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95
신필천하(神筆天下) 95화
7. 격세지감(隔世之感)
진양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어렸을 때의 단지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었다.
순간 장난기가 솟구친 진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하며 말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단 선생님.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많이 힘드시지요?”
단지겸은 갑자기 낯선 상대가 포권하며 말하자, 그제야 자신이 무례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허리 굽혀 인사했다.
“아, 제가 손님이 와 계신 줄도 모르고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저 역시 단 선생님을 뵙고 싶은 차였습니다.”
“저를요? 왜……?”
단지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잠깐 진양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얼굴 가득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양? 자네…… 정말 진양인가?”
“반갑네.”
진양이 빙긋 웃어 보이자, 단지겸의 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굵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가 진양을 두 팔 벌려 와락 껴안았다.
“오랜만일세! 정말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찌 지냈는가, 이 친구야?”
“덕분에 잘 지냈네. 자네가 아직까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하하! 나야 비천한 재주로 어디 갈 곳이나 있겠는가? 사부님이 마음이 넓으셔서 날 거둬주신 것이지.”
“하하하! 역시 단 선생님은 겸손하기까지 하군요.”
진양이 장난치듯 말하자, 단지겸이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두 사람은 양손을 맞잡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조영이 자리에 앉도록 권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탁자에 앉았다.
“자네 정말 많이 변했군. 예전에는 약골이었는데, 이렇게 기골이 장대해졌을 줄이야. 처음에는 전혀 몰라봤다네.”
“하하, 자네가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자네는 지금도 약골인 것 같으니까.”
“이런, 첫 만남부터 신경전인가?”
유설은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진양이 이처럼 허물없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겸은 유설과 흑표를 의식하고는 뒤늦게 물었다.
“이분들은……?”
진양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유설과 흑표를 소개했다.
단지겸은 그들과도 살갑게 인사를 나눈 후 이것저것 물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하하, 유 낭자와 같이 아름다우신 분이 이 친구와 맺어진다면 그야말로 선남선녀의 만남이겠군요.”
단지겸의 말에 유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한참 웃음꽃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단지겸이 문득 잊은 것이 생각난 듯 성조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부님, 동추 녀석 왔습니까?”
“아니. 오늘은 아직이구나.”
성조영이 고개를 저었다.
진양은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끼어들었다.
“동추? 동추라면 혹시 그 여동추를 말하는 건가?”
단지겸도 진양이 누굴 가리키는지 눈치채고 대답했다.
“그 여동추 말고 또 누가 있겠나?”
한데 대답하는 그의 말투가 지금까지와 달리 시큰둥하고 까칠하게 느껴졌다. 단지겸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곧 부드럽게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하네. 자네에게 화를 낸 것은 아닐세.”
“흠. 여동추는 지금 어찌 지내는가?”
진양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질문을 꺼내자, 단지겸은 또 인상이 굳었다.
“너무 잘 지내서 탈이지.”
“음? 그럼 여동추도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건가? 하하! 자네, 여전히 여동추와는 사이가 안 좋은가 보군? 동추가 아직까지 이곳에 남았다면 틀림없이 무예를 가르치고 있겠는데?”
그러자 단지겸이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발끈해서 소리쳤다.
“당치도 않는 소리 하지도 말게! 여동추가 여기서 아이들에게 무예를 가르친다고? 그건 아이들 미래를 망치는 일이지! 그딴 비열한 녀석은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없네!”
진양은 단지겸이 이처럼 화를 내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단지겸이 딱 부러진 데가 있긴 했지만, 여동추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분명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리라.
그때 성조영이 짐짓 엄한 어조로 단지겸을 나무랐다.
“어허, 겸아, 손님들 계신데 그 무슨 무례한 말투냐? 양이는 그저 동추의 소식이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그렇게까지 열을 올릴 필요가 있느냐?”
“죄송합니다, 사부님. 자네에게도 미안하네.”
단지겸이 다시 정중히 사과를 하자, 진양도 그제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물어보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동추가 또 말썽을 부리나 보군.”
“말썽 정도가 아닐세. 그 녀석 때문에 이 학립관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네.”
“뭐라고?”
진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에게 있어서 학립관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단지 어렸을 때 다녔던 학당과는 다른 의미였다.
진양에게 학립관은 고향의 집과 같은 곳이고, 추억이 잠들어있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는 지금껏 학립관이 없어질 것이라곤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단지겸의 말에 몹시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학립관이 없어질 거라니?”
그러자 성조영이 다시 단지겸을 나무랐다.
“겸아, 어찌 오랜만에 만난 양이에게 그런 말을 해서 마음을 쓰게 하느냐?”
“사부님, 이건 사실 진양도 알아야 합니다. 나중에 정말 학립관이 없어지고 나서 이 친구에게 알리면 그건 더 큰 충격일 겁니다.”
단지겸이 강한 어조로 말하자, 성조영도 대꾸할 말이 없는지 씁쓸한 표정으로 장탄식을 흘렸다.
진양이 단지겸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도대체 어찌 된 것인가?”
“이 모든 게 바로 그 여동추 녀석 때문일세!”
“여동추가 왜?”
단지겸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려쳤다.
그는 한참 동안 씨근대더니 차츰 분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동추가 학립관을 떠난 것은 삼 년 전이었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한 여동추는 원래 글보다는 무예에 재주가 많았는데, 삼 년 전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관의 관주가 학립관을 방문했다가 여동추를 눈여겨보게 된 것이다.
“여동추라는 아이가 제법 재능이 있어 보이니 제가 데려가서 무예를 가르쳐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우리 무적관(無敵館)은 이제 막 개관했지만, 자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어 앞으로 당하(唐河)현에서는 제법 명성을 드높일 수 있을 겁니다. 성 관주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 아이를 우리에게 맡겨보심이 어떨는지요?”
“장 관주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데 저 아이는 부모가 없어서…….”
“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에게 돈을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우린 그저 인재를 모으려는 것입니다.”
무적관의 관주인 장도식(張蹈植)의 말에 성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동추를 불러 물어보지요. 무엇보다 그 아이의 의견이 중요하니까요. 동추도 이제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결정할 나이가 됐으니 그 아이가 받아들인다면 저로서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성 관주.”
그날 무관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여동추는 일말의 재고도 없이 학립관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삼 년이 흐른 지금, 장도식의 말대로 무적관은 당하현에서 가장 유명한 무관이 되었다.
한데 약 일 년여 전부터 무적관은 학립관에 찾아와서 줄곧 아이들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처음 성조영은 훌륭하게 자란 여동추를 보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아이들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조영은 무적관이 아이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강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훈련입니까?”
이야기를 듣던 진양이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그는 두 주먹을 꾹 말아 쥐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분노를 느끼는 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학립관 출신인 그에게 있어서 이곳의 아이들은 친 아우와 같은 느낌이었다.
성조영이 깊은 한숨을 내쉴 때, 단지겸이 끼어들며 대답했다.
“무적관은 아이들을 서로 겨루게 해서 서열을 나누는가 하면, 암살 훈련을 시키는 것도 서슴지 않았네. 무예를 겨룰 때도 상처를 입기 전에 패배를 시인하는 아이에겐 가혹하게 매질을 했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루에 두 시진만 자면서 무공 수련만 했다는군. 게다가 훈련 성과를 보고 하위 일 할에 포함되는 아이들은 그날 저녁을 굶겼다는군.”
“그런 일이!”
진양이 더는 참지 못하고 탁자를 쾅 내려쳤다.
한데 단지겸이 내려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탁자가 진양이 내려치니 단숨에 ‘콰직!’ 소리를 내며 귀퉁이가 부서져 나갔다.
성조영과 단지겸이 깜짝 놀라서 진양을 보고 물었다.
“자네, 손은 괜찮은가?”
“아, 나는 괜찮네. 계속 이야기해 주게.”
“그 뒤로 사부님은 무적관에 더 이상 아이들을 보낼 수 없으며, 이미 보낸 아이들도 다시 데려오겠다고 말씀하셨네. 그런데…….”
“그런데?”
“무적관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딱 잡아뗐지. 오히려 무적관은 지난 육개월 동안 데려간 아이들을 인질 삼아 협박을 해왔네.”
“협박이라니? 어떻게?”
“만약 학립관에서 아이들을 더 보내주지 않는다면 학립관에서 데려온 아이들을 모두 암살대로 파견하겠다는군.”
“뭐라?”
진양은 당장에라도 무적관을 찾아갈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라서 말했다.
“도대체 그 무적관이라는 곳은 뭐하는 곳이기에 암살대가 있다는 것을 그리 떳떳하게도 떠벌린단 말인가?”
“무적관의 배후에는 상남(商南)현에 있는 한 문파가 버티고 있네. 아마도 무적관에서 조직된 암살대는 그 문파로 보내지는 모양이야.”
“상남현이라면 섬서 지역이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하남의 이곳에선 가장 가까운 곳이지.”
“그 문파 이름이 뭐라던가?”
“내가 말한다고 자네가 알겠는가?”
무공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단지겸은 진양이 튼튼하게 성장했다고는 생각했지만, 무공을 익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때문에 진양 역시 강호의 문파들에 대해서는 무지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진양이 대꾸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해보게나.”
“섬서에서 제법 유명한 모양이더군. 철혈문이라고 하던데…… 아마도 사파인 듯했네.”
“철혈문?”
“그렇다네. 자네, 알고 있는가?”
“일전에 철혈문의 제자를 한 명 만나본 적이 있지.”
“그랬군. 그럼 자네도 좀 알겠군. 그 문파는 사파인 모양이야.”
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금룡표국에서 연회를 베풀 때 지승악이 사파를 두둔하며 나섰던 것이 기억났다. 청성파의 장로를 상대로도 기가 죽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아마도 사파에서 꽤나 권세가 막강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진양이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그 후에는 어떻게 됐나?”
“어쩌긴 어쩌겠는가? 아이들을 인질 삼아 협박을 해오는데…….”
무적관을 몸소 찾아갔던 성조영은 장도식의 협박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탁자를 쾅 내려치며 일어섰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도대체 아이들을 어찌 생각하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자 장도식이 입꼬리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성 관주, 당신은 아이들을 어찌 생각하고 그러오?”
“무슨 소리요?”
“당신 역시 아이들을 이용해 먹기 위해 거둔 것이 아니오?”
“이용해 먹는다니? 나는 그저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을 뿐이다? 보시오, 관주. 세상에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시오? 솔직히 말해보시오. 당신, 아이들을 팔아넘기면서 얼마나 받았소? 학립관을 유지하는 비용은 땅을 파서 생기는 돈이오?”
성조영이 더는 참지 못하고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