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초상화, 현재의 모습을 그린
시한부. 즉 죽음이 멀지 않다는 의미.
인간에게 죽음이란 건 무거운 것이었다. 이건 한 번 경험을 해 봤기에 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생의 모든 것과의 단절. 그게 죽음이었으니까.
‘이번에 다시 죽는다고 해서 또 태어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
무슨 조화로 인해 조선에서 내가 다시 이 시대로 환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발전된 시대의 과학으로도 아직 죽음과 환생은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으니까.
한 번 경험을 한 나조차 죽음의 무게를 실감하는데, 아직 단 한 번도 죽어 보지 않은 이들은 더하리라.
그렇기에 내 눈앞에서 말하는 그녀의 음성이 더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시한부 환자의 초상화라니, 그게 무슨…….”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는 게 아닌가.
“내 친구들도 준비하고 오려면 좀 멀었으니까……. 확실히 아직 시간이 좀 있겠네.”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좀 더 편안한 자세가 되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본격적으로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그림을 꽤 좋아하는 편이야. 전시회도 많이 가고, 수집도 종종 하시거든.”
예로부터 곳간이 넉넉해지면 문화를 즐기게 된다.
왕과 양반들부터 그림을 즐기기 시작해 서서히 아래 계층까지 민화를 즐긴 것처럼.
눈앞의 그녀는 재벌 집 딸내미였다. 에일대에 입학할 정도로 이쪽에도 분명 관심이 많은 집안이리라.
그런 그들이 전시회를 즐기고 그림을 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도 상당히 그림 좋아하지만……. 사실 진짜 원조는 우리 할아버지거든.”
“할아버지?”
“응, 그 바쁜 경영 활동 중에도 미술을 사랑하셔서 직접 경매도 보러 가곤 하셨으니까.”
이 순간 내 귀에 들린 한 단어가 있었다. 경영 활동이라니. 기업가들 중에서도 대표가 하는 일 아닌가.
“잠깐만. 경영 활동이면……. 설마 그 할아버지가…….”
“짐작하는 게 맞을걸? 전대 회장님이셨거든. 우리 할아버지.”
“…….”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린 나였다. 내가 잠시 침묵에 휩싸여 있는 사이.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쨌든 우리 할아버지는 그림을 좋아하는데, 얼마 전에 내게 말씀하셨거든. 해 보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그게 초상화였구나.”
“맞아. 본인의 초상화. 그걸 남기고 싶으시다고 하셨어.”
시한부, 그리고 초상화. 이 단어를 조합했을 때 나오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그렇기에 난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많이 편찮으신 거야?”
“아, 우리 할아버지? 지금은 괜찮으셔.”
“그렇다기엔 그, 시한부…….”
“할아버지 뇌에 작은 문제가 있으시거든. 운이 좋으면, 죽을 때까지 괜찮으실 테지만, 운이 나쁘면 음…….”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차마 더 잇지 못하겠다는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그런 와중에도 딱히 어둡게 말하는 느낌은 아니었으니.
“할아버지가 이 소식 전할 때 농담처럼 시한부라고 하셨거든.”
“…….”
“우리 가족들이 죄다 표정이 어두워진거 보고는 더 이상 그렇게 말씀하시진 않으시지만.”
과연. 그래서 시한부라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시한부라고 하기엔 애매해 보였음에도.
역시나 그녀는 그다지 할아버지의 상태가 심각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니.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는 없으셔. 그래도 건강이 좋은 건 아니고…… 요양 중이긴 하시지.”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상황임에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담담함이 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하는 말이 더 진실되게 들릴 정도로.
“그래서 아버지에게 빨리 경영 수업을 시키신 것도 있고.”
그녀는 윌마트를 왜 지금의 아버지가 맡고 있는지를 함께 말했다. 몇 년 전부터 급격히 안 좋아진 할아버지의 건강을 언급하면서.
“그런 할아버지가 정말 오랜만에 뭘 원한다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초상화였거든.”
“초상화면, 본인의 초상화를 말씀하시는 거 맞지? 현재의 모습을 그린.”
“맞아. 바로 그거.”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표정이 꽤 진지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멋쩍은 듯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왜 그러시는지 이유는 모르겠어.”
“그래?”
“응, ‘화가들을 좋아하시다 보니, 작가들이 초상화 남기는게 좋아 보였을 수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추측 정도만 하고 있는 중이야.”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신입생들이 좋아할 만한 달달한 술. 일명 칵테일이라고 불리는 술이었다.
“솔직히 음…… 이런 분위기에서 부탁하는 게 별로란 건 나도 알아.”
“아니, 그거야 상관이 없는데.”
파티에서 부탁을 하는 것. 그건 괜찮았다. 솔직히 이런 기회가 아니면, 날 만나기도 어려울게 분명했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쪽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방. 그러니까 초상화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였으니.
“그…… 많이 편찮으신 거면, 좀 힘들 수도 있어.”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럼 벌써 병원에 입원하셨을 거야.”
“그럼?”
“일상생활 정도는 현재까진 문제없으셔.”
그녀는 할아버지의 상태를 떠올리는 것처럼 테이블에 손을 올려 둔 채 턱을 괴었다.
“스트레스 받는 환경이나, 피곤하면 안 되실 것 같기는 한데……. 진짜로 지금은 일반 사람과 거의 차이가 없으시거든.”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금세 내 눈치를 봤다. 그러더니 슬쩍 질문까지 던지는 게 아닌가.
“역시 많이 힘들까?”
“으흠. 당장 결정하긴 좀 어려운게 사실이야.”
‘전생에 도화서에서 어진이라도 그려 봤으면, 좋았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전생부터 시작해 이번 생까지. 이렇게 다른 이의 요청으로 초상화를 그린 적은 없었으니까.
내가 그린 초상화는 대부분 나 혼자서 그린 그림에 가까웠다. 상대방에게는 간단히 그린다고 말만 한, 그런 작품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아니지 않은가. 내가 그린 작품을 상대방에게 넘겨야 했으니.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하물며 초상화라는 게 쉬운 그림은 아니거든.”
전생의 미인도와 이번 생의 신미인도. 둘 다 모두 내 역작이라고 평가받는 것에는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혼자만 정성을 쏟는 것이야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러나 이 경우 나만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덕분에 이번만은 확답이 어려웠다.
“그래…… 어렵구나.”
썩 긍정적이지 않은 내 대답에 그녀의 어깨가 위축되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를 위하는 손녀의 마음. 나 또한 이번 생에 할아버지가 있는 만큼, 이해가 되었다.
그렇기에 당장에 거부하는 대신, 조건을 달았다. 나 또한 가능하면, 해 주고 싶기도 했으니까.
“이렇게 하자. 일단 내가 네 할아버지를 한번 뵐 수 있을까?”
“……어?”
“그게 힘들면…….”
“아니! 그럴 리가. 완전 고맙지!”
반응이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았다. 그녀는 갑자기 부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며 이런저런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으니.
“할아버지는 지금 본가에 안 계시고 별장에 계시거든. 시간만 맞춰서 전용기 띄우면 될 것 같아.”
“…….”
지금 심상치 않은 단어가 몇 개 지나간 기분이었다. 그러나 난 그거에 대해 지적하는 대신 현실적인 부분부터 먼저 입에 담았다.
“아무리 그래도 학기 중에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역시 그렇겠지? 몇 달 기다리셔야겠다.”
약간은 실망한 기색이 눈빛에서 보였다. 하지만 이를 금세 지워 낸 그녀는 곧바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허락해 줘서 진짜 다행이야.”
언제 기죽었냐는 듯 환한 웃음을 지은 그녀는 한층 더 높은 목소리로 내게 질문까지 했다.
“내가 오늘 할아버지에게 이 좋은 소식 꼭 전할게. 근데 나 지금 말해도 되는 거지?”
“몇 달 기다리실 수 있으시면, 뭐. 말해도 상관 없을 것 같은데.”
“그럼! 가능하지. 헤헤. 이따 파티 끝나고 기숙사에서 말해야겠다.”
‘정말 당장 건강 상태가 아주 안 좋으신 건 아닌가 보네.’
몇 달 기다릴 수 있다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온 걸 보면 분명했다. 정말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면, 이런 반응일 리가 없었기에.
그녀의 말대로 당장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초상화 그리는 데 생기는 문제가 하나 더 줄어들 것이니.
‘초상화라……. 일단 그 할아버지라는 분을 만나 뵙고 결정해도 되겠지.’
어차피 학기 중에는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난 머리 한구석에 조용히 기억만 해 두기로 마음먹었다.
* * *
다이애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오늘 오길 진짜 잘했네.’
평소 같았으면, 올까 말까 고민했을 에일대 신입생 환영 파티.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목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방금 그 목적은 절반 정도는 성사된 느낌이었다.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나 윤성 신 작가를 고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 단계는 해결이다. 후우.’
그녀의 간절함이 통했기 때문일까. 오늘 처음 본 윤성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난데없이 처음 만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도 모자라 제안에 긍정적인 검토까지 한다고 해 주었으니.
‘이따 아버지랑 통화하면서, 최대한 윤성이의 편의 보는 방향으로…… 윽.’
속으로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 보던 그녀. 다이애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말도 안 되는 음식이 그녀의 입에 들어왔으니까.
‘뭐야, 이 끔찍한 단맛은.’
다이애나는 단맛이 나는 종류의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입 안이 텁텁해지는 것도 모자라 혀까지 마비되는 기분이었기에.
그런 그녀가 이런 단 음식을 골라 왔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에서 이제는 꽤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그 접시는 아무래도 내 거 같은데? 아닌가?”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출장 케이터링 서비스라도 시켰는지 접시가 전부 똑같았다.
그렇기에 헷갈린 듯 보였다. 물론 그녀가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미안. 내가 잠시 헷갈렸어.”
“괜찮아. 이거 먹고 더 가져오면 되니까.”
‘이걸 더 가져오겠다고?’
이 끔찍한 단맛을 더 가져오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그녀와 달리 앞에 앉은 윤성은 그걸 잘 먹고 있다는 점이었으니.
‘한국인은 매운 거 말고 단것도 잘 먹나 보네.’
할아버지 덕분에 윤성에 대해 알아보면서 한국인의 여러 특징도 공부한 그녀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매운 것에 진심인 민족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매운 음식뿐만 아니라 단것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음, 적당한 디저트를 추천해 줘야 하나?’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는데 음식 추천만 한 게 없었다. 혹시 아는가. 그녀가 입맛에 맞는 걸 권해 준다면, 초상화를 그리는 데 한층 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해 줄지 몰랐다.
다행히도 이번 신입생 환영회에서 먹을 건 풍족해 보였다. 그럼 적당한 음식을 고르는 데 문제가 없으리라.
그녀는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둘러보면서 적당한 음식을 가져오기 위함이었으니.
그러나 마침 그들 사이에 끼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하이, 친구들.”
“혹시 우리가 너네 데이트를 방해한 거라면, 미안.”
두 명. 일어나려던 그녀의 앞에 나타난 숫자였다. 그들 중 하나가 윤성과 그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진짜 그런 거라면 그냥 갈게.”
“그런 거 아냐.”
다이애나는 윤성을 한 번 바라본 후 재빨리 부정했다.
“그럼 혹시 우리가 여기 앉아도 될까?”
자리 자체는 넉넉했다. 애초에 이 테이블은 2인용이라기엔 컸다.
그들이 모두 앉는다고 해도 총 4명. 그 정도는 충분히 앉을 수 있었다.
마침 의자도 근처에 놓여 있었기에. 그 정도는 문제없이 앉을 수 있는 크기였으니.
허락의 말을 하기 전 그녀는 윤성을 바라보았다.
첫 만남에 그녀에게 공손한 어투를 사용할 걸 보면, 예의를 차리는 성격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런 자연스러운 만남을 싫어할 수도 있었다. 그게 설사 이 파티의 목적이라고 해도.
그러나 윤성은 그녀의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이 신입생 환영 파티가 어떤지 금세 알아차린 듯 보였기에.
그는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 예의를 보였을 뿐.
드르륵―
“하이. 이렇게 인사하면 되는 건가? 뭐. 난 상관없어.”
“오, 둘 다 성격 좋네. 오길 잘했다. 그치?”
“그러게. 그 윤성이랑 다이애나가 이렇게 화통할 줄이야.”
기분 좋은 듯 앉는 두 사람. 그러나 다이애나의 귀에는 절대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가 끼어 있었으니.
“그 윤성이랑 다이애나? 그거 무슨 내용이야?”
그녀가 감추고 있는 그 비밀. 그게 새어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그 공포. 그로 인해 다이애나는 다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