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휘트니 미술관에 가다
효손이라고 자부하는 만큼 난 할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는 손자였다.
똑같은 일상만 반복하는 대신 여러 가지 경험을 해 보라는 말. 그걸 듣기 위해 주말부터 움직였으니까.
나와 클리프 그리고 다이애나까지. 이렇게 우리 세 명은 오늘 다 함께 뉴욕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늘에야말로 페라라 로마 타보나 했는데…….”
말끝을 흐리며 멍하니 중얼거리는 클리프. 그런 그를 타박하는 건 우리 중 홍일점인 다이애나였다.
“어쩔 수 없잖아. 세 명이 가는데 페라라 로마를 타고 갈 수는 없으니까.”
페라라 로마. 내가 대표님에게 선물 받은 이 차는 꽤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차가 없으면 못 하는 게 너무 많았기에.
탈 때의 느낌도 좋고 색도 괜찮은 최고의 차인 페라라 로마. 그렇지만 실제 사용하기 위해서 쓰다 보니, 발견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뒷좌석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문제가.
그렇기에 오늘 우리 셋이 움직일 때는 그 차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를 잘 아는 다이애나는 본인이 사용하는 차를 가져왔다.
“그건 그렇지…….”
운전을 하는 그녀에게 한 소리를 들은 클리프가 시무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작게 한숨을 쉰 그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게 왜 이번 팀 프로젝트는 세 명이 하는 걸까? 두 명이었으면 페라라 타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셋이 귀한 주말에 이렇게 같이 움직이는 이유. 그건 이번 학기에 같은 수업에서 같은 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팀플은 간단했다. 현대 화가 하나를 잡아서 그에 대한 소논문을 작성하는 것이었으니까. 연구 위주의 대학인 에일대 미대에 걸맞는 수업이었다.
혼자해도 충분한 과제를 팀플로 준 이유. 그건 아마도 다양한 시점을 활용하라는 의미이리라. 세 명이 하나의 화가를 고민하다 보면 더 많은 것이 보일 테니 말이다.
‘대체 뭔 기준으로 팀을 짠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 아는 애들이니 편하긴 하네.’
1학년에 걸맞는 기초 전공 수업. 이번 학기에 있는 유일한 전공 수업인 만큼 이 수업에는 미대생이 많았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 중 이렇게 조가 짜인 것도 다 운명이리라.
사실 다 안면이 있고 어느 정도 교류를 하는 아이들이었기에, 난 이번 팀플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만족하는 편이었다.
“그건 교수님을 원망해야지. 정 원하면 내가 대신 메일이라도 써 줄까? 너만 2인 1조 하게 해 달라고.”
“아이고 우리 아름다우신 다이애나 님. 감히 그럴 리가요. 난 너네랑 같은 조라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니까?”
나만 우리가 같은 조라 좋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클리프 또한 다이애나에게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능청스러운 클리프의 말에 다이애나 또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우리 조용히 뉴욕까지 가지? 나 이 차 많이 모는 편이 아니라…… 어디 들이박을지도 모르겠거든?”
“어이쿠. 그래야죠. 네네. 뒤에 실려 가는 짐짝은 조용히 있겠습니다요.”
장난스러운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내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생겼다. 이상하게도 이 둘은 같이 있으면 재미있는 말들을 하기 일쑤였다.
그 순간 문득 든 의문이 있었으니, 난 궁금한 건 바로 해결을 해야 직성이 풀렸다.
“근데 클리프. 내가 너 운전 종종 하게 했잖아?”
페라라 로마를 얻게 된 후 클리프는 유난히 내 차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누가 봐도 타 보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끙끙거렸으니까.
솔직히 작업실에 박혀 있는 내가 뭔 차를 그리 많이 쓰겠는가. 정말로 꼭 필요한 최소치만 사용하는 게 나였다.
그 결과 난 가끔 심부름 시킬 때 클리프에게 차를 빌려주곤 했었다. 주로 내가 필요한 화방의 물품들을 대량으로 살 때 이 친구를 부려 먹곤 했다.
난 사러 가야 하는 귀찮음을 덜었고, 클리프는 원하는 차를 타 볼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누이가 좋고 매부가 좋은 거래였다.
그러나 클리프는 이런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의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뉴욕까지 가는데 페라라 타고 가면 얼마나 멋지겠냐?”
이미 몇 번 타 본 적이 있음에도 이렇게나 아쉬워하다니. 나 원 참. 얼마나 페라라 로마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건 놀러 갈 때고…… 우린 오늘 과제 하러 가는 거니까. 정신 바짝 챙겨야지.”
“후…… 이 좋은 주말에 데이트도 아니고 과제를 하러 미술관에 가야 하다니.”
“어쩔 수 없잖아. 셋 다 되는 날이 오늘뿐이었는데.”
우리가 다 함께 뉴욕으로 향하는 이유. 그건 세 명이 동시에 하루를 비울 수 있는 날이 이날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색이 미대생 아닌가. 작품을 보지도 않고 인터넷에서 긁은 자료만 가지고 소논문을 쓸 수는 없었다. 그건 화가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이런 내 뜻에 동의한 두 사람도 같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소논문의 주제가 될만한 현대 화가 한 명을 찾아서.
“누가 뭐래냐. 그냥 오랜만에 휘트니 미술관 가니까 좋다 이거지.”
휘트니 미술관. 뉴욕에 위치한 현대 미술관으로 일명 기둥 없는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전시장 안쪽에 기둥이 없는 갤러리 중에서는 가장 큰 곳이기에 그런 별칭이 붙었다. 동시에 거긴 그 무엇보다 현대적인 화가들의 작품이 많이 있는 미술관이기도 했다.
휘트니 미술관의 설립 이념 중 하나가 살아 있는 화가에 대해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이미 죽은 지 한참인 화가들이 중심인 다른 미술관과는 차이가 많은 편이었다.
“근데 오늘 같은 주말이면 사람 엄청 많은 거 아니야?”
“그럴 수도? 내 기억에도 꽤 많았던 것 같은데…….”
“아이고, 정신 하나도 없겠구만.”
입장료까지 있는 미술관이지만 뉴욕 한복판에 위치한 큰 미술관인 만큼 주말에는 사람이 많으리라.
인파에 밀리는 것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제일이었다.
그에 따라 꽤나 이른 아침에 출발한 우리. 일단 우리의 계획은 간단했다. 점심을 근처에서 먹고 관람을 할 예정이었기에.
하지만 사람이 많다면 아무래도 관람에 시간이 더 소요되리라.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음 일정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으니.
“……저녁까지 먹고 올까?”
“이왕 뉴욕까지 가는 건데 그게 좋지 않을까?”
나 또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시간에 쫓겨 제대로 작품을 보지 못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지 않겠는가.
다이애나 또한 내 말에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그럼 맛있는데 좀 찾아봐야겠네.”
“내가 찾아볼게.”
이제는 거의 한 몸이나 다름없어진 스마트폰. 난 그걸 활용해 적당한 식당을 찾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행동을 막은 건 뜻밖에도 다이애나였으니.
“거기 아무것도 안 하는 뒷좌석. 얼른 맛집 검색해 볼 거지?”
그녀는 운전석 옆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며 자연스럽게 뒷좌석의 클리프에게 입을 열었다.
“……아니 왜 나한테만 그래?”
억울하다는 그의 말투에도 다이애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본인의 운전대를 가리키며 할 말만 전할 뿐.
“난 운전하잖아.”
“……옆자리 윤성도 운전 안 하잖아.”
“얜 혹시나 내가 실수할 때 길 알려 줘야지.”
“네비가 다 알려 주는데 그게 뭔…….”
“그래서 안 하겠다?”
“……놉. 하긴 할 거지요. 나 맛있는데 잘 찾음. 걱정 놉.”
결국 승자는 다이애나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클리프는 자연스럽게 본인의 폰으로 식당들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의 의견들도 때때로 잘 물어보면서 말이다.
“고기 좀 썰까? 스테이크 맛있는 데 새로 생겼다는데.”
“저녁으로 너무 헤비한 건 좀…….”
난 고기도 좋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스테이크란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으니까.
“그럼 윤성도 있으니까 동양식은 어때?”
“동양식?”
동양식이라고 해도 범위가 너무 넓었다. 그러나 나와 달리 미국인들이 동양식 하면 떠오르는 게 있는 듯 보였다.
“스시라던가 그런 거.”
스시. 일본식 초밥을 말하는 그 말에 난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오랜만에 그걸 먹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어쩐지 그걸 동양식이라고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리프는 뒤에서 나와 다이애나의 의견을 물어보는 중이었다.
“스시 좋지 않나? 우리 중 해산물 못 먹는 사람 없지?”
“……없을걸. 윤성, 너도 먹지?”
“……잘 먹어. 딱히 가리는 거 별로 없고.”
이대로면 초밥을 먹으러 가게 생겼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으니.
“근데 스시는 일본 음식이잖아. 윤성은 한국인 아니야?”
“……한국인 맞아.”
“그럼 이왕 뉴욕까지 가는 거 한식도 도전해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솔직히 좀 놀랐다. 내가 그녀의 그림에 대해 조언을 해 줬기 때문일까. 다이애나가 나에 대해 많이 알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내가 같이 간다는 이유로 한식을 먹자고 할 줄이야.
딱히 가리는 거 없는 클리프는 그녀의 말에 냉큼 찬성을 했다.
“오호. 그럼 한식 당첨! 기다려봐 가게 몇 개 추려 볼 테니까.”
“그래. 잘 추려야 하는 거 알지? 내 입맛 나름 고급이다?”
“어련하시겠어요. 윌슨님. 부잣집 딸래미인거 잘 알고 있습죠.”
“부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미각이 날카로운 거라고.”
그 외에도 우리들의 대화는 끊기질 않았다. 음식부터 시작해 지금 가는 휘트니 미술관에 대해서까지. 쉴 틈 없이 이야깃거리가 튀어나왔으니까.
‘과연. 이 세 명이 가니까 대화가 끊이질 않네.’
그 덕분일까. 차를 타고도 무려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 * *
간단한 점심 식사 후 우린 휘트니 미술관 앞에 섰다. 뉴욕에서도 꽤 뜨거운 동네인 미트패킹 지역. 거기에 위치한 만큼 확실히 사람이 많았다.
“윤성은 혹시 휘트니가 처음이야?”
다이애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뉴욕에서 가본 미술관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처음이긴 하네.”
“진짜?”
“응. MoMA나 메트로폴리탄은 가 봤는데, 여긴 처음이야.”
어린 시절 처음 미국에 왔을 때였다. 그 당시 난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뉴욕의 여러 미술관들을 다녔다.
그중 휘트니 미술관은 아쉽게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오면 아무래도 우선순위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뉴욕 현대 미술관보다는 후순위로 밀리는 게 휘트니 미술관이었기에.
여기에도 좋은 작품이 많이 있었다. 솔직히 현대 미술을 보기 위해선 이 미술관도 괜찮은 선택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상대적으로 잘 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으니.
“아무래도 여긴 기획전이 위주라고 들었거든.”
“휘트니가 좀 그런 편이긴 하지. 그래서 일부러 원하는 기획전일 때 여러 번 오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니까.”
기둥 없는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이유. 그건 휘트니 미술관의 5층 덕분이었다. 5층에서 8층까지가 주요 전시관으로 사용하는 휘트니.
그중 핵심은 아무래도 큰 공간에서 기획전을 위주로 하는 5층에 있었으니까.
“으흠. 그렇다고 해도 휘트니가 처음인 미대생이라니, 이거 귀한걸.”
그 말에 난 슬쩍 얼굴이 뜨거워졌다. 미술을 배운다는 입장에서 여러 작품을 보러 잘 다니지 않는 건 분명한 약점이었기에.
“은근히 시간이 안 나더라고…….”
변명처럼 중얼거린 내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생각해 보면 윤성은 미국 태생은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네.”
이해한다는 그 기색에 난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남의 작품을 관람하는 것.
그건 내 작품을 그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난 관람을 상당히 좋아하는 축에 들었다.
‘과제 때문에 왔지만, 오늘 재미있을 것 같네.’
휘트니하면 이 미술관 못지않게 유명한 게 있었다. 바로 내가 조만간 참가를 하려고 고민 중인 미술계 행사였으니.
‘휘트니 비엔날레 때문에라도 한 번은 제대로 살펴보려고 했으니까.’
그린카드라고 불리는 미국의 영주권. 그걸 얻으며 난 정식으로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다.
같은 휘트니란 이름이 붙어 있는 만큼 난 조만간 이 미술관에 한 번 들를 예정이긴 했다.
비록 비엔날레와 미술관이 그렇게까지 큰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