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단번에 알아본 이유
원래는 식사 후 간단한 다과를 즐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다과 대신 그림을 즐기는 것도 괜찮으리라.
“……할아버지, 이거 언제부터 준비하신 거예요?”
“텅 비워 두기 적적해 보여서 말이다. 내 손녀 그림 좀 채워 두었지.”
“설마 최근에 제게 그림 좀 달라고 하신 이유가…….”
“크흠.”
식사 후 함께 이동하는 중에도 다이애나는 챈들러 할아버지를 추궁했다. 잘 대답하시더니, 곤란한 질문에는 헛기침으로 무마하시는 할아버지. 그러더니 금세 내게도 말을 붙이시는 게 아닌가.
“화가 선생, 이쪽으로 오게나. 이래 보여도 간이로 대충 전시실을 만들어 두었으니.”
긍정의 뜻을 표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며 난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간이로 만들어 두다니. 이쯤 되자 정말로 챈들어 할아버지가 작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짜로 계획이 있으셨는 모양인데.’
뭐, 나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잘 준비된 전시일수록 발견할 수 있는 게 많아지는 법. 이왕 그림을 보는 것 확실하게 잘 살펴볼 수 있는 게 좋았다.
평소에도 그림에 관심이 많다는 챈들러 할아버지. 그가 손녀의 그림을 어떤 식으로 전시해 두었을지 호기심이 들었다.
끼익―
미국의 주택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진 게 많았다. 이건 그게 잘 드러나는 소리였다.
잘 관리된 집이었지만 목재인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듯. 문을 열 때 미약한 소리가 났다.
소음을 뒤로하고 문을 열자 보이는 풍경. 그건 상당히 정돈된 모습이었다.
‘오호.’
“꽤 정리가 잘되어 있는데요.”
솔직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온도며 습도. 내 피부에 느껴지는 약간의 정보만 가지고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그림을 잘 보관하기 위해 상당히 신경 써서 만든 곳. 그 자체였다.
“후후, 그림을 잘 보관하기 위해선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씀하시면서도 표정은 퍽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 집을 구매한 시기가 최근이었다.
얼마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 내다니. 정말로 그림을 좋아하는 할아버지인 게 분명했다.
“여기 있는 게 전부 다 다이애나의 그림이에요?”
“그럼! 그러니 천천히 둘러보게나.”
그 말과 함께 챈들러 할아버지는 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대신 내 옆에 바짝 붙은 이가 있었으니.
“저기…… 괜찮다면 뭐든 내게 물어봐도 돼. 아! 그리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진짜 막 해도 되고!”
“막?”
“응, 욕해도 좋으니까! 솔직하게만 말해 줘.”
시작은 우물쭈물한 말투이긴 했다. 그러나 뭔가 결심한 듯 주먹까지 쥐며 내게 입을 열었다.
그냥 보기에도 그 안에 깃든 뜻은 확실했다. 제대로 된 의견을 나에게서 듣고 싶다는 것이었기에.
‘흐음.’
이래 보여도 한때 조선 내에서도 사회 풍자로 유명했던 나였다. 당시 허허거리는 높으신 양반들도 내 그림을 보고 뒤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이 시대엔 그 외에도 워낙 재미있는 게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흥미가 없어 하지 않았을 뿐. 여전히 난 날카롭게 상대방의 약한 부분을 짚어 낼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그게 내 전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 즉, 회화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보면 답이 나올 텐데.
‘어디 보자.’
그녀의 그림은 꽤 독특했다. 내 나이 또래는 아무래도 최근 미디어 아트나 조소 등에 주목하는 중이었다. 특히나 이건 AI가 발달하며 더 두드러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명백히 회화로 분류될 만한 것이었다. 특히나 사탕 같은 화려한 색을 사용해 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것. 이건 서양화에서도 꽤 고전적인 기법이었다.
“로코코…….”
“역시, 윤성. 단번에 알아보는구나?”
그랬다. 이건 한때 서양 회화사에서 로코코 시대에 유행했던 기법이었다. 물감을 그야말로 덧칠하고 또 덧칠해 그림을 표현하는 쪽이었으니.
다만 이 그림이 좀 더 특이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난 이에 대해 말하기 전 먼저 물어봐야 하는 것이 있었다. 마침, 그녀도 얼마든지 질문하라고 했으니. 딱 좋았다.
“다이애나, 너 말이야……. 못 그리거나 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 있지?”
“그럼 있지. 그게 없는 사람도 있어?”
“맞아, 다 있지. 나도 있으니까.”
전생의 기억 때문일까. 난 아무래도 수채화가 강했다. 상대적으로 아크릴화나 유화에 비해서 말이다.
“그럼 그 부분 어떻게 해?”
“어떻게 하느냐니?”
“잘해 보려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궁금해서.”
내 말에 그녀는 감이 잘 안 온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렇기에 난 스스로를 예시로 들어 설명을 더 했다.
“예를 들면 난 아무래도 유화가 약하거든. 그래서 유화 잘 다루려고 최근에도 유화를 그리고 있지.”
실제로 난 챈들러 할아버지의 그림을 유화로 그릴 생각이었다. 아트 페어에 내보낼 초상화. 그건 유화 물감으로 그리는 게 좋을 것 같았기에.
그게 비록 내가 덜 자신 있어하는 기법을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
내 말에 그녀는 애매한 눈빛으로 할 말을 찾았다. 그러나 딱히 대답이 없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대답을.
“넌 지금 너 잘하는 거 개발하기에도 바빠서 딱히 그런 거 안 하지?”
“그게 말이야…….”
“못 그리거나 약한 부분은 셋 중 하나로 하겠지. 숨기거나 작게 그리거나. 혹은 아예 안 그리거나.”
“뭐야…… 어떻게 알았어?”
소름이 돋는다는 듯 양팔로 본인을 감싸는 다이애나. 그런 그녀를 본 난 다시 눈길을 그림 쪽으로 돌렸다.
다시 봐도 분명했다. 그렇기에 난 유심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림에 느낌이 살아 있어서.”
“어? 느낌이 살아 있어?”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긴장이 풀어지는 게 보였다.
분위기가 나무랄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칭찬하는 낌새를 드러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 이 말을 칭찬하기 위해 꺼낸 것이 아니었다.
원래 한국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근데, 하지만’ 같은 단어 앞에 있는 말은 안 들어도 좋았다.
“근데 딱 느낌만 있어. 이건 그야말로 느낌으로만 그림을 그린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제야 그녀는 내가 할 말을 짐작한 듯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로코코 시대 느낌 좋지. 고전이지만 촌스럽지 않고, 재해석을 잘할 경우 사람들에게 인기도 있을 테니까.”
과거와 현재의 절묘한 조화. 내가 즐겨 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난 시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알맹이가 없었다.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몄을 뿐. 속은 텅 빈 쭉정이었으니.
“예를 하나 들어 볼까. 여기 이 덧칠한 부분. 이거 뭘 표현한 거야?”
여러 가지 색으로 덧칠해 오묘한 느낌을 내는 그림의 한구석. 난 거길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이 부분은 그림을 전반적으로 신비롭고 눈에 들어오게 만드는 덧칠이 되어 있었다.
심미학적으론 충분히 아름답고 느낌이 살아 있었다. 그럼에도 내 물음에 그녀는 당장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건…….”
“그럼 여기 옆에 있는 이 꽃같이 생긴 것. 이건 뭘 표현한 거야?”
명확히 꽃이라 보긴 어려웠지만, 화사하고 알록달록한 색깔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렇기에 난 거길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조금 전 덧칠해 둔 그 부분보다야 형태가 명확한 곳이었기에.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대답은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시선을 피하듯 슬그머니 그림 쪽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대충 속으로 짐작을 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의 아주 작은 구석. 혹은 아무 의미 없이 덧칠한 것 같은 이 부분. 보는 사람은 몰라도 그리는 화가는 알아야지. 이게 정확히 뭔지. 그리고 왜 그린 건지 말이야.”
입을 달싹이던 다이애나. 하지만 결국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 좀 더 명확하게 내 의견을 입에 담았다.
“이건 어설프게 네 안에 든 느낌만 무작정 표현한 거야. 이런 그림은 언뜻 보기엔 멋있어는 보이지만……. 사실은 실속이 없어.”
“실속이 없으면…….”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거야. 처음 눈길 정도는 잡을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시선이 본인의 그림에게 옮겨 가는 게 보였다.
그림 자체는 인상적이었다. 오묘한 색깔의 조화가 뭔가 시선을 확실히 사로잡는 맛이 있었으니까.
허나 그건 잠깐이었다. 이 그림에게선 사람을 붙들어 놓는 힘이 없었다.
내가 얼마 전 챈들러 할아버지를 통해 들은 그림 자체가 가진 힘. 그게 턱없이 부족했기에.
“이 안에 있는 선 하나, 점 하나도 네 의도가 들어가 있어야 해.”
아무리 큰 도화지라고 해도, 엄청나게 거대한 캔버스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은 무한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화가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명확하게 의도를 가지고 붓질을 할수록 그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도 건드리기 쉬웠다.
“……넌 그렇게 그리는 거야?”
물론 나라고 항상 그렇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그러나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연신 질문만 계속하였다.
“늘? 언제나 그렇게 그린다고? 그게 가능해?”
“어려워도 해야지. 최대한. 그렇게 해야만 시선을 끄는 것을 넘어 감정을 움직일 수 있거든.”
“……그걸 다 한다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멍하니 본인 그림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궁금하다는 듯 슬쩍 질문을 던졌다.
“윤성. 너 다른 사람 그림 보면…… 그게 막 다 보여?”
“그거라니?”
“방금 내 그림 봤을 때처럼, 이게 그 화가가 의도를 하고 그린 건지 아닌지. 그런 게 다 보이나 해서.”
“으흠.”
“……하긴 다 보이겠지. 그러니까 내 그림 보고 단번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겠지.”
본인이 물어보고 본인이 알아서 대답하는 다이애나였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와 달리, 정작 난 의문이 들긴 했다.
‘그러게. 어떻게 단번에 알아봤으려나.’
다이애나의 그림은 꽤 훌륭했다. 한국에서 몇 번 친구들의 그림도 본 내 눈에는 꽤 대단해 보였다.
어지간한 내 나이 또래 애들에 비한다면, 그녀의 회화 실력은 낮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신기하게 내 눈에는 보였다. 심지어 그림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 그림에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헌데, 나조차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우리 화가 선생이야 본인이 늘 그렇게 그리고 있으니, 그게 잘 보인 거 아니겠냐.”
그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침묵하며 우리를 지켜보시던 챈들러 할아버지셨다.
“나이가 같다고 화가 선생이랑 비교하지 말고. 넌 네 속도에 맞춰 가면 되는 게야.”
“할아버지…….”
“우리 화가 선생 덕분에 문제를 알았고, 해결법도 찾았으니 된 거지. 안 그렇습니까? 화가 선생? 후후.”
맞장구를 쳐 달라는 챈들러 할아버지.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녀의 그림에 대한 내 감상은 그거였기에.
그러나 내 속내는 겉과 달리 꽤 시끄러웠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방금 알아차린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늘 그렇게 하고 있다고?’
가만히 최근 작품들을 더듬어 보았다. 아트 페어를 준비하기 위해 그린 그림들이 꽤 많았기에. 그림들 그리는 과정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선 하나는 물론 점 하나까지. 난 내 생각보다 붓질 한 번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지?’
예쁘고 색채가 화려한 그림. 아름다운 여인이나 묘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풍경.
조선에서 내 그림 스타일은 지금 다이애나의 그림과 일견 비슷했다. 전체적인 느낌. 그걸 무척이나 중시했으니까.
그런데 어느새 내 그림이 변해 있었다.
작은 특징들을 모아 다른 의미를 보여 주는 반전화. 디테일을 살려 기존 아트 콜라보와 느낌이 다른 스마트폰. 거기다 모두 다른 로봇의 얼굴 표정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까지.
‘나…… 변했구나.’
이 시대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 많은 것을 배웠고, 공을 들였다.
그러나 막상 정작 내가 변했다는 것을 느끼자 기분이 묘해졌다.
이 변화가 발전일지 퇴보일지. 아직은 정확히 감이 오지 않았기에.
이런 내 생각을 알 리 없음에도 챈들러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거침없었다.
“화가 선생처럼 너도 계속 발전하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볼 게다. 네가 재능이 없어 보였으면, 이 할애비가 너 그림 시키지도 않았어.”
물론 내게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난 이를 통해 남들의 생각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남이 보기에는 나…… 발전하고 있는 건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내가 기대할 건 아트 바젤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시회는 단체전이라고 해도 한 번에 그리 많은 수가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단체전도 아니라면, 혼자 하거나 기껏해야 한두 명만이 같이하는 게 보통의 전시회였다.
이에 비하면 아트 페어는 달랐다. 수많은 숫자가 같이 진행을 하기에 명백히 서로 비교가 되었다.
심지어 아트 바젤쯤 되면 이미 고인이 된 화가들의 명작도 많이 나온다. 살아 있는 화가뿐만 아니라, 과거의 대가들과도 나란히 서서 작품을 보여 준다는 의미였으니.
전 세계에서 유명한 화가들이 모두 모이는 곳. 그곳에서 진짜 알 수 있으리라. 내가 조선에 비해 더 발전했는지 아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