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가명? 아니, 새로운 필명이자 호
이 질문에 제이콥은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떠올리는 눈빛을 했다.
“원래도 학점이 워낙 빡빡하셔서, A는 잘 안 주기로 유명하신 교수님이시긴 한데…….”
“그런데?”
“그 교양은 처음 생긴 3년 전부터 A가 진짜 단 한 명도 안 나왔어.”
‘그 교양’.
수업을 지칭하는 명칭부터 심상치 않았다. 대체 어떤 강의이기에 이런 말들이 신입생 환영회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단 하나도? 그게 말이 되나?”
“나도 놀랐다니까? 그런 수업이 있을 줄이야.”
다들 어이없어하는 이유가 있었다. 요즘 대학교의 과목들은 학생들의 의견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수업의 방향이나, 과제 등등 모두 일정 부분 학생들의 의견이 나중에라도 반영이 되곤 했다.
그래야 그 수업이 오랫동안 열릴 수 있었기에.
이중 학생들에게 학점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한 번 찍힌 성적표는 어지간해서는 바꾸는 게 불가능한 게 현실이었으니. 평생 가는 꼬리표인 학점이 중요하지 않다면, 뭐가 중요하겠는가.
에일대쯤 오는 학생들은 학점에도 신경을 썼다. 학생들끼리 교류도 꽤 활발했다. 어떤 수업이 학점을 받기 쉬운지, 혹은 어려운지 등등.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점을 따기 좋은 수업의 인기가 올라갔다. 그 수업이 유익하고 흥미롭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으니.
바꿔 말하면, 학점을 잘 주지 않은 수업은 그만큼 학생들의 선호에서 떨어진다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는 말이야?”
“……인기도 많아? 그 수업이?”
“3년간 정원 미달 없이 계속하고 있잖아. 인기가 있으니까 유지되는 거 아니겠어?”
“와우. 3년 동안 유지된 교양이면, 괜찮긴 한가 보네.”
이들의 추측이 맞으리라. 이 시대는 유난히 변화의 속도가 빨랐다.
에일대는 세계적인 명문 학교를 지향하는 만큼 학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수업을 만드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교양 강의들은 꽤 자주 바뀌곤 했다. 그런 와중에 3년간 유지가 되었다니, 흥미로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 수업이 3년간 A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것이라면. 이건 더 특이한 일이었다.
어지간한 교수였다면, 수업이 폐강되고도 남았을 것이기에.
학점이 소금처럼 짠 교수님의 강의가 학생들 사이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다른 과 학생들까지 알고 있을 정도의 인기 수업이라니.
‘어째 보통은 넘어 보이시더라니…….’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던 리처드 교수님.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그분은 교수 중에서도 특이한 인물이신 게 분명했다.
“뭐, 리처드 교수님이시니까.”
나와 비슷한 감상을 품고 있는지, 제이콥은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그런 그의 옆에서 캐서린은 한층 더 강력한 맞장구를 더했다.
“그러니까, 그냥 최고 학점이 B라고 생각해.”
“최고 학점이 겨우 B라…….”
“리처드 교수님께 B 받는 것도 보통은 넘는 거니까.”
워낙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더 무게감이 있었다.
고작 B. 다른 수업이라면, 보통을 하면 받을 수 있는 학점이었다.
아무래도 전공보다 교양은 특히나 더 학점을 잘 주려고 하는 편이었기에.
그런데 잘해도 B를 각오하고 가야 하는 강의라니. 과연 어떤 세계일 것인가.
“미대생도 받기 어려우려나?”
“미대생이라고 쉬웠으면, 미대생은 수업을 못 듣게 했을걸.”
“하긴 그런 수업들이 종종 있지.”
해당 전공 학생들의 수강을 막는 강의가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수강하게 되면, 위화감을 조성할 만큼 다른 학생들을 압도할 수 있기에 취한 조치이리라.
하지만 리처드 교수님의 수업은 그렇지 않았다. 미술 전공인 학생들도 원하기만 한다면, 자유롭게 수강을 할 수 있었다.
“흐음, 아무래도 미술 관련 수업인 만큼 A 받고 싶었는데.”
“보통 미대생들이 그 수업 처음 들어갈 때 그러기는 한다고 하더라.”
이래 보여도 전생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가. 전공도 아닌 교양인 만큼 난 이 과목만큼은 성적을 잘 받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다들 그런다며, 내게 겁주는 걸 멈추지 않았다.
“너네들이 다 그렇게 말하니, 궁금하네. 내가 어떤 학점을 받을지.”
“난 알 것 같은데. 윤성이 너 정도면 B지. 지난 학기에 B 받은 애가 딱 두 명이라고 들었거든.”
“허…… 딱 둘? 그거 정원이 30명인가 40명 아니야?”
“30명일걸. 맞지?”
“맞아, 이번에도 30명 정원은 다 찰 것 같더라.”
내게 확인을 하는 친구들에게 대답을 해 줬다. 아직 수강을 변경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에 확인한 바로는 여전히 30명 정원이 꽉 찬 상태였다.
그 뒤로도 우리는 꽤 오랫동안 학점에 대해 이야길 했다.
그 수업의 평균이 C라는 둥, B를 받으면 당당하게 학교 게시판에 인증을 하라는 등등의 이야기들.
이건 승부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말들이었다. 그랬기에 난 이렇게 답을 하고야 말았으니.
“이왕 듣는 거 한번 해 봐야 하지 않겠어? A 학점 도전.”
나름 패기 넘치는 내 대답에 제이콥과 캐서린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솔직히 잘하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윤성이는 이제까지 들은 애들과 달리, 기업이랑 아트 콜라보까지 하는 진짜 프로 작가잖아.”
“보통의 대학생도 아니고, 윤성이 너라면 일낼 수도 있지. 최초의 A!”
“맞아, 클리프가 보여준 네 이름 달린 폰 보니 머리도 엄청 좋은 것 같던데. 가능해 보여.”
칭찬과 내게 기운을 주기 위해 하는 긍정적인 말들. 그러나 그들의 대화 중 내 의문점을 자극하는 게 있었으니.
“……머리가 좋다고? 내가?”
이건 좀 의외의 소리였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는 꽤 들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아버지를 비롯해 내 그림을 본 많은 이들이 감탄했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니. 그건 잘 들어 본 칭찬이 아니었다.
전생의 난 똑똑한 선비도 아니었고, 천재적인 학자도 아니었기에.
이번 생 또한 마찬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외국어 정도를 좀 빨리 배웠다. 그건 내가 성인의 기억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왜냐면 학교에서 다른 과목에 대한 내 학습 능력은 평균에서 약간 위인 정도였다.
간단하게는 미술사부터 시작해 각종 과학적인 지식들까지. 전생을 살아 봤다는 걸 감안하면 보통 수준인 게 분명했다.
그런 내게 머리가 좋다니. 아무리 첫 만남인 만큼 칭찬이 과하다고 해도 이건 좀 뜻밖인 말이었다.
이런 내 기색이 보였음일까. 두 사람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에일대 온 애들은 다들 머리는 잘 돌아가지. 총명한 애들이 어디 한둘이겠어?”
“맞아, 맞아. 똑똑한 애들 중에서도 목표를 가지고, 원하는 게 확실한 애들이 여기 오는 거니까.”
즉, 저 소리는 에일대에 오는 학생 정도면 다들 총명하다는 소리였다. 그런 아이들이 목표까지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기에.
“하기야, 나만 해도 우리 고등학교에서 내가 제일 잘났다고 여겼는데…….”
특히나 제이콥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 그를 보며 놀릴 건수를 잡았다는 듯, 캐서린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으니.
“왜? 여기 와 보니까 아니야?”
“아니더라고. 뭔 놈의 잘난 애들이 이리도 많은 건지 모르겠다니까.”
작업실만 주로 들락거린 나와 달리 이제 고작 1주가 지났음에도 아이들은 서로 교류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스스로를 인싸라고 하는 클리프가 아님에도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까.
“어디서 무슨 상을 받았다느니, 무슨 기업이랑 미팅을 했다느니……. 다들 이런 애들 천지니, 원.”
“뭘 그렇게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 너도 여기 잘 들어왔으면서.”
“그건 그런데…… 난 그냥 졸업만 잘하는 게 목표인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라.”
“그 졸업이 목표라는 것. 쉽지 않다는 거 알지? 여기 에일대다?”
“에이, 그래도 나 정도면 졸업은 눈 감고도 하지. 이래 보여도 우리 동네에서는 내가 천재였다니까?”
언제 심각했냐는 듯 다시 가벼워진 대화였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난 주변도 슬쩍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보이는 웃는 학생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리라.
‘똑똑한 자들 중에 바라는 게 확실한 사람들이라…….’
방금 대화 중 내 귀에 확실하게 박힌 부분. 그건 목적의식에 대한 것이었다.
‘슬기로운 사람들이 원하는 것.’
이번 생에 내가 지향하는 바와 일정 부분 일치했다.
애초에 내 그림 또한 욕망과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걸 그리려고 하지 않는가.
“좋아, 정했다. 그거로 하자.”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역시나 사람들과 교류하는 건 여러 측면에서 좋았다. 이렇게 뜻밖의 성과도 건질 수 있었으니.
“응?”
“갑자기 뭘 그거로 하겠다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겉으로 중얼거리고 말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지는 게 사람이잖아.”
“……그냥 이제는 뭘 먹을지 생각 좀 하느라.”
눈앞의 다른 친구들에게는 얼버무렸다. 적당히 관심을 돌리기에 먹을 것만 한 주제는 없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그 수법은 통했는지, 아이들은 다시 음식 쪽으로 대화 주제를 넘겼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선배가 추천해 준 식당 말인데.”
‘오기를 잘했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였다. 나중에 클리프에게 밥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난 그날 파티를 꽤 즐길 수 있었다.
* * *
미국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건전했다. 내가 한국에서 학교 친구들과 놀 때보다도 더 일찍 파티가 끝이 났기에.
‘다들 가까운 기숙사에 사는데도, 이렇게나 모범적일 줄은 몰랐는데.’
물론 각 학생별로 다른 기숙사에 배정받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돌아가야 하는 거리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에일대 내였다. 숙소가 가까이 있는데도 파티가 이 정도로 이른 저녁 시간에 끝나다니.
에일대쯤 되니 발랑 까진 학생은 적은 듯 보였다.
‘좋아, 그럼 의식을 치러 볼까.’
만약 신입생 환영 파티가 늦게 끝났다면, 내일 아침에 했을 일. 난 그걸 지금 할 작정이었다.
준비할 일은 많았다. 우선 목욕재계를 해야 했다. 몸을 정갈히 하고 부정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빳빳한 종이와 붓이 필요했다.
우선 서둘러 씻은 난 가벼운 복장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작업실에서 하는 것도 좋았지만, 그래도 늦은 밤이니, 기숙사 내에서 하는 게 나으리라.
그렇기에 작은 내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같은 방 친구도 없으니, 딱이군.’
공식적인 신입생 환영회는 끝이 났다. 그러나 어디 친해진 아이들이 그렇게 쉽게 헤어지겠는가.
나만 해도 이 의식이 아니었다면, 좀 더 늦게 돌아왔으리라.
하지만 이건 중요한 일이었기에, 난 표정부터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서야 천천히 손을 움직였으니.
스윽―
어린 시절 잘 쓰던 캘리그래피용 붓펜. 이건 여전히 급할 때 사용하는 유용한 도구였다.
그걸 꺼내든 난 종이 위에 신중하게 한 획씩 써 내려갔다.
먼저 쓴 글씨는 똑똑함, 슬기로움 그리고 총명함을 뜻하는 글자인 총명할 혜(慧).
그리고 그 다음에 쓸 문자는 소망하고 바라는 뜻을 가진, 원할 원(願).
두 글자가 합쳐져서 나온 단어, 혜원(慧願).
이번 생의 내 새로운 호이자, 필명이었다.
전생과 같은 발음을 가진 혜원이었다. 다만 그 한자는 조선에서 사용한 혜원(蕙園)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새롭게 태어난 만큼 새로운 호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떠오른게 이전 생과 음이 같다니, 더 마음에 드는걸.’
사실 붙여 놓고 보면 이상한 단어이긴 했다. 슬기롭게 원하는 거라니.
하지만 내 마음에는 쏙 들었다. 조선에서 호는 보통 아이의 나이가 차면, 주변인들이 많이 추천하곤 했다. 그중 좋은 걸 본인이 고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 또한 그렇게 지어진 게 혜원(蕙園)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직접, 내 손으로 필명이자 호를 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내 것.
그만큼 더 의미가 있었으니.
전생에서 한평생 혜원 신윤복으로 살았다. 이번 생은 혜원 신윤성으로 살아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정성을 들여 종이에 혜원(慧願)을 완성했다. 정갈하게 쓰여진 글씨를 보며 어딘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는 때때로 혜원(慧願)이 되겠어.’
이번 신입생 환영 파티에서 개인적으로 얻은 가장 큰 성과. 그건 내가 볼 때는 이 호였다.
이게 정해진 이상, 이제 미뤄 둔 일들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