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86
신필천하(神筆天下) 86화
“상 당주, 일부러 그리 성을 낼 필요는 없소이다.”
풍천익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왕자헌과 곽연이 풍천익을 범인으로 내몰 때 세 명의 각주는 모두 풍천익을 변호했다.
하지만 천기당의 당주인 상중명은 철저하게 제삼자의 입장에서 관망하는 태도를 가졌던 것이다.
풍천익은 그가 원래부터 타고난 기회주의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딱히 원망하는 마음 따위는 없었다. 그저 흐름을 타 왕자헌을 나무라는 모습이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천기당주가 풍천익을 변호했더라면 오늘 일이 그처럼 힘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천기당주가 발을 빼고 물러서니 가장 권위가 약한 사대대주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게 됐고, 각주들만 위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지금, 각주들의 권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해져 있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천상련의 무인 중 대다수가 당주들보다 각주들을 믿고 따를 터였다. 그러니 천기당주 상중명은 지금 최선을 다해 각주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철기각주 동소립이 말했다.
“일단은 본 련을 이끌 사람이 필요합니다. 비록 갑작스럽긴 하지만 우리 중에서 한 명을 선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문제는 그 후에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동소립이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
“련주님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면서 아무런 말씀도 남기시지 못했습니다. 해서 우리끼리 선출해야 할 터인데, 혹시 여러분 중에서 누구 추천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까?”
그러자 송강이 탁자를 탁 내려치며 말했다.
“물어보실 것이 뭐 있겠소? 우리는 련주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눈뜬 봉사나 다름없었소. 하지만 풍 각주만이 뇌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적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소이까? 더욱이 풍 각주는 무공도 뛰어나고 학식도 깊으니 련주님으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오.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떻소이까?”
송강이 소리쳐 묻자, 천기당주가 껄껄 웃으며 답했다.
“옳소. 참으로 옳은 말이오. 저는 예전부터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왕자헌과 곽연의 표정은 몹시 어두워졌다.
동소립이 말을 받았다.
“나 역시 찬성이오. 그럼 혹시 반대하시는 분이 계시오?”
좌중은 조용했다.
이에 동소립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풍천익을 돌아보았다.
“풍 각주의 생각은 어떻소?”
“내가 어찌 본 련을 통솔할 수 있겠소이까? 하지만 본 련에 련주의 자리를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여러분의 뜻을 받아들여 임시나마 자리를 맡도록 하겠소이다. 하지만 때가 되면 분명히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외다.”
그러자 동소립이 환하게 웃으며 무릎을 털썩 꿇었다.
“동소립이 오대 련주님을 뵙습니다!”
풍천익이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다른 분들도 번거로운 예는 생략합시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상황인만큼 임시로 련주의 자리를 맡는 것일 뿐이오. 그 점을 모두 염두에 두시기 바라오.”
그러자 좌중의 무인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련주님!”
갑작스러운 칭호에 어색할 만도 하건만 풍천익은 시종 담담한 표정이었다.
한편 이런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양은 내심 놀라운 마음이었다.
‘모두들 마음이 심란하고 어지러울 텐데도 매우 신속하게 중요한 일을 결정해 가는구나.’
그때 풍천익이 왕자헌과 곽연을 돌아보며 불렀다.
“왕 당주, 곽 부당주.”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예, 련주님!”
“이번 일은 당신들에게 따져 물을 것이 많소. 변명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드리지.”
왕자헌은 주위 반응을 살폈다.
모두들 냉랭한 시선으로 자신과 곽연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변명이 제대로 먹히겠는가?
왕자헌이 탄식을 흘리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풍천익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이들의 행동으로 천상련은 큰 혼란을 겪었소. 물론 나 또한 애꿎은 화산파와 종남파를 의심했으니 부족한 부분이 있었소.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동도를 무조건 의심하고 믿지 못한 왕 당주와 곽 부당주의 과오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겠소. 이들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송강이 벌떡 일어나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창천당주의 자리는 본 련에 위기가 발생했을 시에 가장 책임감이 무겁고 중요한 위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데 왕 당주는 이번 대사에서 본 련을 한마음 한뜻으로 이끌기는커녕 동도를 의심하고 련 내 세력을 분열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문파 앞에서 적에게 놀아난 수치스러운 꼴을 보였으니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그의 목을 베어 죄를 물으심이 옳을 듯합니다.”
챙그랑!
송강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 자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시선을 돌려 보니 왕자헌이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 바로 그의 것이었다.
곁에 서 있는 곽연은 입술을 쿡 씹은 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동소립이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하나 갑작스레 그의 목을 베면 본 련의 동도들이 동요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엔 천중옥에서 십 년 동안 수양을 쌓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지금껏 듣고만 있던 파멸대주 강욱(姜煜)이 동의하며 나섰다.
“제 생각 역시 동 각주님과 같습니다. 자칫 이번 일이 내부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만 송강은 그 처벌이 마음에 안 드는지 시종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풍천익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알겠소. 그럼 왕 당주와 곽 부당주는 천중옥에서 십 년간 수양을 쌓도록 하시오.”
왕자헌이 한참이 지나서야 어렵게 입을 뗐다.
“련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풍천익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왕 당주가 받아들인다니 다행이군.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어서 말이오.”
왕자헌은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풍천익은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내가 제안을 할까 하오만.”
천기당주 상중명이 얼른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련주님.”
“여기 있는 양 소협은 오늘 본 련을 위기에서 구해준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오래전 나와 인연이 닿아 천상련을 위해 일한 적이 있소. 이 사실은 물론 여러분 모두 알고 있는 일이라 생각하오. 해서 말인데, 오늘 그와 관련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하오.”
“그게 무엇입니까?”
상중명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풍천익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창천당주와 부당주가 천중옥에서 수양을 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창천당을 이끌어갈 인물이 필요하지 않겠소? 하여 나는 여기 있는 양 소협에게 맡겨볼까 하오.”
탕!
순간 탁자를 손으로 내려치는 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보니 왕자헌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친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할 창천당주까지 지목되자 비참한 처지가 다시 한번 각인된 것이다.
풍천익이 소리 없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왕 당주?”
왕자헌이 잠시 씨근대더니 씹어뱉듯이 대꾸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때 진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풍 각주…… 아니, 련주님의 뜻에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과거의 은혜를 갚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또한 창천당의 일을 제가 맡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제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이 점을 깊이 헤아리시고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그러자 송강이 일어나서 말했다.
“양 소협, 우리 천상련은 그대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소. 오늘 그대가 아니었다면 본 련은 크나큰 위기를 겪었을 것이오. 나 또한 련주님과 같은 생각이오. 그러니 양 소협께서는 너무 겸사하지 마시고 우리의 청을 받아주셨으면 하오.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떻소?”
“저 또한 련주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동소립이 말을 받았다.
그러자 각 대주들과 부각주들이 저마다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제일 마지막으로 상중명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련주님의 뜻이 바로 저희의 뜻이지요.”
그는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마뜩찮은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사실 상중명으로서는 창천당주가 뇌옥에 갇히게 되면 자신이 바로 창천당주의 자리를 맡을지도 모르겠다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한데 난데없이 나타난 진양이 그 자리를 잇게 생겼으니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지른 잘못도 있으니 눈치가 보여 불만을 제기하지도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풍천익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진양을 돌아보았다.
“양아, 모두의 생각이 이러하니 너는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어떠냐? 이 기회에 천상련의 창천당을 맡아보지 않겠느냐? 넌 이미 천의교의 음모에도 깊이 관여했으니 무림의 사정도 빨리 알 수 있을 것이다. 혹 천상련이 너에게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언짢은 점이 있다면 염치없지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기 바란다.”
진양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많은 분께서 제게 청하시니 불초 후배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큰 자리를 후배가 선뜻 맡을 자신이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풍천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로서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럽겠지. 네게 내일 아침까지 시간을 주면 어떻겠느냐? 우리도 마냥 창천당주의 자리를 비워둘 수만은 없으니 시간을 오래 끌 수가 없다.”
“감사합니다. 내일 아침까지 반드시 마음을 정해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알겠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길 바라마.”
진양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자리에 앉았다.
풍천익은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급한 안건은 대충 마무리 짓도록 하겠소. 오늘은 본 련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소. 많은 자들이 동요하고 있을 것이니 천기당주는 수련생들을 잘 타이르도록 하시고, 각 주 여러분과 대주들은 수하들을 잘 통솔해 주시기 바라겠소.”
“알겠습니다.”
좌중의 무인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송강이 다시 일어나더니 대청 밖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는 왕 당주와 곽 부당주를 천중옥으로 데려가거라!”
“옛!”
무인 네 명이 얼른 달려오더니 왕자헌과 곽연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그러자 왕자헌이 소맷자락을 거세게 떨치며 소리쳤다.
“놔라! 내 발로 갈 것이다!”
무인들은 잠시 멈칫거리며 풍천익의 눈치를 살폈다. 풍천익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들은 왕자헌과 곽연의 좌우에 한 명씩 선 채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 대청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돌연 왕자헌이 옆에 선 무인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더니 단숨에 두 명을 베어 넘겼다.
“크악!”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대청의 무인들은 잠시 동안 아무런 대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이미 왕자헌은 나머지 두 무인의 목도 베어 넘기고 말았다.
“앗! 저 녀석이!”
송강이 대로해서 탁자를 손바닥으로 쾅 내려치며 일어났다. 동시에 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 왕자헌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 역시 오늘 낮에 있었던 싸움 때문에 기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대신 왕자헌은 하루 동안 힘을 쓴 일이 없었기에 기력이 넘치고 있었다.
왕자헌은 날듯이 보법을 밟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던 유설의 목에 검날을 들이밀고 잡아 일으켰다.
“엇! 유 낭자!”
그제야 진양도 사태를 파악하고 얼른 나섰지만, 왕자헌은 벌써 유설의 어깨를 잡은 채 대청 입구까지 물러간 후였다.
“모두 꼼짝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를 베어 버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