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88
신필천하(神筆天下) 88화
공소부는 잠시 진양을 알아보지 못해 움찔 떨더니 곧 환하게 웃으며 진양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진양이구나? 맞지?”
“맞습니다, 형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늘 그렇지. 그보다 너는 더욱 늠름해졌구나. 그렇잖아도 오늘 객당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네 공이 크다고 들었다. 천기당 내에서도 너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정말 네가 자랑스러워.”
“소문은 늘 부풀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전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기쁘군요.”
공소부도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진양의 뒤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는 물었다.
“이분은…….”
“아, 유설 낭자입니다. 저와 함께 왔습니다.”
유설이 가볍게 목례하며 인사를 해 보이자 공소부도 꾸벅 인사했다. 그러더니 진양을 보고 불쑥 말했다.
“유 낭자와 너는 정말 잘 어울린다.”
공소부는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그의 말에 진양과 유설이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풍천익이 공소부를 향해 말했다.
“소부야, 너는 이들을 객당으로 안내하도록 해라. 그리고 음식도 함께 챙겨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풍 각주…… 아, 아니, 련주님.”
공소부가 얼른 꾸벅 허리 숙이며 인사했다.
진양이 풍천익을 돌아보고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후배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련주님도 모쪼록 몸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랍니다.”
“클클, 내 걱정은 말아라. 그보다 앞서 말한 것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진양과 유설, 그리고 공소부는 다시 한번 풍천익에게 인사를 건넨 뒤 천상궁을 빠져나왔다.
5. 복잡한 마음
진양과 유설을 객당으로 안내한 공소부는 잠깐 동안 담화를 나눈 후 천기당으로 돌아갔다. 공소부의 마음 같아선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겪느라 피곤했을 진양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양은 위사령과 흑표 등 혈사채 무인들이 머무는 객당을 한번 둘러본 뒤에 밤늦게 침실로 돌아왔다. 침실 앞의 정원에는 언제 데려왔는지 흡혈마도 나무 곁에 매어 있었다. 진양은 흡혈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침상에 누워 있어도 생각이 복잡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고생을 한 뒤여서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데도 머릿속은 혼란하기만 했다.
‘풍 각주님이 이제 막 련주가 되셨으니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으실 거다. 그런데 내가 그분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은혜를 저 버리는 것이 아니겠나? 하지만 내가 과연 창천당의 임무를 맡아서 잘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렇게 되면 유 낭자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녀를 천상련에서 지내게 하는 것도 나만의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진양은 가슴이 답답하고 생각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
결국 그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가서 후원을 거닐었다.
마침 객당 후원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진양은 그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만 바라보았다.
구름을 벗어난 달이 수면을 비추자 연못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어렴풋이 보였다. 좁은 연못 속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고 있노라니, 진양은 문득 자신의 처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문득 등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곤하실 텐데 왜 주무시지 않고 나와 계신가요?”
진양이 돌아보니 유설이 달빛 아래에 선녀와 같은 자태로 서 있었다. 그녀는 얼굴 가득 보름달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진양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불쑥 검을 뽑아 들고 진양의 목을 겨눴다.
진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유설이 피식 웃었다.
“만약 곽연이 돌아와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지금은 꼼짝없이 죽었을 거예요.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세요? 인기척도 느끼지 못할 만큼?”
그제야 진양도 가볍게 웃어넘기며 말을 받았다.
“살기가 느껴졌다면 또 다를지도 모르지요.”
“음. 그럼 살심을 한번 끌어올려 봐야겠군요.”
유설이 다시 검을 진양의 목에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눈에 힘을 주며 진양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진양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살심을 끌어올리는 중이에요.”
“지금까지 그렇게 귀여운 살심은 처음 봤소. 가장 방심하기 좋은 살심이니 가장 위험한 살심이겠군.”
그러자 유설도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죠? 그러니 항시 조심하시라는 뜻이에요.”
“하하하, 알겠소. 명심하겠소.”
“그럼 이제 들어볼까요? 무슨 고민을 그토록 깊게 하셨는지.”
“흐음, 글쎄…….”
진양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유설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맞혀볼까요?”
“이젠 독심술까지 연마했소?”
“방금 연마했어요.”
“지상 최고의 살기와 독심술이라…… 천하무적이군.”
유설이 까르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제가 독심술을 발휘해서 맞혀보죠. 지금 당신이 고민하고 있는 건…… 천상련에 남아서 창천당주가 될까, 아니면 이대로 하산해서 스스로의 길을 갈까, 이 두 가지죠?”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굉장한 독심술이군. 바로 맞혔소.”
사실 이 고민은 유설에게 말하기가 미안한 부분이 있었다. 그녀에게 말하게 되면 분명 자신의 존재가 짐이 될 거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오니 진양은 별수 없이 솔직하게 대답한 것이다.
유설은 진양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그래서 당신은 결정을 내렸나요?”
“아직이오. 결정을 내렸다면 더 고민할 필요가 있겠소?”
“그건 모르죠.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에도 항상 미련을 두고 고민하는 동물이니까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마음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러다 보면 분명히 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진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도 너무 많은 목소리가 들려서 탈이라오. 어떤 목소리는 은혜를 지켜서 보답을 하라 하고, 또 어떤 목소리는 의무감 따위는 던져 버리고 자유롭게 살라 하오.”
“그중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사실 도의를 따지지 않고 욕망대로만 하자면 모든 것을 관두고 유 낭자와 함께 천중산을 내려가고 싶소. 그리고 무림의 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당신을 위해 살고 싶소.”
진양의 목소리에는 진실함이 절절히 묻어 있었다. 유설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귓불까지 발갛게 달아올라서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녀가 먼 산을 응시하며 더듬더듬 물었다.
“하지만 은혜를 갚고 도의를 지키고 싶은 것 또한 당신의 욕망이 아니겠어요?”
“그도 그렇겠지요.”
“아버지께서는 예전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항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의심없이 추진하라고요. 그리고 그 일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을 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라고 하셨어요.”
“어떤 질문이오?”
“내일 당장 내가 죽어도 그 일을 할 것인지. 만약 ‘아니’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 일은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하셨죠.”
“아!”
진양은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순간의 깨달음이 밤하늘의 유성처럼 진양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렇군! 과연 그렇소! 그런 간단한 이치를 모르고 있었다니! 고맙소, 낭자!”
진양은 갑자기 유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유설은 진양이 이처럼 크게 감명받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양에게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흐뭇한 마음이 들어 미소 지었다.
“결정하셨나요?”
“아뇨. 아직 결정하지 않았소. 하지만 곧 결정할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이번 결정은 진정으로 내 마음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를 따른 것일 거요. 어떤 결정을 내리든 오늘 밤은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소.”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유설이 환하게 웃자 진양도 따라 웃었다.
“모두 낭자 덕분이오.”
진양은 이 달빛 아래에 유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손을 잡고 후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다음 날 진양은 천상궁을 찾아가서 풍천익을 만났다.
풍천익은 천상궁의 대청에서 정좌를 한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는데, 진양이 찾아오자 곧 운기를 멈추고 웃으며 일어났다.
“왔느냐?”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클클, 이리 와서 앉아라.”
풍천익이 진양을 탁자로 안내하며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가벼운 담화를 나누는 동안 시녀가 차를 내왔다.
풍천익은 진양에게 차를 권하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 생각은 좀 해보았느냐?”
“예, 어르신…… 아니, 련주님.”
“클클, 나도 너에겐 련주라는 칭호가 어색하니 편한 쪽으로 부르도록 해라. 그건 그렇고, 어찌 결정을 내렸느냐?”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풍천익이 진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진양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대청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송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련주님, 안에 계십니까?”
“있소. 들어오시오.”
풍천익의 대답에 송강을 비롯한 당주와 각주들이 대청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진양을 보고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양 소협이 와 있었구려. 두 분 대화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풍천익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마침 잘됐소이다. 지금 막 어제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려던 참이오. 창천당주의 자리에 관한 이야기이니 모두 함께 들어봅시다.”
진양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좀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젯밤 여러 번 고민해 보았습니다. 련주님께서 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는 창천당의 업무를 잘 이끌어갈 재목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그 일을 두고 고민한 이유는 한때나마 은혜를 받은 어르신의 부탁이라 도의상 저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흐음…… 그래서 결정은 어찌 내렸는가?”
풍천익이 재차 질문을 던지자 진양이 돌연 큰절을 올렸다. 대청에 모인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번갈아보았고, 풍천익도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닥에서 일어난 진양이 풍천익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어르신께 받은 은혜는 평생 동안 제게 큰 빚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어르신께 힘을 드릴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창천당주의 자리를 받을 수가 없으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뜻밖의 대답에 풍천익은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그는 진양이 자신의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송강을 비롯한 다른 무인들도 생각 밖의 대답인지라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송강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양 소협, 그 이유를 들어보아도 되겠소?”
“창천당주 자리는 제가 아니라도 맡을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은 그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제 길이니까요. 이유를 물으신다면 그저 저의 길을 갈 생각이라고 답변 드려야겠군요. 죄송합니다.”
“도대체 양 소협이 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