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78
신필천하(神筆天下) 78화
엄대웅은 순간 몸을 뒤로 눕혔다.
사실 회피 동작이라고 보기에는 몹시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그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듯이 바닥에 넘어진 것이다. 이어서 진양이 붓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엄대웅은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진양의 필봉이 엄대웅의 눈앞에서 멈췄다.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숨조차 내쉬지 않았다.
진양은 수호필을 거둔 다음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가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후배의 사정을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제야 엄대웅도 주춤주춤 일어나 답례했다.
“양 형의 무공에 감탄하는 바이오. 내가 졌소.”
엄대웅은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누가 봐도 분명한 승패였기에 종남파는 기가 한껏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화산파의 무인 가운데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제가 상대해 보겠습니다.”
모두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화산옥봉이라고 불리는 여미령이었다.
진양은 그녀를 바로 알아볼 수가 있었다.
비록 아주 어릴 적에 우연히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천상련에서 갇혀 지내는 바람에 사람과의 인연 자체가 많지 않은 그였다.
때문에 진양은 화산파의 여미령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미령은 여전히 아름다웠는데, 수년 전과 비한다면 좀 더 성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화산파의 장문인 석군평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네가 함부로 나설 자리가 아니다. 종남파에서 다시 체면을 세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석군평은 봉상탁보다도 상황 파악이 빠르고 신중한 자였다.
그는 벌써부터 진양의 내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때문에 여미령이 나서게 되면 그녀 역시 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대의 전력을 완전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부러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종남파에서는 이미 치욕을 맛보았기 때문에 성질 급한 봉상탁은 손이 근질근질할 터였다. 그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배려한다고 말한다면 단순한 봉상탁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봉상탁이 두 손을 맞잡아 흔들며 말했다.
“기회를 넘겨주셔서 고맙소, 석 장문!”
“별말씀을요. 좀 전에는 엄대웅이 실수를 해서 패했으나, 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종남파의 무서움을 저 어린 자에게 확실히 가르쳐 주십시오.”
“물론이지!”
봉상탁은 팔을 걷어붙이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가 진양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본래 나는 풍 각주와 할 얘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한데 네놈이 감히 건방지게도 길을 막아섰으니 앞으로 네게 일어날 책임을 내게 묻지는 말거라!”
사실 봉상탁은 무림에서 명망있는 고수였다. 그런 그가 이제 약관도 지나지 않았을 듯한 청년과 대결을 한다는 것은 무림에서도 썩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미리 언질을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킨 것이다.
진양이 포권하며 말했다.
“후배가 먼저 가르침을 청한 것이니 마땅히 그럴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흥! 좋다! 그 배짱 하나는 인정해주지!”
봉상탁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내력을 끌어올리자 검신이 우웅 소리를 내며 떨었다. 주변 사람들조차 후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니 그의 내공이 심후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봉상탁이 검을 대각선으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와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진양은 거침없이 수호필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봉상탁의 발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 보법의 변화가 몹시 신묘해서 마치 귀신의 몸놀림을 보는 듯했다. 어떤 때는 상체와 하체가 반대 방향으로 뒤틀린 듯했고, 어느 순간에는 관절이 비정상적으로 꺾여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봉상탁의 보법이 특이하면서도 능숙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진양은 추호의 방심도 없이 온 정신을 집중시켜 쾌도를 구사했다. 수호필의 붓털은 넓고 빳빳하게 곤두서서 도기마저 내뿜고 있었다.
봉상탁은 진양이 펼치는 무공이 도법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도법 중에서도 어떤 무공인지, 어느 종파의 무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진양이 구사하고 있는 도법은 바로 벽력섬광도였다.
천보십육검의 우두머리가 단번에 이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벽력섬광도가 천보각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봉상탁으로서는 그저 진양의 도법이 생소하고 놀랍기만 했다.
“흥! 제법 재빠르기는 하다만, 도법으로 검법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봉상탁이 비웃음을 던지며 순간 검을 내찔러 왔다. 그의 검봉이 수호필의 붓대를 정확히 내찔렀다.
깡!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며 진양의 수호필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봉상탁이 전해 받은 반탄된 기운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진양의 내공이 이처럼 심후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이다.
그러나 그는 노련한 무인답게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더욱 내공을 끌어올려 천성패검(天星覇劍)을 펼쳐 나갔다. 천성패검은 종남파의 천성검을 더욱 심도있게 익힌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하늘의 별자리를 바탕으로 한 검법이었다.
천성패검의 특징은 무엇보다 검로 하나하나가 치밀하고 그 변화가 신묘하다는 것이다. 또한 힘과 빠르기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에 빈틈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검법이었다.
진양은 봉상탁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뒤미처 봉상탁이 쏜살같이 이검을 내찔러 왔다. 그리고 다시 삼검이 이어졌다. 하늘로 솟아올랐던 검봉이 느닷없이 떨어져 내릴 때마다 진양은 급히 물러서며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종남파의 고수구나. 검로 하나하나가 치밀하기 짝이 없다. 빈틈을 노리기에는 너무도 촘촘하다.’
진양은 좀처럼 반격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봉상탁이 코웃음을 쳤다.
“흥! 이제 네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쳤다는 것을 알겠느냐? 그딴 이름도 모를 도법이 우리 종남파의 천성패검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봉상탁은 검에 대한 신뢰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비슷한 시간을 수련했을 때, 도를 쓰는 무인은 절대로 검을 쓰는 무인을 이길 수 없다고 단언하곤 했다.
하물며 이런 새파란 젊은이라면 오죽하랴.
만약 진양이 벽력섬광도를 익힌 지 오래되었고 도법 하나만을 갈고닦았다면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양은 이제 벽력섬광도를 익힌 지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수련한 봉상탁의 천성패검을 좀처럼 꺾기 힘들었다.
반면 봉상탁 역시 큰소리치고는 있었지만 진양의 도법에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도법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군. 만약 이 녀석이 좀 더 나이가 들고 나면 이 도법으로 충분히 내게 맞설 수 있겠어.’
진양은 천성패검에 맞서 아주 가끔씩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늘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연환식을 펼치려고만 하면, 어김없이 봉상탁의 검이 빈틈을 헤집으며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봉상탁은 자신의 천성패검에 맞서 이처럼 반격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봉상탁의 검공은 더욱 정교하고 세밀해져 갔다. 그의 검공만큼은 다급한 그의 성질과 무관한 듯했다.
진양은 연신 수호필로 방어를 펼치며 물러서기만을 반복했고, 점점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이대로 가면 봉 장로의 예봉을 피하기가 어렵겠다. 능파검을 시전해 보자.’
생각을 바꾼 진양은 돌연 몸을 수 장 밖으로 물린 다음 수호필을 고쳐 잡았다.
진양을 쫓아 몸을 날려오던 봉상탁이 눈살을 구겼다.
‘검세로 바뀌었군.’
그의 예상대로 진양은 수호필을 곧장 찔러오며 검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빛이 번쩍이듯 빠른 쾌검을 구사했다면, 이제 막 펼치기 시작한 검법은 유연한 움직임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봉상탁의 천성패검은 그런 유연함마저도 철저하게 봉쇄해 나갔다. 그의 검로는 마치 거미줄을 친 것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어떤 방위로 뻗어오는 검도 모두 흘려내거나 능히 막아내고 있었다.
진양은 수호필을 휘두르는 내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쉽구나, 아쉬워. 내게 벽력섬광도와 능파검을 익힐 시간이 조금만 더 충분했어도 이 싸움이 이처럼 힘들진 않았을 것인데, 시간이 너무 없었다.’
어떤 무공이든 그 진의를 깨우치게 되면 대성하기가 쉽다. 그런 면에서 진양은 가장 어려운 부분을 수월하게 해냈다. 하지만 완전히 몸에 익히기에는 역시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지켜보던 종남파의 무인들이 일제히 박수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봉상탁은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려는 듯 철저하고 세심하게 검로를 안배해 나갔다. 그러다가 진양이 완전한 위기에 몰리게 되자 그가 기합성을 터뜨렸다.
“하앗!”
뻗어나간 검이 그대로 진양의 가슴을 향했다.
물론 봉상탁의 검에 살기가 서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요혈을 찔러 진양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진양은 다급하게 물러나며 수호필을 휘둘렀다. 하지만 봉상탁은 어느새 검을 거둔 후 이검을 찔러들어 왔다. 이제는 정말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미 진양은 몸이 오른쪽으로 절반이나 뒤틀린 상태였고, 봉상탁의 검은 허리께의 의사혈(意舍穴)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찰나, 진양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칠절매화검의 마지막 절초인 암향부동화였다.
진양은 얼른 보법을 밟아 봉상탁의 왼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순간 사람들이 비명을 터뜨렸다.
“앗!”
이는 진양이 찔러오는 검을 향해 스스로 몸을 던지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봉상탁이었다.
만약 자신이 진양을 죽여 버린다면 세간에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 것이 빤했다. 게다가 진양의 사문이 어찌 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죽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잇!”
봉상탁이 억지로 검을 비틀자, 쏘아져 나가던 검날이 진양의 어깻죽지를 찢으며 뻗었다.
순간 핏물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고 요혈을 찔린 것도 아니니 진양으로서는 천만다행으로 위기를 넘긴 것이었다.
봉상탁이 버럭 소리쳤다.
“네놈이 죽기를 원하는 것인가?”
“봉 장로님이 사정을 봐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흥! 이제는 그런 꼼수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의 계략에 이용당한 것이 화가 난 봉상탁은 정말 인정사정없이 검을 퍼붓기 시작했다.
진양은 다시 수호필을 휘두르며 그의 검을 막아갔다.
봉상탁은 그의 검세가 변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진양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무공을 바꿔가며 사용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지켜보던 화산파의 장문 석군평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저건?”
“왜 그러세요, 사부님?”
여미령이 물었다.
석군평은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설마…… 그럴 리가 있는가? 아닐 것이야.”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진양을 다시 한번 궁지로 몰아넣은 봉상탁이 이번에도 기합을 터뜨리며 검을 찔렀다.
찰나, 진양이 허리를 굽히며 수호필을 휘둘렀다. 갑자기 진양의 전신에서 뜨거운 기운이 사방으로 훅 퍼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예기에 봉상탁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진양의 붓이 느닷없이 봉상탁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