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90
신필천하(神筆天下) 90화
그러자 서운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낭자의 무공은 실로 고명했소. 불초 서 아무개에게 큰 배움이 됐소.”
“흥! 배움이 되긴 뭐가 돼? 난 하나도 못 배웠다! 오히려 내가 가르쳐 줬지!”
“그럼 그것대로 좋지 않겠수? 형님, 그만합시다.”
“싫다! 네가 공격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 공격하겠다!”
말을 마친 서요평이 갑자기 몸을 훌쩍 날리더니 시퍼런 검광을 뿜어대며 휘둘렀다. 여인이 얼른 뒤로 물러나면서 피하자, 이번에는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서운지가 그녀의 옆구리를 베어 들어갔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기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여인의 운명이 이제 끝이 났다고 판단했다.
지켜보던 진양 일행은 저마다 비명을 터뜨렸다.
“앗!”
하지만 정작 여인만큼은 크게 놀라지 않는 듯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그렇다고 해도 서운지의 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데 검이 살갗을 베는 대신 검의 옆면이 그녀의 허리를 ‘찰싹!’ 때리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보고 생각하는 서운지는 여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녀를 벨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여인을 베지 않고 지금처럼 검의 옆면으로 툭툭 치는 정도였다.
처음에는 여인 역시 몹시 자존심이 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두 사람이 함께 공격하면 자신이 도무지 이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에는 서운지의 이러한 배려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기는커녕, 한편으론 감사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인의 무공 역시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의 협공 수준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무인이라 할지라도 당해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한 것을 감안했을 때, 여인의 검술은 실제로 정교하고 오묘했다.
여인은 서운지가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모든 공방을 서요평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한편 진양은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여인의 모습이 어딘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불쑥 소리쳤다.
“소 낭자!”
여인은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서요평은 바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검을 휘둘러 갔다.
“흥! 어르신을 상대하면서 허술하기 짝이 없구나!”
여인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이미 상대의 검이 가슴 앞까지 날아든 상태였다. 그녀는 가까스로 몸을 눕히며 검을 앞세웠는데, 서요평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전신이 찌르르 울렸다.
깡!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여인이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급히 방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기를 상하는 바람에 울컥 핏물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여러 사람 앞에서 피를 토하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여겨 올라오는 핏덩이를 꿀꺽 삼켰다.
그러는 사이 서요평이 바닥을 박차고 순식간에 여인 앞까지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잠깐!”
어느새 진양이 번개처럼 몸을 날리더니 서요평을 향해 수호필을 휘둘렀다. 도날처럼 빳빳하게 선 은잠사 붓털이 서요평의 검날과 부딪치자 ‘깡!’ 쇳소리가 울리면서 불티가 휘날렸다.
서요평이 뒤로 주룩 미끄러지며 멈췄다.
“감히 어르신을 방해할 셈이냐?”
“후배가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 여인은 저와 인연이 있어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사상이협께서는 어째서 소 낭자와 싸우시는지…….”
“네놈에게 해명할 이유가 없다!”
서요평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달려왔다.
그 기세가 대단히 사납고 거칠었기에 관전자들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조심해요!”
“조심하시오!”
흑표가 얼른 나서려는데, 그보다 한발 앞서 진양의 몸이 번쩍하고 움직였다.
다음 순간 진양은 서요평의 등 뒤로 바람처럼 돌아가더니 수호필을 가로로 후렸다.
서요평이 깜짝 놀라 몸을 뒤틀며 검을 거꾸로 세우며 막았다.
그러나 그 순간 진양의 수호필은 곧게 내뻗어지며 일검을 내찔렀다. 뒤늦게 서요평은 그것이 찌르는 검법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훌쩍 물러났지만, 이미 진양의 검은 명치의 요혈을 노리며 깊이 들어온 상태였다.
‘헉! 이 녀석의 무공이 과연 대단하구나!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이런 놈이 나타난 거지?’
서요평과 서운지는 진양을 알아보지 못했다.
일전에 금룡표국에서 만났을 때의 진양은 중년인으로 변장을 한 상태였고, 지금은 본연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서요평은 이제 진양의 필봉에 운명을 내맡겨야 할 상황이었다.
만약 진양이 혼신의 힘을 다해 찌른다면 목숨을 잃을 테고, 손속에 사정을 둔다면 죽음은 면할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이 되었든지 서요평에게는 굉장히 치욕적인 일이었다. 때문에 매사에 부정적인 그는 진양이 손속에 사정을 두어 살아남는다고 해도 스스로 목을 베고 죽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옆에서 검광이 번쩍이더니 쇠붙이 하나가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따앙!
동시에 붓이 튕겨 나가면서 진양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도중에 끼어들어 수호필을 막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서운지였다.
그는 진양의 내력을 고스란히 받아냈기 때문에 옆으로 다섯 걸음이나 휘청거리며 물러나야 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선 그가 안면 가득 미소를 그리며 감탄했다.
“대단하오! 대단하오! 정말 감복했소! 실례가 아니라면 귀하의 존함을 여쭈어도 괜찮겠소?”
“흥! 운이 좋았던 거지 대단하긴 뭐가 대단하다는 거냐?”
서요평이 불만 섞인 말을 내뱉었지만 더는 끼어들지 않았다. 아무리 그라고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동생 때문에 체면이 깎이지 않았고, 목숨도 잃지 않은 것이 아닌가?
진양도 얼른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후배, 양진양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금룡표국에서 두 선배님들을 뵌 적이 있지요. 그때 제가 사소한 사정이 있어 중년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께서 절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서운지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렇군! 그랬어! 혹시 양 소협께서는 유 낭자를 대신해 월야검법을 펼치지 않았소? 그러고 보니 그 붓도 바로 그때의 것이로군. 과연 양 소협의 무공은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오.”
“아닙니다. 선배님의 그런 과찬은 후배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하하! 양 소협은 겸손하기까지 하군. 한데 방금 보인 그 검법은 무엇이오? 마치 베는 듯했으나 찔러 들어왔고,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듯했으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소? 그런 훌륭한 검초는 지금껏 처음 보았소이다.”
“방금 제가 사용한 것은 화산파의 석 장문인께서 만드신 검초로 도영매화라 들었습니다. 다만 불초 후배가 그 초식이 너무나 훌륭하여 어줍게나마 흉내만 내보았을 뿐입니다.”
“도영매화라…… 과연 화산파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로군. 흉내를 낸 것이 이 정도라면 정말 무서운 검초일 것이오.”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진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방금 양진양…… 이라고 했나요?”
진양이 돌아보니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양이 포권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소, 소 낭자. 그간 무탈하셨소? 매 선배님은 안녕하신지요?”
그제야 여인도 진양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예전에 진양과 절벽 길에서 검을 겨룬 적이 있는 소담화였던 것이다.
그녀는 진양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그 곁에 유설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 것을 보자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이네요. 사부님은 잘 계세요.”
“한데 지금은 함께 있지 않으신가 보군요.”
“사부님과는 천상련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우리는 천상련에 조문을 가는 길이거든요.”
“그렇군요. 그런데 어쩌다가 여기 두 선배님과 무예를 겨루게 되셨소?”
소담화는 진양이 그들을 가리켜 ‘선배님’이라고 부르자 영 듣기가 거북했다. 때문에 쌀쌀맞은 눈초리로 사상이괴를 쏘아본 뒤 툭 던지듯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저 좀도둑들을 선배님이라고 부르는가요?”
그 말에 서운지는 멋쩍은 표정으로 너털웃음만 터뜨렸고, 서요평은 발끈해서 소리쳤다.
“저, 저 망할 계집을 봤나? 좀도둑이라니? 우리가 어째서 좀도둑이란 말이냐?”
“당신들이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내 검을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나요?”
“흥! 누가 그딴 고철 따위에 관심이나 둔다더냐?”
“그럼 어째서 고철 따위를 가져가려고 한 거죠?”
“글쎄, 그딴 고철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니까! 가져가려고 한 적 없다!”
그러자 소담화가 서운지 쪽을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그럼 그쪽이 말해보시죠? 정말로 내 검을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나요?”
이렇게 되자 진양을 비롯한 일행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이들 사이에 문제가 일어났다면, 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반드시 서요평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한데 그녀의 화살이 오히려 서운지에게 향했으니, 모두들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운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낭자, 그건 오해였소.”
“오해? 식사하는 동안 제 물건에 말도 없이 손을 댄 것이 사실인가요, 아닌가요? 그것부터 말씀해 주시죠?”
“허허, 그건 사실이오.”
“자! 이래도 오해인가요? 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좀도둑들!”
“뭐야? 이 멍청한 계집이! 난 그딴 고철엔 관심도 없다니까!”
“당신이 관심있든 없든 당신 동생이 훔쳐 갔으니 하는 말이죠!”
“내 동생도 훔쳐 가지 않았어! 손도 안 댔어!”
그러자 서운지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서 서요평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형님, 손은 댔수다.”
“이 멍청아! 그걸 왜 인정하느냐? 네가 정말 훔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딱 잡아떼면 될 것이지!”
“손을 댄 건 사실인데 어찌 거짓말을 합니까?”
“도대체 넌 융통성이 없구나!”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면서 진양이 주춤주춤 나섰다.
“저…… 두 선배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죄송하면 말을 하지 마라!”
“아, 예.”
진양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가자 서운지가 얼른 말했다.
“아니오. 말씀하시오, 양 소협.”
“그럼……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정말 소 낭자의 검을…… 그러니까…… 훔치려고 하신 건지요?”
“허허, 그건 정말 아니외다.”
“그럼 어째서…….”
서운지가 장탄식을 흘리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천상련에 조문을 가는 길이었소. 그러다가 객점에 들렀는데, 옆자리에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소? 한데 그녀의 검은 더욱 아름다워 보이더군. 검사로서 그 검을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의 검을 집어 들었소.”
“멍청아! 그러게 넌 매사에 너무 조심성이 없다는 거다! 넌 너만 좋다면 남도 좋게 생각할 줄 아는 게 탈이다!”
서요평이 불쑥 나서서 서운지를 호되게 나무랐다.
진양 일행은 그제야 사정이 어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소담화의 입장에서는 검을 훔치려는 좀도둑처럼 보였을 수도 있으리라.
‘매사를 지나치게 쉽고 편하게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로군.’
진양은 웃지 못할 이 사건을 두고 자신이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만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확실한 만큼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담화에게 말했다.
“소 낭자, 서 선배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닐 겁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쯤 되자 소담화도 아까의 기세를 한풀 꺾고 시선을 외면했다.
사실 그녀로서도 사상이괴와 싸우면서 뭔가 오해가 있었으리라 여긴 것이다. 이처럼 고명한 검술을 구사하는 두 고수가 한낱 자신의 검을 훔치는 질 낮은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 차에 진양이 나타나서 그들의 말에 무게를 실어주니 소담화로서도 더 이상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사상이괴를 한 번씩 더 쏘아보고 나서 냉랭하게 말했다.
“만약 이 자리에 우리 사부님이 계셨다면 당신들을 그냥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 운이 좋은 줄 아세요!”
“닥쳐라! 너야말로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네가 날 용서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널 용서하는 줄 알아라!”
“흥!”
“나도 흥이다!”
소담화는 입술을 질끈 씹으며 서요평을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때 서운지가 쭈뼛쭈뼛 나서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낭자, 죄송하지만 그 검을 한번 구경할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