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92
신필천하(神筆天下) 92화
매지향은 한편으로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가 됐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그녀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사상이괴 중 한 명인 서운지에게 독상을 입혔으니 자신의 명성은 입증한 바였다.
그녀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네놈은 내가 일 년 뒤에 죽이겠다고 약조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마. 이제 그 일 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사상이괴 녀석들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다음엔 결코 이러한 운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서요평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잠깐!”
“뭐지?”
“해독약을 내놓고 가야 할 것 아니냐?”
“해독약? 호호호! 그런 걸 줄 거라고 생각하셨나?”
“뭣이? 이 독한 년이!”
“그래도 안심해도 될걸. 앞으로 석 달 동안은 생명에 지장이 없을 테니. 물론 몸을 잘 다스린다면 반년은 살 수도 있을 테지만. 호호호!”
“반, 반년? 이익! 네 이년!”
서요평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하지만 진양이 얼른 그의 팔을 낚아채며 말렸다.
“지금은 안 됩니다, 선배님!”
“놔라! 내 아우가 죽게 생겼는데 뭐가 안 된단 말이냐?”
하지만 진양은 서요평을 놓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서요평이 매지향을 향해 달려든다면 틀림없이 개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다. 서운지와 서요평이 함께 싸운다면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겠지만, 그 혼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서요평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자신 혼자서는 매지향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이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다니 사리 판단이 제대로 서겠는가?
진양이 얼른 다그쳐 말했다.
“우선은 상처를 보살피시고 후에 계획을 세우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해독약이 없는데 무슨 수로 상처를 돌본단 말이냐?”
진양이 매지향을 보고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매 선배님, 오늘 일은 정말로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량을 베푸시어서 해독약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호호, 너는 늘 내게 해독약을 달라고 하는구나. 예전에도 그리 말하더니. 하나 내가 해독약을 준 적이 있더냐?”
진양은 착잡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매지향은 정인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해독약을 내놓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해 해독약을 내놓겠는가?
그때 서요평이 갑자기 무릎을 털썩 꿇었다.
“나 서요평,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소. 매 여협, 그대에게 이렇게 부탁드리겠소! 내 동생을 살릴 해독약을 제발 주시기 바라오!”
그의 행동은 모든 이를 놀라게 했다.
매지향 역시 서요평이 무릎까지 꿇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그녀는 곧 큰 목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사상이괴가 이 매지향에게 무릎을 꿇다니! 호호호! 좋아요. 내가 기분이 좋아졌으니 석 달 동안 생각해 보죠. 석 달 뒤에도 그쪽이 살아 있다면 그날 기분에 따라 해독약을 주든 말든 결정하죠. 단, 오늘 이 시간부로 날 조금이라도 귀찮게 한다면 절대로 해독약을 내놓지 않겠어요. 내 앞에 절대 나타나지 마세요.”
그녀의 말에 서요평은 현기증마저 느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선택의 길은 많지 않았다.
매지향의 말을 순순히 따르느냐, 힘으로 빼앗느냐.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있는 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서요평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신 말을 믿겠소. 우리는 앞으로 당신 앞에 석 달 동안 나타나지 않을 거요. 대신 그때가 되면 반드시 해독약을 주셔야 하오.”
“그때의 기분을 봐서요.”
“천하의 매 여협이 사상이괴를 상대로 비열하게 농락하진 않을 것이라 믿겠소!”
말을 마친 서요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운지를 등에 업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매지향은 그런 뒤에도 한참이나 통쾌한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양은 영 마음이 불편했지만 함부로 나설 수가 없는 자리였기에 가만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매지향은 진양을 한차례 쏘아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는 가지 않고 뭐하느냐? 너도 천상련으로 조문을 가는 길이더냐?”
“아닙니다. 후배는 천상련에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그럼 썩 물러가거라. 내 마음이 변해서 오늘이라도 당장 네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으니.”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흑표가 검 손잡이를 잡으며 한 걸음 나섰다.
하지만 진양이 곧 그를 제지하며 포권했다.
“알겠습니다. 매 선배님도 몸조심하십시오.”
“흥! 네깟 녀석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진양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걸어갔다.
소담화는 진양이 무사히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뒤늦게나마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매지향은 진양 일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휙 돌렸다.
“우리도 가자, 화야.”
“예, 사부님.”
소담화가 총총걸음으로 매지향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경공술을 이용해서 빠르게 길을 달렸는데, 대략 한 식경 정도가 지나자 천중산 입구로 들어섰다. 천상련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이미 많은 무인들이 줄을 지어 오르고 있었다.
매지향은 사람들의 이목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기에 소담화를 이끌고 길이 아닌 숲을 이용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다 보니 내력과 경공술이 뒤처지는 소담화가 몇 장 정도 떨어지게 됐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서 매지향이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소담화를 기다렸다. 소담화가 헐레벌떡 달려와 송구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사부님. 어서 가요.”
“아니다. 많이 지쳐 보이니 잠시 쉬었다가 가자.”
소담화가 매지향 옆에 나란히 앉으니, 마치 시커먼 바위 위에 선녀 두 명이 강림한 듯 주위가 환해졌다.
매지향이 소담화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까 너는 내게 거짓말을 했지?”
“사부님, 무, 무슨 말씀이세요?”
“솔직히 말해보아라. 네가 서운지에게 검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느냐?”
소담화는 매지향의 눈을 마주 보면서 이미 사부가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다고 짐작했다. 결국 그녀는 모기처럼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사실 제가 나중에는 그에게 검을 볼 수 있게 허락했어요.”
“그런데 왜 그 말을 하지 않았지?”
“그건…….”
소담화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러자 뜻밖에도 매지향이 소담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호호호, 나는 너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너는 너의 감정을 숨기고 허물을 덮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또한 사상이괴에 대한 감정이 마냥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을 테고. 내 말이 틀렸느냐?”
“맞아요, 사부님.”
“잘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남에게 너의 감정을 철저하게 숨겨가면서 살아야 한다. 감정은 먼저 드러내면 언제나 손해 보는 법이다. 또한 너의 허물을 감출 수 있을 때는 상대를 억울하게 만들어서라도 숨겨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이라는 것이다. 또한 쌓인 감정이 있을 때, 그 감정을 풀어낼 기회가 우연히라도 찾아오거든 솔직하게 대응해라. 대의니 신의니 의리니 하는 것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허울뿐이니라. 너는 언제나 너만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허울보다는 늘 실체를 좇아라.”
“네, 사부님.”
소담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차례 혼날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로서는 오히려 사부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매지향은 소담화가 즉각 대답하며 수긍하자 흐뭇한 표정으로 제자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착하구나. 세상에서 가장 부질없는 것이 감정 소모란다. 앞으로 너는 그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고, 숨기고, 외면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무시하지 않는다. 강산이 변하는데 십 년의 세월이 걸린다지만, 사람이 변하는 데는 한순간의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다. 잊지 말거라.”
“명심할게요, 사부님.”
매지향은 소담화를 대견한 듯 바라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자, 쉬었으면 이제 가보자꾸나.”
“네, 사부님!”
두 사람은 다시 가벼운 몸놀림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6. 추억과 재회하다
진양 일행은 매지향과 달리 줄곧 너른 관도를 이용해서 길을 걸었다.
그들이 대별산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수많은 무인들이 천상련을 향해 조문을 가느라 계속 마주치게 됐다.
하지만 무인들 대부분은 진양과 유설, 그리고 흑표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천중산에서 대별산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진양 일행은 객점에 하룻밤을 묵은 뒤에 다시 출발했다.
대별산 산 아래턱에 다다르자 지나치는 무인의 수도 뜸해졌다. 대신 진양의 가슴은 묘한 기대와 설렘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대별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다다르자 옛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동시에 이 근처 어딘가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몇 해 전 관주님의 손을 잡고 이 길을 따라 천상련으로 가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유수와 같구나.’
진양은 새삼 감회에 젖어 주위 풍광을 바라보았다.
그때 흑표가 진양의 곁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양 형, 언제까지 붙여둘 거요?”
그 목소리가 지극히 조용했지만 진양 바로 곁에 있던 유설에게는 들렸다.
그녀는 흑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붙여두다뇨? 무슨 말씀이세요?”
이에 흑표는 주위의 귀를 의식하기라도 하는 듯 좌우로 눈짓을 하더니 말하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양은 이미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역시 눈치채고 계셨군요.”
“어젯밤부터 느꼈소. 누군지 아시겠소?”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호의를 가졌는지 적의를 가졌는지도 잘 모르겠군요.”
그제야 유설은 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있었다.
‘뒤쫓는 자가 있는 거구나. 왜 우리를 미행하는 거지?’
유설의 말대로 진양과 흑표는 자신들을 뒤쫓는 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다만 이 두 사람에 비해 오감이 떨어지는 유설은 미행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흑표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도 모르고 학립관까지 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소?”
“하긴 그렇겠지요?”
“어쩌시겠소?”
진양은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턱을 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그가 돌연 몸을 돌리고는 걸어온 방향으로 서너 걸음 되돌아갔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말했다.
“귀하들은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소제에게 용무가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 주셨으면 좋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