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누워서 식은 죽 먹기
그야말로 대장군처럼 성큼성큼 걸어가는 필립.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알렉시안 작가님.”
대뜸 어떤 이름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상대는 걸걸한 목소리로 소란을 피우던 덩치가 큰 중년 남성이었다.
“뭐야? 당신은 누군데?”
갑자기 끼어든 필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치켜뜨는 상대방이었다.
큰 덩치에 인상까지 더해져 험악한 분위기임에도 필립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여는 게 보였다.
“저는 라고시안 소속의 제너럴 매니저 필립 윌슨입니다.”
“제너럴 매니저? 아. 이쪽보다 좀 높네.”
솔직히 난 필립의 직급이 제너럴 매니저인지 이제야 알았다.
분명 마지막으로 명함을 받았을 때는 보통의 매니저였는데, 언제 승진을 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속으로 상황을 판단하며 지켜보는 사이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책임자요?”
“오늘부터 제가 책임자가 될 예정입니다.”
만약 그가 눈치가 빨랐다면 필립의 말에서 어딘가 이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다. 오늘부터라고 명확하게 말했으니까. 저건 분명 내 전시회 때문이었다.
“이봐. 책임자라고 하니, 내가 다시 한번 말하겠어요.”
그러나 그는 책임자라는 소리에 마침 잘 왔다는 듯 줄줄이 본인의 용건만 꺼내 놓기 시작했으니.
“대체 직원 교육을 어찌 시키는지 모르겠네. 라고시안은 소속 작가를 이렇게 대접하는 건가?”
‘오. 저 남자 라고시안 작가였나 보네.’
원래 이런 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법. 예로부터 싸움 구경이 가장 재미있다고 했던가.
안 그래도 흥미진진한 상황이 상대가 나와 같은 라고시안의 작가라고 하자 한층 더 재미있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작가님.”
필립을 거의 10년간 봐 온 난 저게 ‘참을 인’ 자를 새기고 있는 표정임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웃고 있었으나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상대는 나와 달리 이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턱 끝을 올린 채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괴상한 말을 줄줄이 내뱉기 시작했으니까.
“아니, 명색이 소속 작가가 사소한 부탁 좀 하는데 그걸 안 들어주질 않나. 이거야 원.”
“……그게 무슨 사소한 부탁입니까.”
그 라고시안 소속 작가라는 남자의 말에 억울했던 듯 앞에 있던 여자가 말문을 여는 게 보였다.
“전시회는 엄연히 일정이 있는데 이틀씩이나 연장을 해 달라는 게 무슨…….”
“그러니까. 다음 전시회가 어차피 1주일 뒤 아닙니까.”
그는 그러면서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였다. 특유의 시건방진 표정은 덤이었으니.
“거기에 피해 안 가게 딱 이틀만 연장하겠다는 건데. 그 정도는 종종 해 주기도 하잖아?”
그쯤 되자 나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필립이 왜 저 사람에게 끈질긴 진상 짓을 한다고 하는지 말이다.
무례한 말투와 예의 바른 말투를 교묘하게 섞어 쓰는 상대방. 딱 봐도 꼬투리를 잡히기 싫어서 억지로 예의라도 갖춘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작가님, 이건 엄연히 계약 사항입니다. 이러시면 안 되시죠.”
“뭐?”
“잘못하면 내용 증명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정말 딱 이틀도 안 되는 건가? 그 정도면 하나는 확실하게 팔릴 게 분명한데.”
왜 전시회를 조금이라도 늘려 보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그림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그림을 하나도 팔지 못했다고? 그게 가능한 거였어?’
전시회를 하면 난 당연히 그림을 파는 줄 알았다. 우리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가끔 소식을 듣는 제임스까지.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전시회를 하고도 그림을 못 파는 화가는 없었으니까.
“이번에 안 팔려도 괜찮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도 그러셨는데요. 다음에 잘 파시면 됩니다.”
영업인 특유의 미소와 함께 필립은 그를 잘 달래는 중이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이상한 부분이 좀 있었다.
‘어라? 필립이 저 사람에 대해서 잘 아나 보네?’
어쩌면 같은 라고시안 소속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 전시회도 아니고 전 전시회에 얼마나 팔렸는지까지 안다고?
“아니, 정말로 딱 이틀이면 된다니까. 오늘 보고 간 사람 중에 판매 문의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럼 전시회를 끝나고도 저희에게 문의가 올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전시회를 하고 있는 것과 아예 끝난 건 다르지!”
“작가님…….”
“이 뒤에 하는 것도 어차피 라고시안 소속 작가일 거 아닌가.”
이 순간 난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이 뒤에 하는 라고시안의 소속 작가.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누군지 모르겠지만, 1주일 텀이라면, 대형 설치 미술 쪽은 아닐 것 같은데. 맞지?”
역시나 업계 관계자였다. 설치 미술을 포함한 공간에 하는 전시회는 단순한 회화 전시회보다 더 많은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관람객의 동선을 짜는 것부터 시작해, 신경 써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았기에.
그러니 본인의 전시회와 다음 전시회 간의 간격이 짧다는 것만 가지고도 이후 전시회의 정체를 유추한 모양이었다.
“그 작가에게 내가 직접 양해 구하면 되나? 그럼 이틀은 연장해 주는 건가?”
대충 뭔 상황인지 파악되었다. 과연 필립이 진상 짓이라고 표현할 만한 건이긴 했다.
‘다음 작가에게 무작정 빌어 보겠다는 건데……. 이건 내가 잘하는 거지.’
한때 한량으로 기방에 드나들며 조선 팔도의 온갖 진상을 봤던 이 몸이었다. 고작해야 다음 전시회 좀 하겠다는 화가 정도는 껌이었으니.
하물며 지금 내 액면가는 아주 어린 10대 청소년이었다. 그럼 이 상황은 아주 손쉬운 것이었기에. 난 슬쩍 그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다른 사람들의 눈이 이쪽으로 몰리는 게 보였다. 그중 내가 주목한 이는 당연히 그 중년의 남자였으니. 그는 이건 또 뭐냐는 표정이었다.
“여기 웬 어린애가…….”
“제가 방금 말씀하신 그 다음 전시회 작가여서요.”
“뭐?”
한눈에 보기에도 내 나이는 어려 보이리라.
특히나 동양인을 유난히 어리게 보는 미국 사람들의 특성상, 지금 내 나이는 원래보다도 더 적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난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신가? 하여튼 그러니까. 반드시, 꼭, 지금 하는 전시회를 연장시키고 싶다. 이거인 거죠?”
“험험. 라고시안이 요즘은 이런 어린 작가 전시회도 하는구만?”
“이쪽은…….”
필립이 날 소개하려는 찰나. 그 말을 가로챈 것은 나였다.
“근데 전시회 끝나도 살 사람들은 계속 연락 오잖아요. 전 계속 그랬는데……. 원래 그런 거 아니었어요?”
“…….”
“딱 시간 맞춰서 오픈하고, 클로즈해야 더 멋지지. 연장하는 건 좀 없어 보이지 않나.”
혼잣말에 가깝게 작게 중얼거리지만, 분명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난 분명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게, 친절하기 짝이 없는 영어로 말했으니까.
역시나 이를 잘 들은 상대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이를 모르는 척하며, 난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뭐,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해 보죠. 할아…… 아니, 아저씨.”
일부러 나이를 강조하듯 난 잘못했다는 듯 슬쩍 할아버지를 입에 담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이는 어느 시대든 꽤 민감한 사항이었다.
“종합하면, 원래 하기로 한 것보다 빌어서라도 연장을 하고 싶다는 거 아니세요?”
“크흠. 빌어서라니, 그게 무슨…….”
“진짜로, 진심으로 원하시는 거면 협의는 해 보겠는데요.”
“아니, 작가님!”
내 말에 옆에서 가만히 있던 필립이 기겁을 하는 게 느껴졌다. 가만히 있으라고 대충 눈으로 신호를 보낸 난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대가는 뭘로 주실 건데요?”
“……대가?”
“예, 원래 제 전시회 준비 기간에서 이틀이나 가져가시는 거니…….”
일부러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 나.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대충 한국에서의 전시 기간 중 판 그림 액수를 전시 날짜로 나누면 되려나요.”
“……한국에서의 전시?”
“예, 방금 여기 왔거든요. 다음 전시회 하러.”
“윤성 신 작가…….”
그제야 상대는 내가 누군지 알아차린 듯 보였다. 그러더니 필립을 향해 씩씩거리는 게 아닌가.
“이거는 내가 라고시안 대표에게 말하겠어!”
“이거요?”
“소속 작가에게 이따위 망신을 주다니. 필립이라고 했지? 어디 두고 보자고.”
그러더니 누가 잡을 새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히 해결된 것을 보며 필립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갔네요.”
“그쵸? 그럴 것 같았어요. 막상 다른 작가에게 말해 볼 용기도 없는 사람이 무슨.”
“작가님,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거기서 그렇게 말씀하시다니요.”
“이렇게 말하면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보세요. 진짜 갔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저 사람 며칠 동안이나 여기서 진상 짓을 한걸요. 까딱하면 물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뇨, 갔을 거예요.”
확신 어린 대답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날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름 모를 여자와 필립.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난 설명을 이었다.
“그림을 하나라도 팔겠다는 사람이잖아요. 좋은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화가가 아니라.”
조선에서도 있었다. 저렇게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다가 부와 명예를 얻는 게 아니라,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자들.
그들의 대부분은 기묘할 정도로 똑같은 특징이 있었으니. 바로 모든 사람들이 자기처럼 수단과 목적이 바뀌어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제 전시회의 작품이 10점이 팔렸다고 했죠? 분명 저 사람도 알고 있을 거고요.”
내 이름을 듣자마자 도망가는 것을 보니 분명했다.
같은 라고시안의 소속 작가이자, 현 그림의 판매율이 월등히 좋은 게 이쪽이었다. 스스로 말하긴 좀 민망해도 엄연한 현실이었으니.
만약 내가 본인이었다면, 절대 스스로가 말하는 조건을 이루어 줄 리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더 망신당하기 전에 도망친 것이리라.
“죄송합니다, 작가님. 어제가 마지막이라 오늘 치우는 와중에 이런 일이 벌어져서요.”
그 자리에 있었던 여직원이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에게 사연을 들으며 대충 이렇게 된 경위도 들을 수 있었다.
전시회가 끝난 직후부터 시작해 다음 날까지. 계속 직접 와서 아예 철수를 하지 못하게 막은 작가라니.
“이거 꽤 전무후무한 거 아니에요? 한국에서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거의 없는 일이죠. 저분도 원래 저러시는 분이 아닌데, 왜 그러시는지 원…….”
“근데 저 사람, 진짜 라고시안 소속 맞아요?”
“예, 맞습니다만. 아마 조만간 대표님이 해지하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과연 라고시안. 능력이 좀 안된다 싶은 작가에 대한 정리는 가차 없었다.
‘잠깐만. 하나라도 팔아 보려는 건, 그런 위험성을 느껴서 아니야?’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감각은 이게 정답일지도 모른다고 알려 주고 있었으니.
라고시안 소속으로 나 또한 꽤 많은 혜택을 누리는 중이었다. 이게 없어진다고 하니, 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리라.
그래도 내 경우는 재계약 당시 과감히 버릴 생각이 있었었다. 그러나 저쪽은 다른 모양이었으니.
특히나 본인의 그림이 현재 잘 팔리지 않으면, 다른 화랑과의 계약도 불투명할 테니까.
‘역시나 이 시대는 더더욱 실력주의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대충 마무리가 된 것 같았으니까.
“저 사람에 대한 건 그만 말하고, 우리 이야기나 하죠.”
필립과 함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화제를 전환했다.
본인을 안젤라라고 소개한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전시장을 보여 주었다.
한참 보여 주는 와중에도 필립은 계속해서 어떤 식으로 전시회가 진행될지 알려 주는 중이었다.
“조만간 기사도 일제히 쏟아지게 할 겁니다.”
“기사요?”
“예, 여긴 저희 홈그라운드 아닙니까.”
라고시안이 뉴욕에 위치했으니, 홈그라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긴 했다.
“거기다 작가님께서도 첫날에 드로잉 퍼포먼스도 해 주시고요.”
“그렇긴 하죠.”
한국에서 한 걸 약간 더 발전시켜서 보여 줄 생각이었다. 이미 필립에게도 알려 준 상태였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작가 본인의 스펙이 빵빵하면 홍보는 아주 쉽죠. 이걸 한국에서는 누워서 식은 죽 먹기라고 하죠?”
“……누워서 떡 먹기 아니면, 식은 죽 먹기 같은데요. 대체 뭘 섞으신 겁니까.”
“네? 누워서 떡 먹기 어려운 것 아니었어요? 목 막힐 것 같은데. 그리고 식은 죽 먹기가 왜 쉬운 거죠? 아파서 누워서 먹는 게 아니면, 맛도 없을 것 같은데요.”
“…….”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면 내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기사도 나오고 홍보도 한다는 거죠?”
답할 말이 궁한 난 얼른 본론으로 돌아왔다. 다행스럽게도 필립은 같이 이야기를 맞춰 주었으니.
“그렇습니다, 작가님. 라고시안 갤러리에 얼마나 사람이 모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음, 한국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서울에서 열린 내 전시회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러나 내 말을 들은 필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