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입장을 한번 바꿔 보자고
즈워너는 라고시안보다 뒤늦게 생겼지만, 현재 그 뒤를 바짝 쫓는 모양새라고 들었다.
그런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니. 뭔지 궁금해지긴 했다.
“그게 뭔데요?”
“본인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현장 인터뷰요.”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인터뷰라…….”
“저희 라고시안 소속 화가들은 세계 제일입니다. 즈워너 소속 작가들보다 더 명성이 높죠.”
화가 중의 가장 스타 화가들만 모았다는 라고시안 갤러리. 그들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인터뷰. 익숙한 단어였다.
예전부터 종종 기자들을 통해선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지인인 기자님과도 했으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도 했던 일인 만큼 이제는 익숙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현장 인터뷰를 아트 바젤에서 하기 전에, 아무래도 연습이 있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해서요.”
거기까지 말한 필립은 다니 종이 뭉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그쪽을 바라보자 아예 그것들을 이쪽으로 완전히 밀어 내는 게 아닌가.
“인터뷰를 연습해요? 설마 이 종이 뭉치가 그럼…….”
“예, 작가님에게 들어온 인터뷰가 꽤 많았습니다. 그중 몇 개를 저희가 추려 왔죠.”
두꺼운 종이 덩어리의 정체. 그건 내게 들어온 인터뷰 회사들의 정보였다.
‘그게 이렇게나 많다고?’
슬쩍 기가 질린 난 일단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저걸 다 받아 주었다간 아트 바젤에 낼 그림 그릴 시간도 없을 것 같았기에.
“전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요? 근데 무슨 인터뷰가 이렇게나 많아요?”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산다는 연예인도 아니고.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건 내 작품이었지, 나란 존재,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필립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은 그림을 그린 작가가 본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거야 그럴 수 있죠. 내가 봐도 난해한 경우가 쌔고 쌨던데.”
한참을 들여다봐도 무슨 그림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 요즘 미술 작품 중에는 그런 그림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 작품은 작가라도 나와서 작품의 세계에 대해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지 않으면 보는 이가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나 내 작품은 달랐다. 자세히 살펴보고 꼼꼼히 봐야 한다는 면은 있었다. 하지만 그뿐. 분명 내 작품은 그 정도로 난해하기 짝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현장 인터뷰를 이렇게나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고? 곁가지가 아니라?
속으로 약간의 의문을 품는 사이, 필립은 내게 왜 이 인터뷰를 권하는지 설명했다.
“인터뷰는 그런 부분의 연장선입니다. 작가 본인이 스스로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것의 연장이요.”
그의 말은 간략하지만 핵심을 짚어 냈다. 대중에게 화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야기했기에.
“아트 바젤에 오는 이들은 그야말로 미술 작품 마니아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이들 앞에서 곧바로 말을 하면, 작가님도 긴장이 되실 수 있으시죠.”
‘딱히 긴장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도화서에 있을 당시 왕의 앞에서도 그림을 그렸던 나였다. 또한 지금도 이미 드로잉 퍼포먼스는 대중들 앞에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내가 고작 현장에서 하는 좀 깊은 인터뷰 정도에 긴장할 리가 없었다.
물론 난 이런 식의 잘난 척을 하는 대신, 종이들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이 인터뷰들 중 몇 개 골라서 하라는 거군요. 연습을 겸해서요.”
“과연 작가님. 척하면, 척 알아들으시는군요. 정확하십니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했는데, 못 알아듣는 바보는 없을 것 같은데요.”
칭찬도 과하면 장난처럼 느껴지는 법. 떨떠름한 내 표정에도 필립은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날 기색을 보였으니.
“저희가 이미 한번 검토한 것이기에 뭘 선택하셔도 됩니다. 그러니, 천천히 고르시고 말씀해 주시죠. 작가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종이 더미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그렇게 난 라고시안은 그 어떠한 에일대 교수님보다 먼저 내게 과제를 내 주었다.
* * *
라고시안이 즈워너를 신경 쓰는 정도라면, 즈워너는 라고시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중이었다.
원래 1등은 2등을 신경 쓰는 정도지만, 2등은 1등을 잡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노력하는 게 이치였으니.
1등을 잡겠다는 마음가짐 덕분일까. 요즘 즈워너의 기세는 매서웠다.
최근 현대 미술계에서 혜성같이 나타났다는 평을 듣는 화가들을 싹쓸이 중이었기에.
그렇기에 이번 아트 바젤 홍콩에 거는 즈워너의 기대는 엄청났다.
사실 미국이라는 안방에서 라고시안을 잡기란 아직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어디 좀 막강해야지.
하지만 홍콩은 그쪽에서도 외국이 아닌가. 그렇기에 홍콩의 입장에서 라고시안과 즈워너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당연히 후발 주자인 즈워너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여지가 많았으니.
“그럼 정기 회의를 시작하지.”
라고시안보다 젊은 아트 딜러인 즈워너. 그는 아직 확실한 현역이었다.
그렇기에 직접 회의도 주도하며, 아트 바젤을 챙기고 있었다.
갤러리 대표의 묵직한 저음에 다들 하나둘 회의 안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중 핵심은 바로 아트 바젤 홍콩. 그것이었다.
핵심 책임자 중 하나인 젠스키.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아트 바젤 측의 입장을 전달했다.
“아트 바젤 홍콩의 메인 섹터를 결국 라고시안과 함께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쯧. 결국 가져올 수는 없었군.”
즈워너는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그들은 아트 바젤 홍콩 측에 꽤 많은 로비를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하여.
그 결과 메인 섹터에서도 괜찮은 자리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옆에 배치된 다른 대형 갤러리의 존재였지만 말이다.
“아트 바젤 홍콩 측도 우리와 라고시안이 경쟁하길 바랄 테니까요.”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야 더 많은 고객들이 관심을 가져 줄 테니까.”
기업 간의 경쟁은 고객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일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갤러리 간의 경쟁은 아트 페어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게 고객의 관심으로 이어질 테고, 그건 바로 수입이 될 테니까.
“후, 그것들 콧대가 꽤 높은 거 아닌가? 이렇게나 시간과 정성을 들였는데도 아직 라고시안 측의 손을 들어 주다니.”
“라고시안의 손을 완전히 들어 준 건 아닙니다.”
“그럼?”
“최근 아시아 시장의 젊은 세대의 구매력이 늘어나는데, 거기에 타깃을 둔 것 같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아트 바젤이 이렇게 두 갤러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이유가 있었다.
경쟁은 흥미를 불러오는 법. 이번 라고시안과 즈워너의 싸움 또한 비슷했다.
두 갤러리가 붙으며 젊은 수집가들이 더 관심을 가지게 될 테니까. 아트 바젤 홍콩이 원하는 건 이것이리라.
“라고시안이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는데. 쯧.”
즈워너는 혀를 찼다. 갤러리들 중 가장 대형이자, 그야말로 공룡이라고 불리는 라고시안.
그들이 이 상황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즈워너 갤러리의 직원들은 유능했다. 대표가 혀를 차자 곧바로 해답이 나올 정도로.
“안 그래도 급하게 들어온 내용이 있어서 보고서에 넣지 못했습니다.”
“그게 뭐지?”
“라고시안 측이 아트 바젤 홍콩에서 뭘 할 예정인지 알아냈습니다.”
덤덤한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남들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잡아냈다는 그 자신감 말이다.
“오호. 드디어 그쪽에서 행동을 개시한 건가.”
어차피 이 바닥에 비밀은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분야에 비해서도 유난히 좁은 미술계 아닌가.
그중에서도 순수 미술인 이들의 분야는 더 좁았다.
당연히 라고시안도 즈워너를 알았고, 즈워너도 라고시아을 알 수밖에.
그 덕분일까. 즈워너는 라고시안이 뭘 계획할지 생각보다 손쉽게 알아내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라고시안 소속 전속 작가들의 현장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아마 심화 인터뷰가 될 것 같습니다만.”
그 말을 들은 즈워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는 잠깐의 침묵 후 한 번 더 해당 사실을 확인했다.
“……고작 인터뷰를? 확실한 건가?”
“확실합니다. 어차피 조만간 언론에도 나올 거예요.”
언론에까지 뿌려질 예정이라면, 틀린 정보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라고시안이 아트 바젤 홍콩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소리였으니.
“허, 생각보다 진부한데. 그 라고시안도 늙은 건가?”
즈워너는 저도 모르게 라고시안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아트 딜러로 손꼽히던 그도 나이가 들며 감각이 떨어진 것일까. 이 상황에서 고작해야 인터뷰를 한다고? 제아무리 심화 인터뷰라지만?
“진부하긴 하지만…….”
직원들은 대표의 말에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차마 뭐라고 하지 못하는 직원들을 보며 즈워너는 대신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어. 진부하긴 하지만, 우리에겐 꽤 효과적인 방법이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저쪽의 이름값이 우리보다 좀 높아서겠지.”
다시 한번 직원들의 말을 끊은 즈워너. 현업에서 한창 활동하는 만큼, 그는 어지간한 직원들 못지않게 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대표가 워낙 비관적으로 말했기 때문일까. 젠스키는 재빨리 반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저희 측이 완전히 밀리는 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지?”
“저희가 더 어리고, 더 재기발랄하니까요.”
즈워너의 전속 작가들이 젊은 축에 든다는 건 세상이 아는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라고시안에 소속되어 있는 작가들은 한참 위 세대의 화가들이었기에.
그러나 이를 들은 즈워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아예 반문까지 하는 게 아니겠는가.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않나?”
“그게 무슨…….”
“왜 있잖냐. 최근 라고시안이 밀어주는 새싹.”
최근 라고시안이 적극적으로 케어하는 존재 중 새싹이라고 불릴 만한 화가. 그건 딱 한 명뿐이었다.
“윤성 신 작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아. 바로 그 작가.”
윤성 신. 즈워너도 분명 전속을 노렸다. 솔직히 즈워너야말로 그에게 어울리는 자리 아니겠는가.
윤성 신 작가는 그야말로 젊고 재능 넘치는, 재기발랄 그 자체인 작가니까.
하지만 그는 즈워너가 아닌 라고시안으로 향했다. 심지어 거기서 10년이 넘도록 장기 계약 중이었다.
대표와 마찬가지로 윤성 신 작가를 떠올린 직원들. 그들 중 하나가 꽤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의견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라고시안이 그 작가를 이번 인터뷰 메인에 세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건 왜?”
“분명 대단한 작가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너무 어려요.”
이제 고작해야 대학에 들어간 작가. 길고 긴 순수 미술 화가의 세계에서 그 정도 나이는 젊다 못해 어렸다.
“‘어리다’라…….”
“어린 천재가 가치 있는 이유는 신비롭기 때문입니다. 친근하게 관객들에게 다가와 인터뷰하다가 그 밑천이라도 까발려지면…….”
“라고시안 입장에서는 오히려 악재겠군.”
“그렇습니다. 라고시안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습니다.”
직원은 확신했다. 라고시안이 뭐가 아쉬워서 어린 천재를 전면에 드러내겠는가.
지금처럼 애지중지 잘만 키우면 그야말로 더 큰 부를 가져다줄 존재. 그런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먼저 째려고 할 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지금처럼 기사 인터뷰 정도라면 모를까. 아트 페어에서는 불가능해.’
기사 속의 인터뷰 정도야 가능했다. 그러나 아트 페어의 현장 인터뷰는 다른 문제였으니.
하지만 즈워너의 생각은 다른 듯 보였다.
“아니. 오히려 나라면 더 그를 앞에 세울 거야.”
“예?”
“우리가 라고시안보다 확실한 우위에 있는 게 젊은 감성이었지. 그런데 그 윤성 신 작가보다 젊은 화가가 우리 쪽에 있나?”
“…….”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현역에 이름 있는 화가 중 그보다 어린 화가는 존재하기 힘들었기에.
“그 능구렁이 같은 라고시안이라면, 그를 앞세워 우릴 이기려고 들 거야. 라고시안은 그렇게 경쟁자들을 제거해 왔거든.”
수십 년간 라고시안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한 즈워너.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라고시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대표의 확신에 다른 직원들은 서로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그럼…….”
“만약 그렇다면, 우리 측에서는 반대로 가야겠지.”
“반대라니요?”
“그쪽에서 젊은 동양의 한국인 화가를 내세운다면, 우리는 나이 든 미국의 흑인 화가 어떤가.”
“……설마 잭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잭슨 나올로. 그는 즈워너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전속 화가였다.
동시에 미국의 현대미술계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장이기도 했으니.
“어디 이참에 라고시안과 우리의 입장을 한번 바꿔 보자고.”
즈워너와 라고시안이 붙으면 많은 승리를 라고시안이 가져갔다.
그러나 이렇게 아예 입장을 뒤바꿔 버린다면 모르는 법이었기에.
혹시 아는가. 이번에야말로 즈워너가 라고시안을 밟고 올라갈지.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