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93
신필천하(神筆天下) 93화
몹시 담담하고 온화한 말투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묵직하고도 묘한 울림이 있어 숲속의 새들이 놀라서 후드득 날아올랐다.
그런 뒤 얼마나 정적이 감돌았을까?
사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진양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만약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그쪽으로 가겠소!”
이번에는 조금 더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산중 하늘에 메아리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그때 숲 한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본 유설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사상이괴! 아, 아니, 사상이협이 아니세요?”
숲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온 사람은 바로 사상이괴였던 것이다.
서요평은 서운지의 팔을 어깨에 메고 부축해 주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너무 서글퍼 보여서 보는 이도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일행으로서는 그처럼 고집 세고 말도 통하지 않던 서요평이 저리도 불쌍하게 보인 것이 처음이다.
서요평이 진양에게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들켰나? 하지만 만약 내 동생이 멀쩡했다면 자네에게 들키지 않았을 거야. 동생이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나 혼자 인기척을 죽여가며 미행하는 바람에 들킨 거야.”
진양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이지요. 두 선배님이 평소와 다름없었다면 불초 후배가 어찌 눈치를 챌 수 있었겠습니까?”
그제야 서요평은 조금 기가 살았는지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진양이 물었다.
“두 선배님은 어째서 저희를 따라오신 겁니까?”
“흥! 우린 따라간 것이 아니야. 우리가 가는 길 앞에 너희가 갈 뿐이지!”
서요평이 발끈하면서 부정하고 나섰지만, 이미 앞서 스스로 말했던 내용과 완전히 모순되기에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진양은 내색하지 않고 길을 옆으로 비켜섰다.
“그럼 먼저 가시지요. 저희가 선배님의 길을 막아서 불편하셨겠군요.”
그러자 서요평은 잠시 당황하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다! 우린 먼저 가지 않겠다!”
“왜 그러시는지요?”
“흥! 나에 대해서 모르느냐? 나는 부정심공을 익혔다! 그러니 네 말대로 하지 않겠어! 반대로 행동할 테다!”
“그럼 뒤에서 저희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아니다! 아, 아니, 그렇다! 아니지…….”
서요평은 순간 머리를 벅벅 긁더니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처량한 표정으로 진양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이런 말 하면 절대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물론 자네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겠지만.”
“뭔지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문제라면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가? 정말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에이, 아니지. 자네는 들어주지 않을게 분명해. 그러니까 나는 말하지 않겠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말하지 않아.”
그때 서요평에게 부축받고 있던 서운지가 힘겹게 머리를 들고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매지향의 독기가 전신에 퍼지고 있는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부르터 있었다.
“양 소협, 우리 형제가 양 소협과 한동안 함께 지냈으면 하오. 대신 우리는 결코 양 소협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최대한 돕도록 하겠소.”
진양은 뜻밖의 제안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원래 그는 이들이 매지향에게 해독약을 얻어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진양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솔직히 답변할 생각이었다.
한데 갑자기 함께 지내고 싶다니?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저와 함께 지내고 싶다는 겁니까?”
“별뜻은 없으니 오해는 마시오. 우린 그저 훗날 매지향을 만나기 위해서요.”
그제야 진양이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사상이괴 중 한 명인 서운지가 깊은 부상을 당했으니 앞으로 서요평은 강호를 활보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한데 한곳에 정착하지도 않는 매지향의 행로를 어찌 일일이 쫓을 수 있겠는가?
물론 마음먹고 그녀만 쫓아다닌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게다. 하지만 부상당한 서운지를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서운지를 홀로 놔둘 수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매지향은 절대로 석 달 동안 자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으니 그녀의 행로를 알아가는 도중에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곤란했다.
결국 사상이괴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진양과 함께 지내기로 한 것이다.
매지향과 진양이 과거에 일 년을 두고 기약을 했다고 하니 진양 곁에만 붙어 있어도 매지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서요평이 목소리를 쥐어짜듯 물었다.
“듣자 하니 양 소협과 매지향은 서로 기약을 한 듯한데, 그때가 언제요?”
“앞으로 넉 달하고도 보름 정도가 남았습니다.”
서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그 정도라면 버틸 수 있을 거요. 그녀 말에 의하면 내공을 잘 운기할 경우 반년까지도 버틸 거라고 했으니, 그 부분은 오로지 내게 달린 문제겠구려. 물론 양 소협이 함께 지내겠다고 허락만 해준다면 말이오.”
서운지는 말을 꺼내면서도 서요평과 달리 크게 불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서요평은 매사에 부정적이어서 진양이 반드시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서운지는 그와 반대로 언제나 긍정적이었기에 진양이 분명 승낙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양으로서는 사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혼자만을 생각할 수는 없는 몸이 되었기에 유설과 흑표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유설은 흔쾌히 동의했고, 흑표는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는 투였다.
결국 진양이 기분 좋게 승낙했다.
“두 분의 뜻이 그렇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약속을 해주셔야겠습니다.”
“흥! 역시 뭔가 바라는 게 있군.”
서요평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자 진양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싫으신가요?”
“누가 싫다고 했더냐? 바라는 게 뭐냐?”
“저와 함께 지내시면서 제가 하는 말을 무조건 들어주십시오.”
“뭐야? 우리보고 네 수하라도 되란 말이냐?”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정중히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맹세코 두 선배님께 실례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흥! 네가 뭘 시킬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들어달라고? 만약 네가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한단 말이냐? 일없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두 선배님께 부탁을 하게 되면 서운지 선배님이 그것을 들어줄지 말지 결정하는 겁니다. 서운지 선배님이 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하면 저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흥! 너는 날 바보로 아느냐? 내 동생은 매사에 희희낙락한 성격이어서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려고 할 것이다! 결국 네가 부탁하는 것은 뭐든지 다 들어주려고 할걸?”
“하지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두 선배님께 자결을 부탁한다면 아무리 서운지 선배님이라도 거절하지 않겠습니까?”
“거야…… 당연한 거지만…….”
“아까 말씀하셨지요? 제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도움을 주겠다고요.”
그러자 서운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양 소협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가급적 따르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쯤 되자 고집을 부리던 서요평도 어쩔 수 없이 바닥의 자갈돌을 걷어차며 투덜댔다.
“에잇!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네놈의 말을 받아들이지만, 내 동생이 다 낫고 나면 혼쭐을 내줄 줄 알아라!”
진양은 빙긋 웃었다.
“그럼 두 분과 저의 문제는 끝났군요.”
그러더니 진양은 허공을 향해 다시 내공을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나오시지요!”
그의 말에 흑표를 제외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요평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이미 나왔는데 뭘 또 나오란 말이냐?”
“제가 부른 사람은 사실 두 선배님이 아니었습니다.”
“뭣?”
서요평이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데, 마침 근방의 숲속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새 떼처럼 날아오르더니 진양 앞쪽으로 떨어졌다.
유설은 물론 사상이괴도 깜짝 놀라 입을 척 벌린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흑의를 걸친 무인들이었는데, 허리춤에는 두 자 정도 되는 길이에 너비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일정한 검을 차고 있었다.
애초에 흑표가 미행이 붙은 것을 진양에게 이야기할 때는 이들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물론 진양과 흑표는 사상이괴가 따라붙는 것도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미 상대의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사상이괴는 오로지 인기척을 죽이고 미행하는 데만 전념했기 때문에 자신들 뒤에 또 다른 미행자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진양이 그들을 둘러보니 흑의인들은 모두 스물한 명으로 조직되어 있는 듯했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뒤로 도열한 흑의인들보다 두어 걸음 나와서 서 있었다.
진양이 한 걸음 내딛고는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귀하들께선 어디서 오신 고인이신지요? 소제에게 용무가 있다면 말씀하시지요.”
그러자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취했다. 그와 동시에 뒤로 도열해 있던 스무 명의 흑의인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저희는 천상련에서 파견된 귀영대(鬼影隊)입니다. 저는 귀영대주 비연리(費延里)라고 합니다. 양 은공께 인사를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양을 비롯한 일행은 흑의인들이 뜻밖에도 깍듯하게 나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특히 진양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예가 지나치십니다. 어서 일어들 나십시오.”
그제야 귀영대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한데 천상련에 귀영대가 있었는지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군요.”
“아, 귀영대는 풍천익 련주님께서 이번에 새로 만든 조직입니다.”
“그렇군요. 한데 무슨 일로 저를 따라오셨는지…….”
“저희의 주 임무는 양 은공을 은밀히 뒤따르며 호위하는 것입니다.”
진양은 이들이 자신을 ‘은공’이라고 부를 때부터 이런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더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천상련의 지나친 배려가 그로서는 부담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천상련을 위해 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풍 련주님께서는 저를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십시오. 저는 호위가 필요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비연리가 다시 무릎을 털썩 꿇었다. 물론 그 뒤에 서 있던 귀영대 모두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양 은공께서는 저희를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만약 이대로 귀영대가 돌아간다면 련주님께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