보십육검의 장기인 검진을 제대로 펼쳐 보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허무하게 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헐떡이는 무인들을 둘러보며 진양이 포권을 취했다.
“후배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진양은 천보십육검의 무인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다만 과거 천상련에서 지낼 때 아주 가끔씩 어두운 밤에 그들이 모의 훈련하는 것을 창밖으로 내다보았을 뿐이다.
비록 그 정도의 인연일지라도 그로서는 오랜 친구를 다치게 한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천상련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지만, 천보십육검은 그 일과 무관하지 않던가.
그가 사과하고 나자, 유설이 나서서 열여섯 무인의 혈도를 재빨리 점했다. 이미 검상을 깊게 입고 내기마저 상한 그들로서는 그녀의 점혈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유설이 진양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어때요, 실전에서 써보신 소감이?”
“과연 훌륭한 무공이오. 놀랍고 무섭군요.”
“아무리 무서운 무공이라도 사용하는 자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겠죠.”
“과연 맞는 말이오.”
하지만 진양은 조금 신경이 쓰이는 듯 물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소?”
“뭐가요?”
“아무리 우리가 이곳으로 나타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더라도 너무 방비가 허술하군.”
그제야 유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마음을 졸이며 싸움을 지켜보느라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진양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런 듯했다.
더구나 천보십육검이 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동안 천상련에서는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유설이 그들의 혈도를 모두 점하는 동안에도 천보각에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원래의 예상대로라면 두 사람이 나오자마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포위되어야 했다. 그리고 진양과 유설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그랬을 때 천보각에서 벗어날 확률이 오 할이 될까 말까였다.
한데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천보각을 벗어날 수 있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사흘씩이나 지하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진양과 유설은 조심스레 천보각을 나왔다. 두 사람은 천보각 담장을 지나서 건물들 사이를 걸어가면서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예사롭지가 않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모르겠소.”
“그렇다면 우리에겐 이보다 좋은 일도 없잖아요?”
유설이 생글 웃으며 말했다.
진양이 빙그레 웃었다.
“이대로 여길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나쁠 건 없겠지요.”
그는 유설의 손을 잡고 훌쩍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건물 지붕 위에 안착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역시나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지붕 위에서 매복하고 있던 무인은 없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이상한 노릇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때였다.
천상련 남쪽에서 ‘쩌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축이 잔잔하게 흔들려 왔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진양과 유설을 훅 덮쳐 왔다.
바로 화산파와 종남파가 머물던 객당이 있는 곳이었다.
유설이 짚이는 것이 있는 듯 말했다.
“혹시 화산파와 종남파가 천상련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
이쯤 되자 대략의 사정이 이해됐다.
만약 화산파와 종남파가 천상련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면 그건 작은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천상련이 제아무리 무림 사파의 절대 지존이라지만, 두 정파가 힘을 합친다면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리라.
유설이 물었다.
“어쩔까요?”
진양이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우리도 가봅시다.”
만약 다른 때라면 그저 천상련을 벗어나는 데 급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천상련에서 그들을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유일하게 천보각을 지키던 자들이 천보십육검이었다. 그들조차도 마치 뭔가에 정신이 빼앗긴 듯 진양을 상대할 때 공격이 날카롭지가 못했다.
진양은 이제 그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불난 집에서 달아나는 도둑이 된 격이군.’
두 사람은 지붕을 타고 남쪽 객당까지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윽고 그들은 객당의 지붕 위로 옮겨간 다음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이동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객당 안마당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살펴보았다.
객당 안마당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 화산파와 종남파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듯했고, 천상련의 무인들도 대부분이 이곳에 집합한 듯했다.
그들의 분위기는 몹시 흉흉하고 살벌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세 사람을 포위하는 형국이었다. 특히 포위당한 세 사람 중 한 명은 상당히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어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진양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하마터면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간신히 서 있는 사람은 바로 풍천익이었던 것이다. 그의 전신은 상처투성이였고, 옷차림은 몹시 남루했다. 게다가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히 약했다.
한 때 그는 진양에게 있어서 커다란 산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양의 마음 한편이 짠하게 저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풍 각주님이 곤경에 처하신 걸까? 저 상처는 어떻게 된 걸까?’
더욱 이상한 점은 천상련의 무인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화산파와 종남파와 함께 풍천익을 포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유설은 진양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는 것을 보고 나직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아는 분인가요?”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저분이 나를 천상련에서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분이오.”
“그럼 저 노인이 바로 풍천익 각주님이시군요?”
“맞소.”
그러자 유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왜 모두 저분을 위협하고 있는 거죠? 지금은 마치 천상련조차도 저분을 몰아세우고 있는 형세군요.”
“나도 모르겠소. 도대체 이 사흘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군.”
유설이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진양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분은 위험을 무릅쓰고 내가 살아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소. 풍 각주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오. 그러니 위험에 처한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소.”
“그럴 줄 알았어요.”
유설이 웃으며 말했다.
겨우 위기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또 위험 속으로 걸어가려고 한다.
그럼에도 유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와 함께 있다면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진양이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낭자는 먼저 여길 벗어나는 것이 좋겠소. 아랫마을에 가면 흑 형님과 위 선배가 기다리고 있을 거요.”
“저 혼자 가진 않겠어요.”
진양은 그녀의 마음에 다시 한번 감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안마당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흥!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통할 듯싶소?”
진양과 유설이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그는 키가 작고 왜소한 체구를 지닌 노인이었다. 그의 등에는 자신의 키만 한 검이 걸려 있었다.
사실 그 검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었지만, 노인의 키와 몸집이 워낙 작아서 검이 상대적으로 커 보였다.
바로 종남파의 수석장로인 봉상탁이었다.
풍천익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노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풍 각주는 거짓을 말할 자가 아니오!”
진양은 그의 얼굴을 보고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곧 그가 각종 병기를 보관하거나 개발하는 철기각의 각주 동소립(董昭立)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서 있는 노인은 바로 승천각의 각주인 송강(宋江)이었다.
동소립은 체격이 뚱뚱해서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을 풍겼고, 송강은 짙은 눈썹에 흑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 근엄한 인상이 특징이었다.
진양은 풍천익을 따라 가끔씩 천상련을 돌아다니다가 이 두 사람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데 이들 역시 몹시 기가 쇠한 것을 보아 이미 한바탕 큰 싸움을 치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파의 무인들도 상당수가 숨을 헐떡이며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게다가 안마당에 심어져 있었을 나무는 그 밑동이 싹둑 잘려 나가서 넘어가 있었고, 한쪽 벽면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있었다.
유설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저기 방금 소리친 작은 체구의 사람이 종남파의 수석장로인 봉상탁인 것 같아요.”
“그럼 저쪽은 누구요?”
진양이 눈짓으로 가리킨 사람은 바로 청포를 입은 노인이었는데, 봉상탁과 반대로 풍채가 좋고 늠름한 인상을 풍겼다.
몹시 인자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왼쪽 뺨에 십자로 새겨진 흉터 때문에 언뜻 날카로운 인상도 풍겼다.
유설이 곧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
“뺨에 새겨진 흉터를 보니 아마도 화산파의 장문인 같군요. 이름은 석군평, 매화신검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죠.”
“과연 두 사람의 무공이 매우 높아 보이는군요.”
그때 다시 석군평이 말했다.
“풍 각주, 더 이상 우리를 곤란하게 만든다면 우리 역시 더는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풍천익이 입을 열었다.
“흥! 누가 네놈들에게 사정 봐달라고 하더냐?”
“정말 구제불능이군!”
석군평이 미간을 좁히더니 검을 앞세우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 도열한 화산파의 제자들이 일제히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기를 끌어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그때 풍천익이 왕자헌을 비롯한 천상련의 무인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런 멍청한 놈들! 네놈들이 기어코 본련을 망하게 하는구나!”
그러자 왕자헌이 버럭 고함쳤다.
“닥치시오! 풍 각주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 없소이다! 우리로서도 풍 각주의 말을 믿을 근거가 없지 않소?”
“흥! 언젠가 네놈의 멍청함을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봉상탁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그대는 우리가 보이지도 않는가!”
이렇게 되자 진양도 더 이상 숨어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순간 그가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쒜에엑!
쩌엉!
진양의 수호필이 봉상탁의 검을 튕겨냈다. 그 순간 금속성이 쩌렁쩌렁 울리며 모든 이의 고막을 날카롭게 찔렀다.
봉상탁은 손이 떨려오는 충격을 느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지우지도 못한 채 고함쳤다.
“웬 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