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그림 그리는 것과는 또 다른 재능
리처드는 요즘 들어 기분이 좋은 날이 많았다. 고대하던 그림도 구했고, 원하던 사람도 제자로 들어왔으니.
무척이나 살맛 나는 인생 아니겠는가. 덕분에 콧노래가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흥흥흥.”
어떤 제자가 들으면 품위 없게 무슨 짓이냐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그의 최근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으니.
‘이 정도로 잘 풀리면, 뭐든 저지르면 잘 될 것 같은데.’
최근 그는 수업을 현저히 줄인 상태였다. 본인의 작품 활동을 잘하기 위해 시간을 확보 중이었기에.
하지만 그런 그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있었다. 안식년에 들어간 교수가 아닌 이상 꼭 해야 하는 것.
바로 지도 교수로서의 역할이었다. 우수한 인재 양성에 목숨을 거는 에일대. 그곳에 재직 중인 교수라면 필수로 해야 하는 업무였다.
‘그러고 보니, 곧이네.’
리처드는 문득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봤다. 나이가 있기 때문일까. 그는 젊은이들과 달리 아직도 벽시계에 더 눈길이 잘 갔다.
스마트폰에 있는 시계가 정확하다는 걸 알아도 계속되는 습관이었으니.
‘후후, 내가 아는 윤성 신은 약속 시간에 철저할 것 같은데.’
그는 이미 오늘 만날 학생이 누군지 확인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가 아는 그 학생은 그 누구보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기도 했으니.
똑똑―
보아라. 역시나 시간에 딱 맞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가.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서 와요.”
앳된 얼굴을 한 채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학생.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게 리처드 눈에는 늘 낯설었다.
하지만 그게 학생이 예의를 갖추는 방식이란 걸 이제는 안다.
그가 본 윤성은 작품에 들어 있는 힘과 달리 평상시의 생활은 그야말로 바른 생활 사나이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윤성이 디저트를 좋아했었지.’
처음 관심을 가진 건 화가보다는 그림이었다. 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게 윤성의 그림이었기에.
그러나 점차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화가 자체에도 시선이 갔다. 이제는 귀여운 제자까지 되었으니, 더 눈길이 갈 수밖에.
그는 자리에 앉는 윤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침 내게 선물 들어온 게 있는데, 내 나이엔 많이 먹기 좀 어려운 것들이라.”
달칵―
리처드는 연구실의 한구석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알록달록한 상자 속을 본 윤성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이건 쿠키예요?”
“직접 수제로 만들어서 더 맛있다고 하더군요. 커피랑 같이 먹으면 딱이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쿠키들을 본 윤성은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생에는 먹을 복이 있나 봅니다.”
“먹을 복?”
뭔가 낯선 단어였다. 물론 문장의 구조로 대략적인 뜻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리처드가 중얼거린 소리를 들었는지, 윤성은 재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 한국에서는 이렇게 가는 데마다 먹을 게 넘치는 걸 그렇게 표현하거든요.”
“오호, 재미있는 관용 어구네요.”
“이런 달달한 류. 엄청 좋아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교수님.”
역시나 이런 사소한 것에도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윤성 학생. 그런 그를 보며 리처드는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한 마실 거라도 주기 위함이었으니.
“그래요. 아, 커피는 마셔요?”
“먹긴 합니다만…….”
단호할 정도로 확실하게 말하는 윤성답지 않았다.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는 그. 그런 제자를 본 리처드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쓴 건 안 먹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네, 뭐. 제 입맛이 좀 아이 같기는 하죠.”
민망하다는 듯 슬쩍 눈을 피하는 윤성. 그런 그를 보며 리처드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제자들이 좋아하는 거 있어요. 헤이즐넛 라테라고. 이거면 윤성 입맛에도 맞을 겁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개인 면담 시간. 그 시작을 알리는 헤이즐넛 라테의 향기가 연구실에 퍼지기 시작했다.
* * *
향과 맛이 좋은 커피. 교수님이 주신 걸 홀짝이면서도 내 머리는 계속해서 돌아가는 중이었다.
‘리처드 교수님이 언제 내 입맛에 대해 이렇게까지 잘 알게 되신 거지.’
쿠키부터 시작해 음료까지. 모두 하나같이 내 입맛에 맞춘 것처럼 맛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개인 면담에 대한 긴장이 더 날아간 느낌이었다.
한동안 서로에 대한 간단한 안부만 주고받았다. 하지만 결국 교수님께서는 볼론으로 돌아오셨으니.
“윤성 학생은 이미 프로죠.”
프로. 아마추어와 대비되는 단어. 이 말을 들은 난 거의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프로라고까지 말하기엔…….”
“겸손한 건 보통은 장점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현재 상황을 살피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내 말에 고개를 저으셨다. 그러시더니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 나가셨다.
마치 내가 여기 오기 전부터 준비하셨다는 듯이.
“이미 본인의 이름을 가진 전시회도 많이 했고, 다른 분야와의 협업도 꾸준히 진행 중이죠.”
내게 영화 일을 주선해 주신 당사자가 바로 리처드 교수님이셨다. 그런 만큼 최근 내 활동을 나만큼이나 잘 알고 계신 듯 보였다.
“영화 일 말고도 윤성 학생이 활약하는 분야가 많다는 것 이미 알고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교수님께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여셨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많은 데다가, 최근에는 그 스마트폰 그것도 학생이 한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
교수님의 눈길은 내 스마트폰을 향해 있었다. 나의 이름을 단 작품인 만큼 지금 내가 들고 다니는 폰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그리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런 콜라보. 앞으로도 할 것 같은데 맞나요?”
“아마 계속 그렇게 할 것 같기는 한데요.”
난 나도 모르게 변명처럼 중얼거리고 말았다. 교수님이 좋아하셨던 건 내 회화 작품이었다.
나이가 많은 교수님들의 경우 한 우물을 파시는 걸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자연히 내 반응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내 반응에 교수님께서는 고개를 미미하게 저으셨다.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에요. 학생은 음……. 다른 재학생들에 비해 이미 업계에 많이 나가 있죠.”
사실이었다. 아직 아마추어에 가까운 에일대 학생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난 활동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해 줄 말은 많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이미 잘하고 있는 학생에게 뭘.”
그 직후 리처드 교수님께서는 앞에 놓은 헤이즐넛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면서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시는 게 너무 달게 느껴지시는 모양이셨다.
“크흠, 그래서 오늘 우리는 간단한 잡담이나 하다 가면 됩니다.”
슬쩍 컵을 좀 더 옆으로 밀어 넣으시는 교수님. 그걸 못 본 척을 하며 난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그럼 교수님 제가 궁금했던 것들 여쭤봐도 될까요?”
“오, 그것도 좋죠. 그런 게 있으면 얼마든지요.”
내가 뭔 소리를 할지 궁금하다는 듯 자세를 바꾸셨다. 의자에 바짝 당겨 앉는 교수님을 보며 난 일단 현 상황부터 말했다.
“우선 제가 교수님의 수업을 하나 듣고 있는데요.”
“당연히 압니다.”
“거기서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대로 AI로 그림을 좀 뽑아 봤어요.”
“오호, 그래. 어떻던가요?”
교수님의 말에 난 씩 웃으며 준비해 둔 것을 보여 드렸다.
백문이 불여일견. 원래 백 번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이건…….”
“제가 주제를 가지고 뽑아 둔 그림들이에요.”
종이를 각각 주제에 맞게 묶어 왔다. 그렇기에 한눈에 그림의 양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꽤 많이 했네요. 나온 걸 다 가지고 온 건가요?”
“아뇨. 이건 나름 성공작들이라고 할 만할 걸 골라 온 거예요.”
“성공작?”
“예, 덕분에 벌써부터 이런 류의 프로그램이 가진 문제점도 알 수 있었죠.”
“우선 아직 세밀함은 한참 멀었어요. 얼굴 쪽이야 뭐 어떻게든 그린다고 해도 손이나 곡선이 특히 부족하죠.”
실패작들은 딱히 출력해 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건 온전히 내 태블릿 안에만 들어 있었다.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AI의 약점이죠. 몇 번만 사용해 봐도 알 수 있는.”
교수님의 말씀은 정확했다. 그렇기에 난 이 사실부터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으니.
“이 정도는 솔직히 사소했습니다.”
꽤 수준 높게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그거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었기에. 약간의 오류 정도야 별게 아니었다.
“그러나 진짜 AI 프로그램의 특이점은 제가 성공작들이라고 할 만한 걸 모으다 보니 나왔어요.”
“오호라.”
“자세한 건 이걸 보시죠.”
예고편을 보여 드렸으면, 진짜를 공개하는 게 인지상정. 난 자연스럽게 교수님에게 과제에 대한 확인을 받을 수 있었다.
* * *
리처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그가 본 게 참으로 아깝다는 마음이 들었기에.
“교수님. 상담은 잘 끝나셨어요?”
그런 그의 앞에 에밀리가 나타났다. 박사 과정의 학생으로서 이제는 소규모 수업까지 하고 있는 그의 제자.
“아, 왔나?”
에밀리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스승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으니.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 윤성 학생 상담하신다고 좋아하셨으면서요.”
윤성 신. 아직 에밀리와 직접적으로 엮인 적은 없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박사 과정인 그녀가 일개 학부생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학생의 특이성은 증명되기 충분했다.
더군다나 스승인 리처드 교수님의 관심이 지대한 학생이었으니. 에밀리도 자연스럽게 오늘 상담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였다.
“상담이야 잘 끝났지. 오히려 예상보다 더 알찼던 기분이기도 하고.”
알차다니. 교수 입장에서 학생과의 면담이 알찰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가르치는 자들이지, 배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머릿속으로 의문을 품는 사이. 리처드 교수는 결심했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좋아, 이렇게 된 것. 수업 계획을 좀 바꿔 볼까.”
기지개까지 쭉 켜면서 중얼거리는 교수님. 그가 한 말에서 에밀리는 심상치 않은 단어를 잡아내었다.
“수업 계획을요?”
“응.”
“교수님 작품 활동 하신다고 지금 하시는 수업이……. 그 교양 하나밖에 없지 않으세요?”
“맞아.”
그녀의 질문에 리처드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최소한의 수업만 하는 와중이었으니까.
확답을 들은 에밀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학기가 막 시작한 찰나였다. 이런 와중에 벌써부터 수정병에 걸리셨다는 말씀인가.
“아무리 교양이라지만, 그렇게 막 바꾸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이제 겨우 2주 차인데.”
“가능해. 많이 바꾸지는 않을 거니까.”
딱 봐도 이미 결심을 굳히신 듯 보였다. 그렇기에 에밀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신 교수님을 그녀가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약간의 조언 정도는 했다. 그것도 최대한 돌리고 돌려서.
“교수님, 만약 제가 지금 하는 그 수업 좀 변경하겠다고 하면 어떨 것 같으세요?”
“네가 맡은 수업인데. 네가 보기에 그래야 한다면, 하는 거지.”
단숨에 나온 대답. 그에 에밀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땐 그냥 궁금한 거나 물어보는 게 나았다.
“……그래서 어떻게 바꾸실 건데요?”
“그냥 뭐 하나 추가해 볼까 해서.”
“그게 어떤 건데요?”
“아무래도 이번 내 학생 중에 연구와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는 애가 있는 것 같거든.”
연구와 가르치는 재능. 그건 명백히 교수의 재능이었다.
에밀리 또한 눈앞의 리처드 교수님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고 이 길로 들어섰기에 잘 알았다.
“교수님, 그거 설마…….”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번 교수님의 그 교양 강의에 누가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전에 한 개인 면담의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고 있었으니. 그 학생의 정체를 유추하긴 손쉬운 일이었다.
말끝을 흐리는 그녀를 보며 리처드 교수님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감은 그렇긴 한데…… 상황상 강의를 맡길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수밖에.”
“대체 그게 뭔……. 이제 겨우 학부생, 그것도 1학년생 아니에요?”
박사 과정은커녕 대학원생조차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는 고등학교를 다녔던 학생. 그런 꼬마에게서 무슨 연구와 가르치는 재능이라는 말인가.
‘이건 그림 그리는 재능과는 또 다른 문제잖아.’
윤성 신의 회화 실력이 심상치 않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냉정한 미술계가 이미 그 어린 천재를 주목하고 있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가르치는 건 타고난 재능이 좌우하는 게 아니었다. 연구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이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처드 교수님께서는 아예 컴퓨터까지 켜고 계셨다.
본인 말대로 강의 계획서라도 고치실 모양이셨으니.
“보고서 제출 대신 발표하는 것도 추가하는 거. 그 정도 바꾸는 거는 문제 될 것 없잖아? 안 그래?”
답이 정해진 물음이었다. 왜냐면 에밀리의 대답 여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이미 타자를 치기 시작하셨으니까.
“혹시 또 아는가. 다른 학생들도 이참에 내 계획 변경으로 인해 뭔가 다른 걸 얻을 수도.”
리처드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번 학기 수업이야말로 학생들이 기존과 다른 걸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