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89
신필천하(神筆天下) 89화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실 별로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유 낭자와 함께 조용한 곳에 터를 잡고 서예 학당을 차릴 생각입니다.”
“하지만 천의교 녀석들이 양 소협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것이 두려워 천상련에 남으려는 것은 더욱 해서는 안 될 일이지요.”
진양은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대청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그의 생각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진양은 지금껏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 왔다. 임패각의 만남이 진양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젯밤 진양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의로운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고, 대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그 결과 이제부터는 남의 사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부터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풍천익은 진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툴툴 웃음을 흘렸다.
“널 어제 처음 보았을 땐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별로 변한 게 없다고 느꼈지. 한데 오늘 다시 보니 제법 어른스럽게 변했구나. 좋다, 네 생각을 존중해 주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 내려갈 생각이냐?”
“오늘 바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그리 서둘 필요가 있느냐? 그동안 고생이 많았을 텐데 좀 더 쉬었다 가지 않고.”
“아닙니다. 어차피 혈사채의 도움도 받은 마당이라 마냥 여기에 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천상련은 상을 치르는 중이니 더욱 신세를 끼칠 순 없지요.”
“알았다. 정히 그렇다면 몸조심하도록 해라.”
“참,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진양은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냈다. 책 표지에는 ‘북명패검(北明覇劍)’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풍천익이 진양을 보며 물었다.
“이건 천보각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실 어제 천보각을 빠져나오면서 유 낭자가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아직 책을 펼쳐 보진 않았습니다. 다만 위기의 순간이 오면 그 책을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일이 무사히 풀리게 되어 다시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송강이 나서서 말했다.
“양 소협은 참으로 의협이구려. 만약 그 책을 말없이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본 련에서는 한동안 몰랐을 거요. 요즘처럼 경황이 없을 때이니 더욱 그랬을 거요. 한데도 이렇게 양심껏 돌려주니 크게 감동했소이다.”
“당연한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풍천익이 책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진양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 이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느냐?”
“사실 저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유 낭자가 박식하여 그녀에게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한데도 이걸 순순히 돌려준단 말이냐?”
“원래 천상련의 것이니까요.”
“허참, 네놈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풍천익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풍천익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모든 무인들이 진양의 사람됨에 깊이 감명을 받고 있었다.
그때 동소립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련주님, 이럴 것이 아니라 북명패검의 비급을 양 소협께 선물하심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송강이 손뼉을 짝 치며 동의했다.
“그것참 좋은 생각이오. 련주님, 그리하시지요. 엄밀히 따지면 북명패검이 천상련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칠절매화검이 화산파의 무공인 것처럼 말입니다. 한데 그 북명패검을 양 소협이 가져갔으니 이제 그 주인은 양 소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뜻을 나타냈다. 물론 그중에는 지나치게 진양을 배려하는 이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천상련의 실권이 풍천익을 비롯한 각주들 중심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으니 대충 분위기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풍천익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러 사람의 뜻이 그러하니 이 비급은 네가 가지도록 해라. 아니, 유 낭자에게 돌려주도록 해라.”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너희가 천보각에 갇히게 된 것도 다 우리 책임이니 그 보상이라고 생각해라.”
이쯤 되자 진양도 더는 거절할 수 없어서 머리를 깊이 숙였다.
“어르신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꼭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진양이 일일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예를 갖추자, 저마다 흐뭇한 표정으로 진양을 보았다.
대략의 인사를 끝낸 진양은 다시 객당으로 돌아와 일행을 챙겼다. 진양이 일행과 함께 천상련을 나서자 풍천익을 비롯한 무인들이 입구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날씨는 쾌청하고 늦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진양 일행은 천중산을 내려온 뒤에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혈사채에는 여러모로 신세를 졌습니다. 제가 마땅히 혈사채를 찾아가서 채주님께 답례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나, 지금은 찾아가 봐야 또 신세만 지게 될 뿐인지라 이쯤에서 인사를 드릴까 합니다. 후에 반드시 혈사채를 찾아가 이번에 받은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양의 말에 위사령이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그리 섭섭하게 하시오. 우리 혈사채야말로 양 소협에게 큰 은혜를 받지 않았소? 그에 대한 보답일 뿐이오. 게다가 그러고도 양 소협의 은혜는 다 갚지 못할 지경이니, 우리 혈사채가 앞으로도 더욱 양 소협을 돕기 위해 성심성의를 다할 것이오. 그러니 언제라도 혈사채의 힘이 필요하시거든 연락을 주시기 바라오.”
“위 선배님의 배려에 양 아무개가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진양이 큰절을 올리자 위사령을 비롯한 혈사채 무인들이 저마다 맞절을 올리며 답례했다.
위사령 일행이 떠나가자 흑표가 진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이미 양 형과 함께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니 작별 인사는 필요 없소.”
“감사합니다, 흑 형님.”
진양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세 사람은 천중산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객점에 들러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데 객점에 도착하고 나니 여느 때와 달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저마다 허리춤에는 장검이나 도를 차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기다란 창을, 또 어떤 이는 커다란 활을 메고 있었다.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뿜어내는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은 것이 틀림없이 무인들인 듯했다.
진양 일행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많은 무인들이 작은 객점에 모였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는 무릎을 탁 쳤다.
이들은 모두 천상련의 냉 련주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문을 가는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객점의 분위기는 냉랭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파의 무인들과 사파의 무인들이 구분 없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진양은 그동안 무인들 틈에 섞여서 신물이 나도록 온갖 사건을 겪은 터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무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결국 진양 일행은 발길을 돌려 다른 객점으로 향했다. 한데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가는 곳곳마다 천상련을 찾아가는 조문객들로 꽉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진양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만두와 육포 등의 음식을 싸가지고 가기로 했다.
객점을 나선 그들은 남쪽으로 줄곧 걸어가다가 개울가에 다다라서 음식을 먹기로 했다.
유설이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만두를 꺼내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건가요?”
“사실 한 군데 생각해 둔 곳이 있소. 두 분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소.”
“그게 어디죠?”
“대별산이오.”
“대별산요?”
유설은 대별산이라는 곳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진양이 입가에 그리움이 담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내가 지내던 곳이라오. 그곳엔 학립관이 있소.”
그제야 유설도 들은 이야기가 기억나서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진양이 말을 이었다.
“우선 학립관을 찾아간 다음 관주님께 오랜만에 인사를 올리고 싶소. 그리고 그 근처에서 우리도 학당을 차리는 것이 어떨까 싶소.”
“나쁘지 않네요.”
유설도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음식을 전부 먹은 후 세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개울 아래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진양 일행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무수한 무인들을 지나쳤기 때문에 틀림없이 저 아래에서 무인들끼리 싸움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같았다면 진양이 얼른 달려가 보겠지만, 요 며칠 싸움이라면 질리도록 보고 겪지 않았던가?
진양은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못 들은 척하며 길을 재촉했다.
“자, 갑시다.”
“잠깐만요.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유설이 눈치없이 불쑥 말했다.
그제야 진양도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이는 척하며 대꾸했다.
“싸우는 소리 같군요.”
“누가 싸우는 것일까요?”
“글쎄요. 누군들 우리와 상관없지 않겠소? 괜히 방해하지 말고 떠납시다.”
“하지만 부당한 싸움이라면 우리가 나서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유설의 말에 진양은 할 말이 없어졌다.
순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유설이 못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아직 모르겠소? 나는 또 당신이 이상한 사건에 연루되는 것이 싫단 말이오.’
하지만 영롱하게 빛나는 유설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진양은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유 낭자를 위해서 이런 생각을 한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이 편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가.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을 유 낭자에게 떠넘기는 것일 뿐이다. 유 낭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키면 될 일이다.’
진양은 생각을 바꾸고 걸음을 옮겼다.
“한번 가봅시다. 무슨 일인지.”
진양 일행이 개울을 따라 조금 걸어 내려가니, 과연 밝은 햇살 아래에서 서로 도검을 겨루고 있는 세 명의 무인이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니 한 명은 여자였는데, 두 남자가 여인 한 명을 공격하는 형국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가장 분노한 사람은 물론 유설이었다.
그녀는 요즘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 차에 남자 두 사람이 여인 한 명을 집중 공격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 앞뒤 상황을 따지지도 않고 몸을 날려갔다.
“엇? 기다리시오!”
당황한 진양이 얼른 뒤따라가며 소리쳤지만, 유설은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사실 유설은 지금 이 순간 홀몸으로 두 남자를 상대하는 여인을 보면서 곽연이 자신을 강제로 납치해 오던 상황이 떠올랐던 것이다.
유설이 싸움터까지 다다라서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남자 두 명이 여인 한 명을 공격하다니, 부끄러운 줄을 아시지!”
그러자 한창 공격을 퍼붓고 있던 두 남자 무인이 흠칫 떨며 물러났다.
그들은 유설을 돌아보더니 한 남자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누구냐? 엇? 넌…… 넌…… 누구였더라?”
키가 작은 무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그 곁에 선 키가 큰 무인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유 낭자.”
그러자 키 작은 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중얼거렸다.
“유 낭자? 유 낭자라고? 아우야, 넌 저 처자를 아느냐?”
“형님, 같이 보지 않았소? 저분이 바로 금룡표국의 유 낭자가 아닙니까?”
“금룡표국? 아! 그 검법을 보여 달랬더니 검무 따위나 추고 있었던 그 유설이라는 계집아이를 말하는 것이냐? 그러고 보니 맞구나!”
“검무라니요. 그건 정말 훌륭한 검법이었습니다.”
“흥! 그딴 게 검법이면 내가 손짓만 해도 장법이 되겠구나!”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형님의 장법 역시 고명하니까요.”
“흥!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손짓 한 번이 어찌 장법이 되겠느냐? 그럼 내가 밥을 어찌 떠먹겠느냐? 숟가락을 잡으려고만 해도 부서질 텐데!”
“하하! 그도 그렇군요. 형님의 손짓 한 번이 장법이 될 수는 없겠네요.”
“흥! 그래도 월야검법이라는 검무보다는 백번 낫겠지!”
“에이, 월야검법도 훌륭했습니다.”
“아니라니까!”
두 무인은 쉴 새 없이 티격태격했다.
이쯤 되자 유설도 그들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지난번 금룡표국의 연회에 찾아왔던 사상이괴였던 것이다.
진양과 흑표가 다가왔을 때까지도 사상이괴는 서로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다.
그때 그들과 싸우고 있던 여인이 사상이괴를 보며 차갑게 소리쳤다.
“싸울 거예요, 말 거예요?”
그러자 키가 작은 서요평이 불쑥 소리쳤다.
“싸운다! 당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