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83
신필천하(神筆天下) 83화
3. 위기는 바람처럼 지나가고
“이렇게 살아 계시니 천만다행입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진양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나 풍천익의 표정은 착잡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운기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겨우 몸을 다스리고 일어날 수 있었을 때는 이미 련주님이 돌아가신 후였다.”
“그럼 풍 각주님은 바로 그 복면인들과 파천일왕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흥!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느냐?”
풍천익이 툭 쏘듯이 말했다.
그의 눈길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화산파 장문 석군평과 종남파의 장로 봉상탁에게 향해 있었다.
봉상탁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순 억지다! 억지야! 우리는 천의교가 뭐하는 놈들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는 오늘 아침까지 숙소를 떠난 자가 아무도 없다! 이건 분명히 천상련을 독차지하려는 저 풍씨 녀석이 꾸민 계략이야!”
진양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왕자헌과 곽연이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천상련에서는 어찌 풍 각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오?”
그러자 곽연이 냉랭한 어투로 대꾸했다.
“이들의 말대로 풍 각주의 말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정말 화산파와 종남파가 천의교를 돕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겠는가? 또한 감옥에서 꺼내준 것도 수상하지 않은가?”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는 진양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기도 했다.
하니 왕자헌과 곽연 역시 풍천익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이러했다.
풍천익은 남몰래 천의교와 손을 잡고 련주님을 죽였다. 그리고 천상련의 실권을 장악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련주님과 싸우면서 부상을 입은 풍천익은 천중옥으로 돌아와 오히려 적에게 당한 척 위장한 것이다.
이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주장하는 것과도 동일했다.
하지만 천상련 내에서도 그런 왕자헌의 추측에 동의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신반의하는 자도 있었다. 때문에 타격대와 암살대와 같은 대주 급 무인들은 이번 일에 대해서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한 것이다.
사실 창천당주의 지위는 천상련에서 련주 다음으로 막강했다.
하지만 무공 실력으로 본다면 왕자헌은 천상련 내에서 그리 강한 인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지금껏 남모르게 풍천익을 경계해 왔다. 풍천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공도 고강했고 련 내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자였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어쩌면 창천당주 왕자헌으로서는 풍천익부터 의심을 하는 것이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순서이기도 했다.
한데 갑자기 진양이 나타났으니 이젠 그조차도 힘들게 생긴 셈이다.
그때 유설이 나서서 말했다.
“그런데 천상련은 언제 천의교의 파천일왕을 생포했던 거죠? 지난번 연회에 참여했을 때는 그런 이야기가 없지 않았던가요?”
“본 련이 굳이 그 자리에서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오.”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뇨? 천의교는 무림 전체를 위협하는 조직이에요.”
“하지만 본 련이 취득한 정보를 굳이 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자 봉상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가만, 가만!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천의교? 천의교가 뭐하는 곳이냐?”
진양이 대답했다.
“최근 천의교가 사악한 음모를 꾸며 강호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모르고 계셨는지요?”
“천의교라는 조직은 처음 듣는군.”
진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화산파와 종남파는 일전에 있었던 금룡표국의 연회에 불참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를 아직 모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화산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칠절매화검을 되찾는 것이었으니까.
이에 유설이 나서서 말문을 열었다.
“천의교는 일전에 금룡표국을 습격한 적이 있어요. 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사대전을 일으키려고 했죠.”
그녀는 금룡표국이 천의교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화산파와 종남파의 무인들은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말을 모두 마친 유설이 석군평과 봉상탁을 향해 물었다.
“혹시 화산파와 종남파에서는 최근 이상한 일이 없었나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습격을 했다거나, 수상한 자들이 접근을 했다거나.”
석군평과 봉상탁 역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돌연 무리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두 사람은 재빨리 자기 문파의 무인들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없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석군평이 한 걸음 나서서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정심방(正心?)의 친구분들은 잠시 나와주시겠소?”
내력이 담긴 그의 목소리가 허공에 쩌렁쩌렁 울리자, 수군거리던 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하지만 누구 하나 무리에서 걸어 나오는 자가 없었다. 석군평과 봉상탁은 또 한 번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진양이 한 걸음 나서며 물었다.
“두 선배님께서는 무슨 일이신지요?”
그러자 석군평이 무겁게 침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실수한 것이 있나 보군.”
“무슨 사유인지요?”
“우리 화산파는 칠절매화검을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 왔네. 그런데 얼마 전이었지.”
화산파는 되도록 평화적인 방법으로 칠절매화검을 되찾으려고 했다. 천상련의 규모와 힘은 정파에 비하면 소림사와 맞먹을 정도였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상련은 좀처럼 비급을 내주지 않았다. 이에 속절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을 때, 어느 날 비쩍 마른 노인과 중년 사내가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정심방에서 왔노라고 소개했다.
석군평은 정심방이 생긴 지 얼마 안 된 조직이라는 것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객당으로 안내하고 친절한 태도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들은 천상련에 원한이 있다는 뜻을 내비치며 화산파를 적극 돕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종남파와 정심방, 그리고 화산이 힘을 합하면 천상련도 어쩔 수 없이 칠절매화검을 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렇잖아도 천상련과 담판을 벌일 생각을 하고 있는 석군평으로서는 그들의 제안이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그는 그들의 말대로 천상련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정심방의 무인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석군평이 비쩍 마른 노인에게 따져 물었다.
“정심방에서 온 무인은 겨우 다섯이 전부요?”
“정심방은 천상련과 원한이 깊습니다. 한데 우리 정심방의 무인 수가 많다면 천상련은 처음부터 적개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처음에는 저희 다섯 명만이 함께 가고, 차후 사정이 변하는 것에 따라 정심방 무인을 증원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석군평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또한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화산파와 종남파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정심방 같은 신생 조직이 배신할 가능성은 더더욱 없을 듯했다.
“좋소, 어차피 단시간에 칠절매화검을 돌려받기는 힘든 일일 테니 상황이 변하는 것을 지켜봅시다.”
결국 석군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한데…… 지금 그들이 보이지 않는군.”
이야기를 들은 진양과 유설은 분명 그 정심방에서 왔다는 자들이 천의교 신도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때였다.
“엇! 저기다!”
무리 중 누군가가 건물 모퉁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진양과 석군평, 그리고 봉상탁이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렸다.
“노옴! 어딜 가느냐?”
세 사람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다가가자, 마침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한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봉상탁이 세 사람 중 제일 빨랐는데, 그가 마침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갑자기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퍼펑!
이어서 봉상탁이 비명을 내지르며 튕겨 날아왔다.
“크악!”
깜짝 놀란 석군평과 진양이 얼른 달려가 봉상탁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봉상탁은 한 움큼 선지피를 토하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석군평이 봉상탁의 가슴팍을 풀어헤쳐 보니 손바닥 자국이 시커멓게 새겨져 있었다.
‘무시무시한 장력이군.’
그는 단 일 수에 봉상탁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강호에 얼마나 있을까 생각했다.
한편 종남파의 제자들은 수석장로인 봉상탁이 장력을 얻어맞고 기절해 버리자 눈이 뒤집혀 소리쳤다.
“누구냐! 당당히 나와서 나랑 싸우자!”
“나오지 않는다면 직접 가지!”
종남파 무인들이 저마다 건물 모퉁이를 향해 달려갔다.
진양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요!”
하지만 이미 네댓 명의 종남파 제자가 모퉁이를 돌아간 이후였다. 곧이어 ‘퍼펑!’ 하는 요란한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종남파 제자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왔다.
그들은 저마다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는데, 두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한 듯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석군평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대는 비열하게 숨어 공격하지 말고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자 모퉁이 너머에서부터 긴 그림자가 비쳐들더니 서서히 돌아 나왔다. 회색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아무렇게나 뻗친 중년의 사내.
진양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자는……!
과거 진양이 천상련에서 지낼 때 그는 공소부와 천보각을 남몰래 벗어난 적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쇠사슬을 차고 있던 그 죄수가 아닌가?
그렇다면 천상련은 이미 사 년 전쯤부터 천의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진양은 새삼 천상련의 정보력에 놀라고, 눈앞의 이 중년인이 바로 위교사왕 중 파천일왕인 마천강이라는 사실에 또 놀랐다.
이어서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노인이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진양이 응천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금곤삼왕 갈지첨이었다. 그리고 갈지첨 옆에는 그의 제자인 종지령이 서 있었다.
그 외에도 진양이 처음 보는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한 명은 중년의 여인이고, 다른 한 명은 땅딸막한 키에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었다. 노인은 눈과 입가에 웃음기를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석군평이 그들을 보더니 침음을 흘렸다.
“끄음. 그대들이 나를 속인 것인가?”
그는 갈지첨과 종지령을 쏘아보고 있었다.
상황이 또 급변하자 왕자헌과 곽연은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풍천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까지 화산파와 종남파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들 또한 이용당한 것이 아닌가?
“이놈들! 잘도 날 속였군!”
풍천익이 이를 부득 갈며 소리치자, 마천강이 탁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풍 각주는 언제부터 우리가 당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흥! 언제부터라니? 네놈이 화산파와 종남파를 들먹일 때부터…….”
말을 하던 풍천익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마천강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마천강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제 뭘 좀 아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