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81
신필천하(神筆天下) 81화
“감사합니다.”
진양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왔다.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해서체로 글씨를 적었고, 이어서 행서와 초서를 거쳐 광초체까지 적었다.
역시나 수려한 필체였는데, 지켜보는 사람들 저마다 내심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만 보아도 사람들은 진양이 틀림없이 초식을 훌륭하게 펼쳐 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은 생각이었다.
‘초식의 참된 진의를 깨우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토록 수려한 글씨로 적을 수 있겠는가? 단지 수려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을 못할 지경이구나.’
글씨를 여러 번 반복해서 적은 진양은 곧 수호필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석군평이 취한 자세와 똑같았다.
찰나, 진양이 빠르게 보법을 밟아가더니 수호필을 매섭게 휘둘렀다. 느린 듯 나아간 수호필은 어느 순간 빠르게 적의 의표를 찌르는 듯했고, 베어가는 듯 보였던 동작이 찌르는 동작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필봉이 찔러가는 위치조차 짐작하는 곳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단 한 번의 시범이 끝나자 사람들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주변 사람 모두가 갈채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진양은 수호필을 거둔 후 석군평에게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후배가 감히 흉내를 내려고 했으나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석군평은 이번에도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이 짧은 시간에 그만큼 익힌 것만도 놀라운 일일세. 내가 자네를 의심했던 것 같군.”
“의심을 거둬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진양의 대답에 석군평은 봉상탁을 돌아보았다.
분명 화산파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칠절매화검을 익혔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익힌 것도 아니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익힌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온갖 무공서가 보유된 천보각에서 칠절매화검을 익혀 탈출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화산파의 무공이 강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 아닌가?
이렇게 되니 석군평으로서는 진양을 어찌 대해야 할지 애매한 마음이었다.
석군평이 진양을 다시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앞서 봉 장로님과 겨룰 때 사용한 무공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 그 도식과 검식 역시 매우 고명해 보이던데.”
“그것 역시 이번에 천보각에 갇혀 있었을 때 익힌 것입니다. 하나는 벽력섬광도이고 다른 하나는 능파검이었습니다.”
“벽력섬광도와 능파검!”
석군평과 봉상탁이 동시에 외쳤다.
봉상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고 했지. 거참, 부러운 재능일세. 부러운 재능이야.”
석군평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나 자네는 화산파의 제자가 아닌데 칠절매화검을 익혔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화산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해서 말인데…… 어떤가? 이 기회에 화산파의 제자가 되지는 않겠는가?”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석군평은 진양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인격과 재능에 깊이 탄복하고 있었다. 한데 칠절매화검도 익혔으니 이 기회에 화산파의 제자가 됐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진양이 고개를 저었다.
“저를 거두어주시려는 마음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 처지가 복잡하여 확답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석 장문께서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봉상탁이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그럼 종남파의 제자가 되는 것은 어떤가?”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역시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대답을 드리기가 곤란하군요.”
“흐음, 그런가?”
봉상탁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석군평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양 소협이 살기 위해서 칠절매화검을 익혔다고 하는데다 그 칠절매화검의 비급을 우리 화산파에게 돌려주었으니 우리 역시 그대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 다만 한 가지 약속을 해줘야겠네.”
진양이 그 뜻을 알아채고 얼른 말했다.
“화산파의 칠절매화검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일초반식도 펼치지 않겠습니다.”
“물론 칠절매화검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서는 안 될 것이야. 하지만 이미 익힌 무공을 펼치지 말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네. 그대의 무공은 이미 출신입화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어디서든 칠절매화검의 무공이 필요하다면 쓰도록 하게나. 오히려 그편이 우리 화산파의 명예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되겠지.”
“그렇게 이해해 주신다니 장문 어르신의 넓은 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왕자헌과 곽연은 해쓱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설마하니 진양이 정말로 한 줄의 글귀만 적어 무공을 익혀 버릴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다.
마침 봉상탁이 왕자헌과 곽연을 쏘아보며 힐책했다.
“칠절매화검을 천보각에 갇혔을 때 익혔다는 것은 증명됐소. 그 말은 곧 천상련에서 칠절매화검을 보유하고도 계속 내놓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건 이제 어찌 설명하시겠소?”
“그, 그런…….”
왕자헌과 곽연은 말문이 막혀 낭패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결국 왕자헌은 자신이 한 거짓말 때문에 이제는 진실조차 제대로 증명해 보일 수 없게 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말했다.
“두 분은 어찌 그리 무르시오? 비록 저놈이 일필득도의 괴이한 능력을 가졌다곤 하나, 그것이 어째서 칠절매화검이 처음부터 천상련에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소? 뿐만 아니라 저놈은 지금 우리 련주님을 죽인 풍천익을 돕고 화산파와 종남파와 싸우지 않았소?”
그 말에 봉상탁이 진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건 확실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자네는 어째서 풍천익을 돕는 것인가?”
진양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오해가 있을 겁니다. 먼저 각주 어르신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저는 사 년 동안 각주 어르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럼 네놈은 정말로 우리가 냉 련주를 죽였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두 선배님께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풍 각주 어르신께 그간의 정황을 한 번 들어보아도 되겠습니까?”
“흥! 네놈이 무공에 재능이 좀 있다고 해서 이런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은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이지! 썩 물러나라!”
그때 석군평이 손을 들어 봉상탁을 제지했다.
“잠깐. 지금까지의 과정이 몹시 이상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우선 그의 의견도 한번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역시 며칠 전부터 이곳 천상련에 있었다고 하니 뭔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봉상탁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 장문이 그리 생각하신다면 좋소. 한번 기다려 봅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 어린 녀석의 꼼수에 불과하다면 나는 참지 못할 거요.”
“저 역시 그럴 것입니다. 양 소협, 자네는 우선 좋을 대로 하게. 대신 한 시진이 지나도 자네가 우리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풍 각주를 공격할 수밖에 없네. 그때 자네가 우리를 막는다면 우리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걸세.”
“두 선배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진양은 몸을 돌려 풍천익에게 다가갔다.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지켜본 풍천익은 진양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못 본 사이에 정말로 훌륭해졌구나. 글로 무공을 익히다니, 그야말로 네 녀석답구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나저나 이번 일은 어찌 된 것입니까? 왜 각주님이 이런 누명을 쓰게 된 겁니까?”
그러자 풍천익은 이맛살 가득 주름을 잡더니 화산파와 종남파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게 다 저 빌어먹을 화산파와 종남파 때문이 아니겠느냐? 저 녀석들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다!”
그러자 봉상탁이 버럭 열을 올리며 소리쳤다.
“닥쳐라! 어디서 헛소리냐? 아침에 냉 련주가 죽었을 때 네놈은 갇혀 있어야 할 감옥에서 나와 있지 않았더냐? 물론 부상을 입은 몸이었지만, 그건 틀림없이 냉 련주에게 당한 상처겠지!”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왜 련주님을 살해한단 말이냐?”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네놈이 다른 죄수와 결탁하고 천상련을 독차지하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나는 오늘 련주님을 뵌 적도 없다!”
“거짓말하지 마라! 그렇다면 네놈이 갇혀 있던 감옥 문이 어찌 열려 있단 말이냐?”
“네놈들이 열어준 것이 아니냐?”
“쯧쯧! 완전히 정신이 돌아 버린 모양이군. 우리는 칠절매화검을 찾으려고 왔는데, 왜 천중옥에 갇힌 네놈을 우리가 구해준단 말이냐?”
“흥! 칠절매화검은 그저 핑계였을 뿐이지! 네놈들은 천의교와 손을 잡고 우리 련주님을 살해하려는 것이 의도가 아니었느냐?”
“천의교? 천의교는 또 뭐지? 이제는 막 끌어다가 갖다 붙이는구나! 됐다, 됐어! 다 필요 없다! 어이, 양씨 녀석! 이제 알겠지? 네가 도와주려는 저 풍천익은 이미 정신 나간 멍청이다! 개방귀 소리나 하고 있어! 그러니 썩 물러나라! 이제 우리가 저놈의 주둥이부터 베어내고 봐야겠다!”
결국 진양이 다시 한번 나서서 말렸다.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다시 한번 차근차근 사정을 여쭤보겠습니다.”
“흥! 소용없대도!”
그때 석군평이 다시 슬그머니 나섰다.
“봉 장로님, 한번 두고 보지요.”
“흐음. 쳇! 내가 석 장문의 말이니 들어보겠소이다.”
그가 식식거리며 물러나자 진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풍천익을 돌아보았다.
“각주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제게 그 사정을 설명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정은 무슨 사정이냐? 너는 내 말을 못 믿는 게냐? 저 화산파와 종남파가 련주님을 죽였단 말이다. 네놈이 정녕 날 돕고자 한다면 저 두 놈의 목부터 베도록 해라.”
진양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각주님, 오랜만에 뵈었는데 뵙자마자 제게 살인을 저지르게 하실 겁니까? 그러지 마시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좀 얘기해 주십시오. 제가 정말 궁금해서 그럽니다.”
풍천익은 잠시 진양을 바라보더니 장탄식을 내뱉으며 말문을 열었다.
“흐음. 네가 그리 궁금하다니 얘기해 주지. 나는 원래 천중옥에 갇혀 있었다. 그 이유는…….”
풍천익이 목소리를 낮춰 진양에게 말했다.
“……칠절매화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진양이 깜짝 놀라 풍천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