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87
신필천하(神筆天下) 87화
사정이 이렇게 되자 달려 나가던 송강과 진양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풍천익이 노한 표정으로 왕자헌을 노려보았다.
“왕 당주! 끝내 추잡하게 구는군!”
“흥! 풍 각주! 당신이 련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날 이 지경까지 내몬 것이겠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자네는 그 사리사욕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일세.”
“웃기는 소리! 나보고 십 년을 천중옥에서 썩으라고? 하하하! 당치도 않는 소리지! 이번 결정에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왕자헌은 유설의 목에 검을 겨눈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이쯤 되자 잠시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곽연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왕자헌의 곁에 바짝 붙어서 주위를 경계하며 물러갔다. 그 역시 십 년 동안 천중옥 내에서 썩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두 사람이 안마당까지 나오자, 밖의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포위했다.
진양을 비롯한 무인들이 대청에서 막 걸어 나오려는데, 왕자헌이 다시 카랑카랑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그가 검날을 들어 유설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그러자 유설의 희고 고운 목선을 타고 붉은 선혈 한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어느 누구도 감히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왕자헌이 주위를 둘러보니 대청 안마당에는 대략 서른 명 정도의 무인이 자신과 곽연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상궁 바깥에서는 아직 지금의 상황을 모르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여길 벗어날 수가 없다. 우선 이곳만 벗어날 수 있다면 천상련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듯한데…… 어쩐다?’
왕자헌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자, 동소립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왕 당주, 그만 검을 내려놓으시오. 더 이상 당신이 물러날 곳은 없소이다.”
“흥! 물러날 곳이 없다면 죽기밖에 더 하겠소? 십 년 동안 모멸감을 느끼며 살아남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지!”
“왕 당주!”
“시끄럽소!”
버럭 소리친 왕자헌이 왼쪽 소매를 떨치니 강한 바람이 훅 불어나갔다. 그러자 마당 한쪽에 피워놓은 불이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그가 다시 소리쳤다.
“모두 불을 꺼라!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의 목숨은 없다!”
무인들이 저마다 눈치를 살피고 있자, 풍천익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인들이 저마다 들고 있는 횃불과 건물에 내걸린 등불을 꺼 버렸다. 갑자기 빛이 사라지자 주위는 삽시간에 암흑 속에 갇혀 버렸다.
그 순간 ‘휘리릭!’ 하는 소리가 나더니 거뭇한 그림자가 마당을 가로지르며 달려가는 듯했다.
오감을 한껏 끌어올리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진양이 재빨리 몸을 날려 기척을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상대방에게 따라붙은 진양은 얼른 손을 내뻗어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한데 손에 잡힌 손목은 매우 가늘고 보드라운 살결이 아닌가?
진양은 곧바로 유설의 손목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얼른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왕자헌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딜 가려고?”
그 순간 진양이 유설의 손목을 놓는 것과 동시에 수호필을 곧장 찔러 나갔다.
쒜에엑!
어둠을 가로지르며 날아간 수호필은 섬뜩한 소리와 함께 뭔가를 베어냈다. 동시에 뜨끈한 액체가 진양의 왼쪽 뺨으로 튀어 올랐다.
“크윽!”
신음을 뱉은 사람은 분명 왕자헌이었다.
진양은 다시 손을 뻗어 유설의 몸을 자신의 등 뒤로 잡아 돌린 뒤에 곧바로 수호필로 내찔러 갔다.
쒜에엑! 까앙!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이어 청명한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공력을 머금은 은잠사와 검날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지만, 진양은 그 틈에 상대방의 윤곽을 대충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진양은 곧바로 이검을 내찌르며 붓털을 뾰족하게 세워 상대의 혈도를 점해갔다. 한데 필봉이 닿는 순간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거친 비명이 튀어 올랐다.
푸욱!
“아악!”
외마디 비명 끝에 상대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수호필을 타고 전해졌다. 진양이 수호필을 재빨리 거두어들이자 상대는 신음을 꺽꺽 삼키더니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진양은 전해진 감각에 비해서 돌아온 반응이나 소리가 조금 뜻밖이었지만,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얼른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유 낭자! 괜찮소?”
“네, 전…… 괜찮아요.”
유설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전해졌다.
진양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른 유설에게 다가갔다. 그가 손을 뻗어 잡자 가녀린 유설의 어깨가 잡혔다. 그 순간 유설이 진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양 소협, 고마워요!”
진양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그녀를 품에 안으며 다독였다.
“고생하셨소. 다친 데는 없소?”
“네.”
“다행이오.”
진양은 부드러운 손길로 유설의 등을 쓸어내렸다. 유설은 새삼 그의 품이 어렸을 적 아버지의 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풍천익이 소리쳤다.
“양아, 왕 당주를 어찌했느냐?”
“제가 혈을 짚어 유 낭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는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진양이 대답하자 풍천익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이제 불을 밝히도록 하라!”
그러자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지더니 금방 마당이 밝은 빛으로 환해졌다.
한데 다음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진양도 바닥에 쓰러진 왕자헌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왕자헌이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가슴은 깊은 검상이 새겨져 있었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풍천익 역시 왕자헌이 죽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진양을 보았다.
“그를 죽인 것이냐?”
“아, 아닙니다. 전 정말 혈도만 가볍게 내찔렀는데…….”
“흠. 어두워서 잘못 찔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진양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어둡더라도 자신이 내찌른 곳이 어느 부위인지는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자신이 내찌른 곳은 심장 한복판이 아니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군요. 전 혈도만 찌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누가 왕 당주를 찔렀단 말이냐? 네가 왕 당주와 싸울 때 근처에는 아무도 없지 않았더냐? 혹시 유 낭자가 찔렀소?”
풍천익이 시선을 옮기며 묻자 유설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아니에요. 그럴 정신도 없었는걸요.”
그때 송강이 불쑥 소리쳤다.
“그놈! 그놈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아! 곽연!”
그제야 풍천익은 사정이 어찌 돌아간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왕자헌에게 집중되어 있었을 때, 곽연은 어둠을 틈타서 달아난 것이리라.
풍천익이 얼른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당장 곽연을 쫓아라! 놈이 천상련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라!”
“존명!”
무인들이 삽시간에 흩어지며 달려갔다.
풍천익이 왕자헌의 시신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렇다면 곽연이 왕 당주를 찔러 죽였다는 것인데 왜 그런 짓을 했지?”
그때 왕자헌의 시신을 꼼꼼히 살펴보던 진양이 말했다.
“아무래도 이자의 옷이 좀 이상합니다. 혹시 곽 부당주가 왕 당주의 품에서 뭔가를 꺼내간 것은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과연 진양의 말대로 왕자헌의 가슴팍이 거칠게 풀어헤쳐져 있었다. 싸우다가 자연스레 옷이 풀린 것으로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풍천익이 침음을 흘리다가 중얼거렸다.
“흐음, 그렇군. 곽연 그 녀석이 왕 당주의 품에서 뭔가를 빼간 모양인데, 뭔지 모르겠군. 가만, 피가 묻은 흔적으로 보면 책자인 듯한데…….”
그러다가 풍천익은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돌아보며 소리쳐 물었다.
“오늘 일이 발생하고 나서 제일 먼저 천상궁으로 온 자가 누구요?”
“천기당주입니다.”
송강이 즉각 대답했다.
풍천익의 시선이 상중명에게 향했다.
상중명은 혹시 자신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흠칫 물러나며 말했다.
“맹세코 저는 왕 당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상 당주, 련주님이 돌아가신 걸 보고 나서 제일 먼저 뭘 하셨소?”
“창천당주를 불렀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그럼 왕 당주가 두 번째로 그 현장에 갔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때 왕 당주가 뭔가를 챙긴 것은 없었소?”
“챙기다니요? 무얼 말씀하시는지요?”
“어떤 것이라도.”
“따로 챙긴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현장을 보존하려고 애썼지요. 아, 한 가지 있군요.”
“그게 뭐요?”
풍천익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상중명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본래 풍천익은 그보다 나이는 많을지라도 직위로 따지면 상중명보다 아래에 해당했다.
하지만 임시 련주가 된 풍천익에게서는 묘한 위엄이 느껴지고 있었다.
“먼저 사라진 물건이 없는지 살폈지만,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놈들은 련주님을 해하는 것이 오로지 목적인 듯했지요. 왕 당주는 곧바로 련주님 방에 보관되어 있던 참월도(斬月刀)와 천상무운신공(天上無雲神功)부터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창천당으로 옮긴 것으로 압니다.”
이야기를 들은 풍천익이 곧바로 고개를 돌리더니 파멸대주 강욱을 돌아보았다.
“강 대주, 지금 당장 창천당으로 가서 참월도와 천상무운신공이 제대로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강욱이 곧바로 몸을 날려 천상궁 밖으로 사라졌다.
풍천익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왕자헌이 천상무운신공을 챙기려고 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곽연이 비급을 가져갔다는 말인데…….’
풍천익이 주먹을 꾹 말아 쥐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잠시 후 강욱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련주님, 참월도는 보관되어 있습니다만 천상무운신공이 없습니다. 당원들의 말에 의하면 중요한 물건이라 왕 당주가 직접 보관하겠다고 했답니다.”
“빌어먹을!”
풍천익이 욕지기를 뱉으며 바닥을 찼다.
지금 기분이라면 왕 당주를 살려낸 후 다시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양이 풍천익에게 다가와 달래듯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내기도 상하셨으니 그만 좀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풍천익은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찌 쉴 수 있겠느냐? 그보다 너는 우선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풍천익은 상중명을 돌아보고 말했다.
“상 당주, 천기당에 공소부라는 녀석이 있을 거요.”
“공소부라면…… 시동으로 있다가 작년에 천기당으로 입문한 녀석이 아닙니까?”
“그렇소. 양 소협과 공소부는 어려서부터 인연이 있으니 그를 불러 양 소협을 객당으로 안내해 주도록 하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말을 마친 상중명은 곧바로 부당주를 불러 공소부를 데려오도록 했다.
사실 공소부는 천상련의 시동이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작년부터 천기당의 입문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진양은 자신만 돌아가서 쉬는 것이 미안했지만, 며칠 동안 고생한 유설을 생각해서라도 언제까지 천상련의 일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유 낭자가 지금 몹시 지쳐 있으니 우선 편한 잠자리를 구하고 쉬게 해주어야겠다. 나 때문에 그녀도 쉴 수 없으면 안 되지. 그리고 천상련은 내가 아니더라도 이번 일을 잘 해결할 거야.’
잠시 후 천기당의 부당주와 함께 눈에 익은 얼굴이 천상궁 안으로 들어왔다. 다부진 체격에 서글서글한 인상이 특징인 남자였는데, 진양은 그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소부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