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94
신필천하(神筆天下) 94화
진양은 비연리가 과장해서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풍천익의 성품을 따져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때 서운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역시 양 소협은 인덕이 많아 사람들이 따르는군요. 저들이 스스로 양 소협을 따르겠다는데 굳이 내칠 필요가 있겠소?”
하지만 서요평은 콧방귀를 뀌며 서운지를 질책했다.
“너는 생각이 없는 놈이구나! 저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인지 적의를 가졌는지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냐?”
“거참, 형님도. 저들은 오로지 양 소협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데 우리를 신경이나 쓰겠소?”
“멍청아! 네놈이 다 나으면 나는 너와 함께 저 양씨 놈을 혼내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저들은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 아니겠소?”
“미리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 아니냐?”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흑표가 진양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적어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것 같으니 굳이 내칠 필요는 없지 않겠소?”
“그래요. 도움을 받을 사람이 많은 건 좋지 않겠어요?”
유설까지 나서서 말하자 진양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결국 진양이 비연리를 향해 말했다.
“좋소. 하지만 귀영대는 내가 따로 신호를 보내지 않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오.”
“알겠습니다! 언제든 귀영대가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그리고 불편하겠지만 평소에는 지금처럼 은신해서 지내주시길 바라오. 혹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불편하지 않게 말이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비연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귀영대는 그야말로 귀신처럼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들의 신속한 모습에 진양 일행은 내심 경탄을 금치 못했다.
진양 일행은 다시 길을 걸어 학립관으로 향했다. 사상이괴는 진양으로부터 대여섯 보 떨어져서 걸어왔다. 진양이 나란히 함께 걷자고 권했지만, 서요평이 한사코 거절했기에 일행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유인 즉, 서운지의 독기가 진양 일행에게도 옮길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서운지는 독기가 일행에게 옮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서요평이 더욱 조심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마치 기죽은 강아지마냥 일행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유설은 길을 걷는 동안 학립관이 어떤 곳인지 물었고, 진양은 시종 푸근한 미소로 세세히 답변을 해주었다.
“학립관은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주로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는 곳이라오. 물론 무예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몸이 튼튼해야 정신도 맑아진다는 관주님의 뜻이라오. 무인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아니지요.”
“그럼 학립관 출신의 무인은 당신이 처음이겠군요?”
진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학립관에는 다양한 아이들이 모이기 때문에 무예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도 간혹 있소. 그런 아이들은 가까운 문파나 무관에서 데려가기도 했소.”
“들을수록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
“왜 그렇게 궁금하시오?”
“거야 당연히…….”
유설은 문득 얼굴을 붉히더니 뒷말을 조심스레 흘렸다.
“당신이 어렸을 때 어떤 걸 보고 누구와 함께 지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자 진양도 괜히 부끄러워져 헛기침을 뱉으며 먼 산을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진양 일행은 어느덧 학립관 정문에 다다랐다.
진양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말했다.
“바로 이곳이오.”
유설은 자그마한 정문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중의 크지 않은 건물이기 때문인지 정문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양 일행이 정문 안으로 성큼 들어서자, 마침 마당을 쓸고 있던 동자 한 명이 달려오며 공손히 절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찾아오신 손님이신지요?”
진양은 그 동자를 보고 있자니 수년 전의 자신 모습이 생각나서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했다.
“성 관주님을 뵈러 왔다. 관주님은 안에 계시느냐?”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동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바라보자, 아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물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라고 말씀을 드리면 될까요?”
진양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도 어렸을 적 학립관에서 손님을 받을 때면 늘 이런 식으로 되묻곤 했던 것이다.
진양이 동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제자 양진양이 찾아왔다고 말씀드리면 아실 것이다.”
“알겠습니다.”
동자는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진양 일행은 감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는 아담한 마당을 둘러보았다. 진양은 어렸을 때 그 감나무 아래에서 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항상 자기편을 들어주던 단지겸과 친구들을 생각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지겸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여전히 이곳에 있을까? 그러고 보니 여동추와는 줄곧 싸우기만 했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한걸.’
학립관에서 지낸 마지막 날 단지겸과 여동추와 마찰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 두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건물 모퉁이를 돌아 그림자 하나가 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머리가 희끗하고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잔주름으로 자잘하게 나 있는 사람이었는데, 진양이 자세히 보니 그는 다름 아닌 학립관의 관주이자 사부인 성조영이었다.
진양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사부님!”
“오오, 양아! 네가 정말 양진양이란 말이더냐? 훌륭하게 컸구나! 훌륭하게 컸어!”
성조영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진양을 한 품에 안았다. 키로 보나 덩치로 보나 이제는 성조영보다 진양이 훨씬 컸지만, 진양은 그의 품이 아버지의 그것처럼이나 푸근하게 느껴졌다.
진양이 얼른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사부님!”
인사를 건네는 진양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가득 젖어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유설도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성조영 역시 굵은 눈물 줄기를 흘리며 진양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냐, 오냐. 나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다. 너야말로 고생이 많았겠구나. 양이 네가 정말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다니, 내 두 눈으로 보고도 꿈인 것만 같구나!”
진양은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가 성조영을 가만히 바라보니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은 것이 실제 나이보다도 훨씬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 앞에서 연로해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저 눈물만 주룩주룩 흘릴 뿐이었다.
성조영은 진양의 뒤에 서 있는 일행을 보고는 물었다.
“양아, 같이 오신 분들이냐?”
“아, 네. 제 일행입니다.”
그러자 성조영은 진양이 소개를 시키기도 전에 다가가 공손히 예를 차리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학립관을 맡고 있는 성 아무개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모두 저를 따라오시지요.”
성조영은 진양과 그 일행을 데리고 객당으로 향했다.
성조영과 진양 일행은 객당의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다만 사상이괴는 몸이 불편한 관계로 다른 방으로 안내해 쉬도록 했다.
진양에게 있어서 성조영은 마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비록 자신을 천상련에 보내긴 했지만, 학립관을 지켜야 하는 성조영의 입장을 이제는 진양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성조영은 진양을 대하는 내내 안면 가득 미소만 지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진양은 그의 안색이 썩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진양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사부님, 혹시 근심거리라도 있으신지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다. 아무 일도 없다.”
성조영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지만, 진양은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작정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 역시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진양은 말을 돌렸다.
“혹시 지겸이는 어찌 지내는지 아시는지요?”
“허허, 알다 뿐이겠느냐? 지겸이는 지금 학립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단다.”
진양이 반색하며 물었다.
“아이들을요? 하하! 그럼 지금 만나볼 수 있겠군요?”
“원, 녀석도. 뭐가 그리 급한 것이냐? 나를 만난 것보다도 훨씬 기뻐 보이는구나.”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곳을 떠올릴 때마다 사부님 생각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는 날 사부님의 슬픈 표정을 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성조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구나. 또한 후회도 된다. 천상련에서 널 원했을 때, 너를 다시 돌려보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한데…….”
성조영이 다시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자, 진양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사부님.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역시 저도 이해합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부님을 원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너는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그 선한 심성은 여전하구나.”
“그런가요?”
진양이 멋쩍게 웃자 성조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래. 한데 천상련에서는 무슨 일을 했느냐? 뭐가 그리 바빴기에 이 사부에게 답신 한번 보내지 않았더냐?”
“답신이라니요?”
“음? 내 서신을 받아보지 못했느냐?”
진양은 성조영이 서신을 보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었다.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되물었다.
“아니오. 제가 천상련에서 지내는 동안 제게 온 서신은 없었습니다.”
“그런…….”
성조영은 흠칫 놀라다가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숨만 내쉬었다.
“하긴 네게 답장이 없을 때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은 했건만,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었기에 네게 내 서신조차 전하지 않았단 말이냐? 나는 작년까지 너에게 매달 서신을 한 통씩 보냈단다.”
“그랬군요. 제가 하는 일이 워낙 비밀스러워 아무도 서신을 주고받지 못하게 한 듯합니다. 저는 그동안 천보각에서 각종 무공서를 필사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런 일이었구나. 그래서 그때 천보각주가 내게 그런 말을 했었군. 참, 그러고 보니 이제는 련주가 되셨다지?”
“예. 얼마 전 냉 련주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쯧쯧. 어쩌다가 그리되었던고. 아니지. 내가 무림의 일에 개입할 처지가 아니지. 앞으로 이 이야기는 그만두도록 하자. 강호의 이야기라면 별로 관심을 두고 싶지 않구나.”
“예, 사부님.”
진양이 공손히 대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성조영은 다시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참, 지겸이는 지금 아랫마을에 잠시 볼일을 보러 내려갔단다. 돌아올 시간이 되었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게다.”
말을 마친 성조영은 유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너무 우리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관주님. 두 분이서 나누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걸요. 듣던 대로 훌륭한 분인 것 같아요.”
“허허, 낭자께 그런 칭찬을 들으니 이 나이에 부끄럽기만 하구려.”
성조영은 흑표에게도 미안한 뜻을 전했지만, 흑표 역시 워낙 말수가 없는 사람이라 개의치 않았다.
성조영은 두 사람에게도 이것저것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런데 조금 있자니 대청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대청 문이 활짝 열리면서 누군가 불쑥 들어왔다.
“사부님! 양이가 왔다면서요?”
진양은 흠칫거리고는 상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피부가 희멀겋고 깡마른 체구의 사내는 영락없는 샌님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