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97
신필천하(神筆天下) 97화
8. 불청객
여동추는 낯선 청년이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모로 꼬며 물었다.
“나를 아시는가?”
“알지. 알다마다.”
“누구지?”
“날세. 양진양.”
진양의 대답에 여동추는 한참 기억을 더듬어보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난 또 누구라고. 자네 많이 컸구만. 어렸을 땐 정말 작았는데.”
“다행히 기억하는군.”
“자네처럼 비리비리한 약골도 없었는데, 당연히 기억하지.”
“하하, 그런가?”
“그런데 자네가 여긴 어쩐 일로?”
“사부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러 왔네. 그러는 자네는 어쩐 일인가?”
“나는 성 관주께 볼일이 있어서 왔네.”
진양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가 여동추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 말투가 사부님께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음?”
순간 여동추가 눈썹을 성큼 추켜올리며 진양을 노려보았다.
“지금 나한테 한 소린가?”
“그렇다네.”
진양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하자, 여동추는 가만히 서 있다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 자네는 여전하군.”
여동추는 그러고도 한참 웃더니 어느 순간 뚝 멈추고 말했다.
“요즘도 다른 곳에서 많이 맞고 다니나?”
진양이 빙그레 웃었다.
“그것도 부정 못하겠군.”
여동추가 피식 비웃었다.
“그럴 줄 알았네. 후후.”
“어쨌거나 사부님께 대충의 이야기는 들었네. 한데 앞으로는 이곳으로 찾아오지 말게. 학립관은 더 이상 무적관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을 것일세.”
“뭐? 자네가 지금 뭔가 착각하나 본데…… 그렇게 되면 이미 무적관에 들어온 아이들이…….”
“물론 이미 무적관으로 보내진 아이들도 모두 데려올 생각이네. 아니, 그 전에 자네가 먼저 그 아이들을 이곳으로 안전하게 데려와 줬으면 하네. 그게 서로 가장 편한 방법일 테니까.”
여동추는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진양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여동추의 뒤에 잠자코 서 있던 무인 중 한 명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진양 앞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네놈은 누군데 감히 여 조장님께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냐?”
진양이 그를 힐끔 보니, 나이는 여동추보다 한두 살이 더 많아 보였다. 여동추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방혁(方赫), 그만 물러나 있어라.”
“예, 조장님.”
방혁이라 불린 사내가 깍듯이 인사하며 물러나자, 여동추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네. 내 수하들이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서 말이야. 아, 소개가 늦었군. 이 친구는 부조장 방혁이라고 하네. 그리고 함께 온 다른 녀석들은 내가 이끄는 괴멸조(壞滅組) 애들일세.”
“그렇군. 미안할 것 없네. 오히려 듬직해 보여서 보기가 좋네.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 호위를 잘하겠군. 저 친구들을 시키면 좋겠어.”
그러자 물러나던 방혁은 물론 다른 괴멸조의 무인들도 저마다 검을 뽑아 들며 성큼 나섰다.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자, 지금껏 멀찍이서 지켜만 보던 서요평이 욕지기를 뱉으며 다가왔다.
“니미럴! 염병하고 자빠졌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네놈들은 상관의 친구한테 주둥아리라고 나불거려도 되는 게냐? 그 주둥아리야말로 말라비틀어진 주둥아리구나!”
괴멸조 무인들이 내심 발끈하며 서요평을 노려보았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들 역시 앞서 서요평이 스스로를 가리켜 사상이괴라고 했던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진양이 손을 들어 서요평을 제지하고 나섰다.
“선배님, 저는 괜찮으니 들어가서 쉬시지요.”
“흥! 이깟 놈들은 혼뜨검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린다!
“선배님, 그만 물러나 계셔도 됩니다.”
진양이 다시 한번 서요평을 돌아보며 말했다. 말투는 나긋나긋했지만, 서요평은 그것이 절반은 강압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눈치챘다.
물론 천하의 서요평이 진양의 강압을 못 이겨 물러날 리야 있겠는가?
하지만 이미 약조한 바도 있고, 동생 서운지의 상황도 좋지 않은 만큼 고분고분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쳇!”
서요평이 혀를 차고는 돌아가 버리자, 여동추를 비롯한 괴멸조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사상이괴 중 서요평이라는 자는 분명히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데 그런 서요평이 고분고분 진양의 말을 듣는다?
그것도 마치 명령에 따르는 부하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여동추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생각에 잠겼다.
‘가만. 그러고 보니 사상이괴라면 두 명이어야 할 텐데 어째서 한 명만 있는 거지?’
그러는 사이 방혁이 검을 ‘스르릉!’ 뽑아 들더니 성큼 나섰다.
“조장님, 저희가 저 친구분께 무례를 좀 저질러도 괜찮겠습니까?”
여동추가 어깨를 으쓱이며 진양에게 말했다.
“이런, 이런. 내 수하들이 화가 잔뜩 난 모양일세.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면 내가 이 애들을 말릴 수가 있네. 하지만 자네가 자꾸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면 더 이상 나 역시 말릴 수가 없어. 그만 물러나게. 나는 성 관주와 대화하고 싶네.”
진양도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흥! 네놈의 그 싸가지 없는 말투부터 고쳐라!”
“뭐야?”
순간 여동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원래 진양은 어려서부터 불의에 굴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처럼 무모하게 맞대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다만 교묘하게 돌려서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야말로 맞불을 놓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상황이 점점 흉흉해지자 지켜보다 못한 성조영이 나서서 말렸다.
“양아, 그만하면 됐다. 내가 이야기해 보마.”
하지만 진양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화가 치밀었다.
물론 임패각이 죽었을 때와 금룡표국이 멸문했을 때도 화가 났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나 큰 슬픔이 그 분노마저 죽여 버렸다.
한데 지금은 오로지 분노만을 느끼는 것이다.
진양이 완강한 태도로 말했다.
“아닙니다, 사부님. 이런 개만도 못한 인간은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립니다! 겸이 자네가 사부님을 안전하게 모시게!”
“알, 알겠네.”
단지겸이 얼결에 대답하며 성조영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사실 단지겸은 내심 겁도 났지만, 어려서부터 진양을 믿고 따르던 마음이 있었다. 때문에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양의 태도에 속이 시원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두 사람이 안전하게 물러난 것을 보고 진양이 다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여동추! 지금이라도 당장 무릎을 꿇고 사부님께 사죄드리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네를 용서할 수가 없네!”
여동추는 이제 너무나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놈은 뭘 믿고 이렇게 설치는 거지? 혹시 저 진짜일지 가짜일지도 모를 사상이괴라는 노인을 믿고 설치는 건가?’
그때 방혁이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더 이상은 봐줄 수가 없구나!”
그를 선두로 괴멸조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나갔다.
그때였다.
쉬잇! 쉬이잇!
척척척!
학립관의 건물 지붕 위에서 흑의인들이 까마귀 떼처럼 내려서며 진양을 둘러싸는 것이 아닌가?
“멈춰라!”
그들은 우렁차게 호통 치며 두 자 정도 되는 길이의 얇은 검을 꺼내 들고 괴멸조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살기는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 만큼 강렬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귀영대를 보고 괴멸조는 물론 여동추도 깜짝 놀라서 뒤로 성큼 물러났다.
“누, 누구냐?”
여동추의 질문에 귀영대주 비연리가 한 걸음 나서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상련 귀영대주 비연리다. 은공께 무슨 볼일이라도?”
“천, 천상련이라니? 은…… 공?”
여동추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연리와 귀영대원, 그리고 진양을 번갈아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눈은 다시 사상이괴에게 옮겨졌고, 이제야 진양의 뒤에 서 있는 흑표와 유설에게도 시선이 갔다.
놀란 사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조영과 단지겸도 갑자기 나타난 귀영대를 보고 혼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척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진양이 비연리를 향해 말했다.
“비 대주, 물러나 주시오.”
“하지만…….”
“제게 약속하지 않았소? 그리고 내가 이들에게 위험할 정도로 형편없다고 생각하시오?”
진양이 전에 없이 엄한 표정으로 말하자, 비연리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비연리가 수신호를 보내자, 귀영대가 번쩍 몸을 솟구치며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들의 경신법이 가히 놀라워 여동추를 비롯한 괴멸대는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양이 다시 소리쳤다.
“여동추! 어쩔 텐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동추가 진양을 노려보았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찬찬히 속셈을 해보았다.
‘저 사상이괴는 아무래도 가짜인 것 같다. 그리고 방금 나타난 자들이 정말 천상련의 무인일까?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저들이 모습만 보였다가 순식간에 돌아갔단 말인가? 아마도 이는 진양 녀석이 생각한 꼼수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럴싸한 연출을 한다면 내가 포기하고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조금 더 떠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터.’
여기까지 생각한 여동추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뭘 어쩌겠냐고 묻는 건가? 난 성 관주와 이야기를 해야겠네만. 내가 다시 묻겠네. 비킬 텐가, 비키지 않을 텐가?”
“흥! 자네가 먼저 사부님께 무릎 꿇고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비킬 수 없네! 그리고 자네를 비롯한 괴멸조에게 따끔하게 벌을 주겠네!”
“하! 벌을 줘? 누가? 자네가?”
“그렇다.”
진양이 두 눈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여동추는 마지막 진양의 대답에서 내심 확신했다.
‘사상이괴는 틀림없이 가짜일 것이다. 그리고 천상련의 무인이라는 것도 가짜일 것이다. 어디서 경신법에 재주가 있는 자들을 긁어모아 잠깐 써먹은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진양 저놈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그런 자들과 친목을 다졌겠는가? 더구나 그런 자들이 정말 함께 있다면 제깟 놈이 직접 나설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여동추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생각해 보라.
어려서 매일같이 자신에게 두드려 맞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무림 최강의 사파인 천상련의 무인을 아이 다루듯 한다?
여동추가 아닌 어느 누구라도 쉽사리 믿지 못할 이야기다.
결국 여동추는 자신의 생각을 철석같이 믿고 성큼 나섰다.
“어디 자네가 주는 그 벌을 받아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