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선택지가 많은 주제
기본 주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필립을 통해 전달받았다. 총괄 큐레이터가 다른 휘트니 비엔날레의 행사 관계자들과 정하는 것. 그게 큰 주제였으니까.
“미리 주제를 이야기해 드렸는데…… 혹시 한번 고민을 해 보셨나요?”
경계선. 그건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다.
“아, 물론 아직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으니, 무리하실 필요는 절대 없으십니다.”
부담을 줄 생각은 없다는 듯. 그녀는 두 손바닥을 보이며 날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크게 부담을 느끼진 않았다. 경계선이라는 주제 자체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것이었으니까.
“일단 고민은 좀 많이 해 봤지만…… 아직 이거다 하는 건 없었습니다.”
“아하. 작가님께서도 느낌이 오셔야 작업을 하시는 타입이시군요.”
그러면서 묘하게 눈이 반짝거리는 게 어째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느낌이요?”
“예!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감. 그걸 잡아서 쓰는 작가님들 중 하나란 소리였습니다. 역시 작가님…….”
‘그거…… 모든 화가들이 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닌가?’
저게 왜 감탄사를 들어야 되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럼 일단 감을 잡으시면 후루룩 그리시는 타입이신가 보군요! 그림 그리시는 속도가 빠르시다는 걸 보면요.”
“예…… 뭐. 그거야 그런 편이긴 한데요.”
“그럼 제가 그걸 볼 수 있는 거죠? 작가님의 작품이 어찌 진행되는 지요.”
“당연히 보시겠죠. 제가 중간 과정을 보실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니까요.”
이제는 한참 전 과거인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 행사를 그런 식으로 치른 나였다. 큐레이터에게 나와 박현민 선생님의 작품을 중간중간 보여 드렸었으니까.
‘원활하게 소통을 해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이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난데없이 갑자기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예?”
갑작스럽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그녀를 보며 난 되물어 보고 말았다. 고맙다며 기쁨의 미소를 짓던 그녀는 뭔가 깨달은 듯 웃음이 흐려졌다.
“아, 아니. 엄청 좋은 방법이라는 소리였습니다. 아하하하.”
그러더니 민망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는 게 아닌가.
‘나만 이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사소통에 대한 고민에 빠지려고 할 때였다. 필립이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입을 연 것은.
“알 만하군요. 모리엔. 당신…….”
“콜록. 콜록. 그, 그게요.”
“뭐. 괜찮습니다. 작가님에게 해가 될 건 절대 없어 보이니…….”
“그야 당연한 말씀이시죠! 이번 휘트니 비엔날레는 무조건 성공해야 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상대방의 열정이 엄청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오죽하면 단숨에 앞에 놓인 그 뜨거운 커피까지 들이마실 정도겠는가.
‘음…… 이렇게 되면 그냥 이동하는 게 낫겠는데?’
그녀의 잔이 다 비워져 가는 게 눈에 보였다. 보아하니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여기서 한참은 더 있을 것 같았다.
커피라도 한 잔 더 따랐다간, 그걸 다 마시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은 하나지. 뭐.’
난 일부러 스마트폰을 들어서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성공도 좋고 다 좋은데…… 나머지는 식사나 하면서 하시죠. 슬슬 약속한 식당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런 내 행동은 효과적이었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반응하도록 만들었으니까.
“정말 그렇군요.”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시간을 확인한 필립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저희가 예약한 식당으로 움직이시죠. 스테이크가 맛있는 집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난번 클리프네와 함께 왔을 때 먹어 보지 못한 스테이크. 그걸 오늘 먹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 * *
경계선. 그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였다. 그렇기에 더 고민이 많았다.
선택지가 많은 주제이기 때문일까. 어떤 경계선에 대해 표현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음식 나왔습니다.”
물론 음식이 눈앞에 있을 때는 그거에만 집중해야 하는 법. 그렇기에 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접시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스테이크는 먹음직스러웠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게 분명 내가 원하는 대로 잘 구워진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전생에서는 고기 자체도 먹기 어려웠는데…… 이번 생에서는 진짜 호강한다니까.’
이럴 때마다 다시 태어나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지금 시대에 환생하지 않았으면, 이 맛있는 음식들을 다 먹지 못했을 테니까.
한 입 거리로 잘라 입에 넣으려는 그때, 내 앞자리에서는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막 고기를 썰어 입으로 가져가려던 난 멈칫했다. 필립이 진지한 어조로 직원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미디엄으로 시켰는데, 이건 거의 웰던이 아닌가요?”
“이건 분명 미디엄입니다만…….”
“무슨 미디엄이 이렇게까지나 붉은색이 안 보입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거의 블루를 시켰어야 하나 보네요.”
미디엄과 웰던. 둘 다 고기의 굽기를 말하는 방식이었다.
필립이 원래 시킨 건 겉 정도를 구워 주는 미디엄이었다. 그런데 나온 건 속까지 바짝 익은 웰던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블루까지 말씀하시기엔…….”
블루는 피가 철철 흐르는 굽기의 정도. 솔직히 말하면 내 눈에는 그냥 생고기에 가까운 게 블루였다.
필립은 블루를 해야 미디엄을 주냐고 비꼬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이 고기가 너무 익혀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으니.
“일, 일단 주방에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쯧. 당연히 그러셔야죠.”
반쯤 협박하는 필립을 보며 난 고기를 바라보았다. 바싹 익힌 게 먹기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필립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같은 고기라도 굽기의 차이에 따라 맛이 천지 차이죠.”
“그렇다고 듣긴 했어요.”
“자라리 작가님의 것처럼 미디엄 웰던이었으면 제가 그냥 먹었을 테지만…….”
“이건 뭐 중간에 걸친 것도 없이 완벽한 웰던이라 제가 컴플레인을 걸 수밖에 없네요.”
필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직원이 달려왔다. 상급자로 보이는 그는 정중한 사과와 함께 얼른 다시 고기를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다.
종업원의 대처가 마음에 들었는지, 굳어있던 필립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더니 이내 주방에서 요리하는 사람의 고충까지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실 주방장도 쉽지는 않겠죠. 까딱 잘못하면 그냥 더 구워지기 쉬우니까요.”
“그렇죠. 원래 미디엄과 미디엄 웰던, 그리고 웰던은 다 한 끝 차이니까요.”
“여기 사람이 좀 많은 것도 아니니…… 주방에서도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모리엔과 필립이 도란도란하는 이야기. 이것의 정점은 새로 나온 고기를 볼 때였다.
“음. 역시 전 미디엄이 취향입니다. 맛있네요.”
필립의 스테이크와 내 고개를 번갈아 보았다.
한 끗 차이라고 할 만큼 미묘한 굽기의 차이. 미디엄과 미디엄 웰던. 하지만 둘은 엄연히 맛이 다른 모양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듯 그는 내 음식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작가님께서는 맛이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제건 맛있어요. 고기도 부드럽고요.”
“아하하. 그거 다행입니다.”
웃음을 터트린 필립은 다시 한번 종업원을 불렀다. 그러더니 가볍게 술을 주문하는 게 아닌가.
“여기 고기에 어울리는 와인 좀 볼까 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메뉴판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술 드실 거에요?”
사실 이 자리는 엄밀히 따지면 나와 모리엔의 첫 미팅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렇기에 간단한 반주 정도는 해도 괜찮긴 했다.
“술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도수가 제일 낮거나 없는 것으로 시킬 겁니다.”
“아하.”
“그래도 스테이크인데, 와인 한잔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씀이 맞죠. 아 근데 작가님의 나이가 안 되는 것 아니에요?”
모리엔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양인 특유의 동안인 얼굴 덕분일까. 그녀는 내가 아직 술도 먹지 못하는 어린 나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작가님께서 어리시긴 하지만, 와인 드실 수 있는 나이는 넘으셨죠.”
“아, 그럼 작가님께서도 한 잔 정도는 마셔 보는 게 좋을 것도 같은데…….”
“……그래도 돼요?”
“법정 나이는 넘으셨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법정 나이. 그러니까 술을 마실 수 있는 자격을 나이로 제한한 것이었다. 솔직히 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참 재미있는 제도라고 생각했다.
조선에서는 그런 제도가 없었기에 더 특이하게 여겨졌다.
당시 조선에서는 어려도 본인이 원하고 부모가 허락하면 술 정도야 충분히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달랐다. 어린이와 성인을 명백하게 구분하고 있었으니까.
‘가만…… 이거도 일종의 경계선 아닌가?’
나이라는 경계선. 그걸 가지고 성년과 미성년을 나누는 것이었으니. 경계선이라고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썰던 고기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스테이크. 하지만 모양도, 색깔도, 눈앞에 있는 두 사람 것과는 좀 달랐다.
특정 기준에 맞춰 굽기를 달리했으니, 당연히 다른 것이리라.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실수할 정도로…… 둘의 경계선이 약하다는 거지.’
어떤 하나의 단계에서 그다음으로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그걸 경계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기의 굽기에도 경계선을 사람이 만든 것처럼. 인간이 성장하는 것에 있어서도 사회는 경계선을 만들어 냈다.
그 순간이었다. 나이프에 내 얼굴이 비친 것은. 이 식당이 좋은 곳이기 때문일까. 나이프는 투명하기 짝이 없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눈코입까지 다 보여 줄 정도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내 나이가 갓 성인이 된 나이인가.’
20대. 10대인 미성년자 시절에서 벗어나 이제 본격적으로 성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나이.
보호자 없이 혼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시기가 이 시기였다. 그럼에도 직접 그 나이의 한복판에 있는 내 체감은 좀 달랐다. 그냥 느끼기에는 10대와 달리진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날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여기 이 자리도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없이 나 혼자 이렇게 나와 있지 않은가.
하물며 이제는 눈앞에 있는 명백한 성인인 두 사람이 술까지 권하는 중이었다. 내가 완전한 어린이였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청소년들을 보고 경계선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 식사를 마친 후 돌아가면 한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실마리가 ‘경계선’이라는 주제에 맞는 그림을 만들어 내도록 이끌어 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작가님?”
“아, 죄송합니다. 뭔가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아하하. 괜찮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무알콜로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이 다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원하시면 그 중 하나를 선택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뉴욕에서 머물기로 했다. 필립이 날 위해 좋은 호텔이라는 숙소까지 구해다 주었으니.
‘음…… 한 잔 정도는 도수가 좀 들어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비록 지금이 반쯤 일하는 경계선에 걸쳐져 있지만, 가벼운 와인 한 잔 정도는 마셔 봐도 좋으리라.
다시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무알콜도 좋지만 약간의 도수 있는 와인도 선택지 중 하나였기에.
“전 이거 할래요.”
이름이 멋있어 보이는 붉은 와인. 샤또로 시작하는 그 와인을 가리키며 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