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8
신필천하(神筆天下) 8화
양진양의 하루 일과는 판에 박힌 듯했다.
매일 같이 필사를 하고, 시간이 남게 되면 잡다한 서적들을 읽곤 했다.
매일 문방사우를 챙겨주는 공소부를 만나게 되면 오랜 시간 담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 때문에 공소부는 늘 부각주인 곽연에게 혼쭐이 나야 했고, 그때마다 진양은 공소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천보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인만큼 진양은 공소부와 수다를 떠는 것이 하루 중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진양은 공소부에게 련 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혹시라도 세속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귀를 기울여 경청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자연스레 둘도 없이 친한 사이가 됐다.
공소부 역시 천성이 착하고 연민의 정이 많은 성격이라 늘 진양의 처지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날도 진양은 밤늦게까지 공소부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후원을 밝히던 등도 꺼져 버린 야심한 시각이 되고 말았다.
진양이 얼른 일어나며 말했다.
“공소부 형님,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이러다가 부각주님이 오셔서 또 나무라실까 봐 걱정이에요. 어서 돌아가셔야겠어요.”
“걱정 마. 오늘은 부각주님이 안 계시는 날이야.”
공소부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진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요? 왜 부각주님이 안 계시는 거예요?”
“거야 나도 모르지. 위에서 하는 일을 우리 같은 시종이 어찌 다 알 수 있겠어?”
“하지만 너무 오래 여기 계시면 혼나지 않을까요?”
그 말에 공소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하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진양은 공소부를 배웅하느라 방문을 나와 계단까지 내려왔다. 밤이 깊은 시각이었기에 천보각은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공소부는 일층 입구 옆에 놓인 작은 수레를 챙겼다. 바퀴가 둘만 달린 이 수레에는 각종 청소 용구와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그때 진양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저…… 형님.”
막 수레를 끌며 문을 열고 나가려던 공소부가 멈칫 돌아보았다.
“응?”
한데 어쩐 일인지 진양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아닌가.
공소부는 내심 이상하게 여기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태까지 진양과 허물없이 지내면서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공소부가 수레를 내려놓고 진양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할 말이 있는 거야?”
“아, 아니에요, 형님. 살펴 가세요.”
공소부가 원래 총명한 아이는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정이 깊었다. 때문에 그는 진양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할 말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공소부가 성글성글 웃으며 다시 물었다.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겠어? 말해봐. 뭔데 그래?”
그럼에도 진양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모기만 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응.”
“사실…… 저…… 밖에 나가보고 싶어요.”
매우 작은 목소리였지만, 일단 말을 뱉고 보니 의지가 생겨 단호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공소부가 화들짝 놀라서 진양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차마 입 밖으로 내기조차 어려운 말이라 공소부도 희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밖에?”
진양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소부는 진양의 표정에서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양이 이곳에 온 지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천보각의 안뜰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공소부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소곤소곤 말했다.
“천상련에서 규율을 어기면 큰일 나. 예전에 어떤 시동도 규율을 어기고 달아나다가 잡혀서 매질을 당했대. 그런데 너무 심하게 맞아서 결국 죽어 버렸대.”
그 이야기는 진양도 알고 있었다.
바로 공소부가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 중 하나였으니까.
물론 그 소문의 진위 여부는 진양도 공소부도 몰랐다. 시동들 사이에서 누군가 지어낸 말일 수도 있고,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진양은 그런 말을 듣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그냥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 욕망이라는 것이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이미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고 나니 진양은 좀처럼 물러서기가 싫었다.
“형님, 오늘은 곽 부각주님이 안 계시니 어쩌면 나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전 천상련을 떠나려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천보각을 둘러싼 저 담만 넘어가도 기쁠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부각주님은 안 계시지만 밖엔 천보각을 지키는 무인들이 많아. 건물 입구에도 있고 정원 입구에도 있고…….”
진양이 손가락을 불쑥 들어 수레를 가리켰다.
“제가 저기서 천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귀신이라도 모를 거예요. 그리고 천상련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천보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돼요. 부각주님이 아니면 형님이 천보각을 언제 드나들든지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면서요.”
“나 같은 녀석을 누가 상관하겠어. 부각주님이야 천보각의 모든 일을 관장하시니까 내가 드나드는 시간을 잘 아시는 거지만.”
공소부의 말을 듣던 진양은 점점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갑자기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곧 시무룩한 표정으로 변했다.
“에이, 역시 관두는 게 좋겠어요. 만약 들키면 저뿐만 아니라 형님도 크게 혼날 거예요.”
공소부는 그런 진양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몹시 마음이 아팠다.
만약 자신이 진양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목숨을 걸고라도 천보각을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특히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공소부로서는 진양의 하루하루가 정말 지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망설이던 공소부가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좋아, 내가 도와줄게. 한번 나가보자.”
“네? 하지만 혹시 들키면…….”
“설마 죽기야 하겠어? 겨우 바깥 구경을 해보고 싶을 뿐인데…….”
공소부는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던가.
공소부의 순진한 생각에는 정말 크게 혼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지 담장 너머 구경을 다녀올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공소부가 진양을 재촉했다.
“뭘 망설여? 어서 여기 들어와. 내가 수레를 끌고 갈 테니까.”
그 말이 진양의 욕구에도 불을 지폈다.
진양은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혀서 대답했다.
“고마워요, 형님.”
“아니야.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서 다행이야. 헤헤.”
공소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공소부는 수레를 이끌고 천보각을 나섰다.
천보각 문을 지키는 병사 둘이 그를 힐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공소부는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끄는 수레에는 진양이 바짝 웅크린 채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공소부는 그대로 안뜰을 지나서 커다란 정문까지 다다랐다.
정문에는 파수(把守)를 서는 무인이 총 네 명이었다. 이제 여기만 지나가면 진양은 잠시나마 천보각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공소부는 묵묵히 수레를 끌고 정문을 지나쳤다.
옛말에 도둑이 제 발 저리다더니, 공소부는 무인들 곁을 지나치면서 다리가 후들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수레를 놓치고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다행히 무인들은 공소부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침입자를 경계하는 무인들이었다. 이미 천보각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공소부를 일부러 눈여겨보는 무인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소부가 막 정문을 벗어나서 걸어가려고 할 때, 마침 수레바퀴가 자갈돌을 밟으면서 심하게 덜컹거렸다. 그 순간 진양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바람에 공소부는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공소부는 얼음처럼 굳어서 심호흡을 했다.
물론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갈 길을 가는 것이겠지만, 공소부는 그만큼 노련하지 못했다.
잠시 등 뒤에 선 무인들의 기색을 살피던 공소부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때,
“잠깐!”
무인 하나가 공소부를 불러 세웠다.
그 순간 공소부와 천을 덮어쓰고 있던 진양의 뇌리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움직이는 걸 본 걸까? 봤다면 어쩌지? 도망갈까? 아니, 도망가도 금방 잡힐 거야. 어쩌면 좋지? 역시 너무 무리한 걸까? 아아…….’
공소부가 잔뜩 주눅이 들어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두 손으로 수레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돌아서진 못한 것이다.
“부르셨는지요?”
“그래. 너 어디로 가는 길이냐?”
“숙, 숙소로 가는 길입니다.”
“그럼 가는 길에 저기 길모퉁이에 걸린 등에 불 좀 밝히거라. 시종 녀석이 저기 걸린 등을 깜빡한 모양이군.”
무인이 손가락으로 길 모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공소부가 시선을 돌려 보니 과연 여느 때와 달리 모퉁이가 깜깜했다.
그제야 공소부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요.”
공소부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수레를 끌고 갔다.
무사가 가리킨 길모퉁이에 다다라서야 공소부는 수레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수레 안에 숨죽이고 있는 진양에게 속삭였다.
“아직 나오면 안 돼. 여기 불을 붙이고 모퉁이를 돌면 그때 나와. 얼굴에 진흙을 묻히면 혹시 다른 사람이랑 마주쳐도 널 못 알아볼 거야”
“네, 형님.”
나직하게 대답하는 진양의 목소리에서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
공소부는 품에서 화접자(火摺子:불 켜는 도구)를 꺼내 등에 불을 밝혔다.
이내 길 모퉁이가 환하게 빛났다.
공소부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천보각 무인들의 반응을 한 번 살피고는 수레를 끌어모퉁이를 돌아갔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니 다행히 어디에서도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이제 나와도 돼.”
공소부의 속삭임에 진양이 얼른 천을 걷어치우고 수레에서 내렸다.
진양은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불과 천보각에서 일 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밤하늘을 메운 공기조차 다르게 느껴졌다. 발바닥에 와 닿는 지면의 감촉조차도 낯설었다.
진양은 얼른 바닥의 흙을 집어 들어서 청소 용구에 담긴 물에 섞었다. 그리고 얼굴에 진흙을 덕지덕지 바르기 시작했다.
“어디 한번 보자.”
공소부의 말에 진양이 돌아섰다.
어두컴컴한 밤인 데다 얼굴에 진흙을 잔뜩 발라놓으니 정말 감쪽같이 알아보기 힘들었다.
아직 어린 두 사람은 우선 큰일을 해냈다는 기분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 수레를 끌고 숙소로 가려고 할 때였다.
절그렁절그렁!
묵직한 쇠사슬이 이끌리는 소리가 반대편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다행히 소리는 가까워지다가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향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진양과 공소부는 모퉁이까지 달려가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한데 무인 여섯 명이 두 줄로 서서 한 명의 남자를 이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송되는 자는 다부진 체격에 회색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뻣뻣하게 뻗친 남자였다. 그는 온몸에 어른 엄지만 한 굵기의 쇠사슬을 친친 두르고 있었고, 양발에는 커다란 철추를 매단 채 걷고 있었다. 게다가 드러난 피부는 뭔가에 베이고 맞은 듯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가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쇠사슬이 마찰을 일으키고, 철추가 바닥을 끌었다.
진양은 회색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뿜어대는 사이한 기운에 몸서리를 쳤다.
‘저 사람은 뭘 잘못했기에 저렇게 끌려가는 걸까? 저렇게 큰 철추를 두 개나 매달고 걸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왠지 저 여섯 명의 무인보다 훨씬 강할 것 같아.’
진양은 한참이나 그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남자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그러더니 굵직하고 탁한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