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작가님은 이런 류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여러 번 습작을 거친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나처럼 다양한 종류의 물감을 사용한다면 더더욱.
유화는 덧칠하면서 하고 수채화는 수정하면서 완성해 가는 게 작품인 법.
그런 의미에서 중간에 한 번 작품을 보여 주는 건 내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곤 했다.
그걸 아는 난 필립에게 최대한 빨리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는 것만큼 그림에 새로움을 더하기 좋은 건 없었으니까.
그런데 필립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옆에는 이미 한 번 얼굴을 본 여성이 있었기에.
“어…… 진짜 같이 오셨네요?”
“당연히 같이 와야죠. 작가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오늘 못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모리엔 큐레이터. 그녀는 며칠 전 내게 연락이 왔었다. 무척이나 미안한 목소리로 그녀는 내게 연신 사과를 전했다.
급하게 일이 생겨 오지 못할 것 같다고.
나야 미리 연락만 준다면 언제 오든 상관이 없었으니, 다음에 연락만 잘해 주고 오라고 말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바로 어제 급하게 다시 연락이 왔다. 오늘 에일대로 찾아오는 필립과 함께 올 예정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올 건지 말 건지 애매했는데…… 진짜로 같이 왔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을 기다린 나였다.
솔직히 나를 포함해 다른 화가들도 담당하고 있는 그녀였기에. 바쁘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과 좀 다른 대답을 하는 게 아닌가.
“아, 그건 아무래도 저희가 보러 간다고 하면 긴장하는 작가님들이 계셔서요. 그래서 서프라이즈!”
“…….”
“물론 신 작가님이야 그렇지 않으실 것 같았지만…… 아핳핳.”
“…….”
“……농담인데, 안 웃으시네요.”
미국식 농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덕분에 당연히 웃기는 부분도 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내 표정을 보더니 어색하게 웃는 모리엔 큐레이터. 원래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나타난 것이 사뭇 민망한 기색이었다.
어색한 어투로 알 수 없는 농담을 건내던 그녀. 모리엔은 금세 진지한 눈빛이 되어 사과부터 전했다.
“안 온다고 했다가 이렇게 찾아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실은 제가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싶어져서요…….”
내 작품을 좋아하는 게 피부로 느껴지던 그녀였다. 사실 화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이를 매몰차게 대할 순 없었다.
자연스럽게 내 말투는 부드러워졌다.
“저야 상관없는데요. 그럼 처음부터 온다고 해도 되는 거 아니셨어요?”
“물론 전 그러고 싶었는데…… 웬 진상이 갑자기 무조건 와야 한다고 했다가, 안 와도 된다고 해서요.”
“……예?”
순간적으로 음울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였다. 그 알 수 없는 소리에 난 다시 한번 더 물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러나 모리엔은 내 의문 어린 얼굴을 보고 손사래만 칠 뿐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작가님에게는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론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여기서 내가 더 물어보는 것도 이상했다. 거기까지만 말한 난 작업실 안쪽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이쪽으로 오시죠. 작품이 세 개라서 안쪽에 두었거든요.”
휘트니 비엔날레에 낼 작품은 총 세 작품이었다. 난 그 작품을 본 두 사람이 어떤 반응을 할지 두근거리며 작품 앞으로 둘을 안내했다.
* * *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그 미친놈.’
모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신규 큐레이터였다. 경력도 짧을뿐더러 막강한 배경이 있거나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 때문일까. 종종 화가들이 그녀를 무시하는 일이 있었다. 특히나 이번 휘트니 비엔날레처럼 큰 행사에 참가하는 화가들은 더더욱.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에도 어떤 미친 자식이 기어코 일을 벌이고야 말았으니.
‘내가 안 오면 작품을 다 부숴 버릴 것처럼 하더니…… 막상 간다고 하니까, 오면 문 안 열어 주겠다고 하는 건 뭐야?’
본디 예술가라고 불리는 이들의 정신세계는 비범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그 어느 시대보다 작가의 창의력과 기획력을 시험받는 지금. 이런 화가들의 면모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 때문일까. 혼자 끙끙거리며 미친 짓을 하는 화가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원래 모리엔은 오늘 그런 화가 중 한 명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그 또라이가 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협박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계속 연락을 무시하다가 간다고 하니까…… 오지 말라고 하는 꼴이라…… 안 봐도 작품은 뻔하겠네.’
그런 화가 억지로 찾아가 봐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물론 위쪽에 보고하는 건 잊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휘트니 측에서 다른 화가를 찾아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좋게 생각하자. 그 덕분에 오늘 윤성 신 작가님의 작품도 먼저 볼 수 있는 거니까!’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원래대로면 와서 보지 못했을 신 작가님의 휘트니 출품 작품.
비록 중간에 보는 것이기에 완성작은 아니겠지만 그게 어디인가!
‘솔직히 말하면…… 더 좋지.’
완성된 미술품은 다른 수많은 관객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리엔은 관람객이 아닌 휘트니 비엔날레의 큐레이터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무려 윤성 신 작가님의 미완성된 작품도 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
그녀가 휘트니 비엔날레의 큐레이터가 아니었다면, 절대 볼 일이 없는 귀한 작품. 이걸 본다고 생각하자 가라앉았던 그녀의 기분은 서서히 좋아졌다.
그런 그녀의 기분을 알 리 없는 윤성 신 작가님. 그분은 그녀와 필립을 작업실 안쪽으로 안내하는 중이셨다.
“세 작품이 나름 재미있는 특징이 있거든요. 잘 관찰해 보세요.”
“재미있는 특징이요?”
귀가 번쩍 뜨였다. 이건 중요한 정보였다. 작가가 의도한 뭔가가 있다면 관람객들도 그걸 알고 보는 게 제일이었으니까.
전시회를 기획하는 그녀 같은 큐레이터들은 그에 걸맞게 동선을 만들어야 했다.
“작가님. 그거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시죠.”
“음…… 일단 한번 보세요.”
‘우리 윤성 신 작가님께서는 이런 타입이셨구나.’
화가들 중에 그런 사람이 종종 있었다. 같이 전시회를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큐레이터들을 한 명의 관람객으로 먼저 보는 부류. 그렇다면 그녀는 일단 작품을 잘 봐야 했다.
그래야 우리 신 화백님에게 뭐라고 말도 해 드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어디 한번 볼까.’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작품. 그건 세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상 앞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밥을 먹고 있는 거네요.”
“그렇죠.”
윤성 신 작가님 덕분에 한국에 대해 잘 아는 그녀. 모리엔은 이들이 젓가락을 사용해 김치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섬세한 색과 선들은 생생하게 이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한국인들이 고유의 전통 음식 같은 걸 먹는 걸 표현하신 건가? 그런데 좀……뭔가 이상한데?’
각자의 앞에 놓인 음식부터 시작해, 젓가락을 사용해 열심히 뭔가를 먹는 이들까지. 얼핏 보기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육감이라고 불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뭐라 콕 집기 어려운 그녀의 감각이 이 그림이 좀 이상하다고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채색이랑 명암, 혹은 농도 같은 게 부족해 보이는 것이야…… 아직 미완성이시라고 하셔서 그런 것일 테고…… 진짜 뭐지?’
뭐라 딱 꼬집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 그림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는 중이었으니.
‘눈빛 때문인가?’
단순히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한 눈초리를 가졌긴 했다. 불안한 듯이 서로를 흘끔거리는 그림이었으니까.
그녀가 그림에 빠져들어 관찰하는 사이. 옆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흠…… 아직 미완성이라 좀 애매한 느낌인데요. 작가님.”
필립이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가만히 그림만을 뚫어져라 봤다. 뭔가 그녀가 찾지 못한 것이 있을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녀가 그림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윤성 작가님과 필립의 대화는 진행 중이었다.
“그래요?”
“예. 한국인들이 전통 음식을 식사하는 모습이라…… 색다른 느낌이긴 한데, 좀 약하긴 할 것 같아서요.”
그림은 잘 차려입은 세 명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었다. 상 위에는 불고기, 김치, 비빔밥 등 각종 한식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었다.
윤성 신 작가님 특유의 세밀함과 묘한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그 안에서 어쩐지 서로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들.
좋은 그림이긴 했지만, 필립의 눈에는 미완성인 게 더 크게 다가온 느낌이었다.
“서로 뭔가 수상할 정도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게 의미심장하긴 하지만…… 역시 좀 약해요.”
“……필립의 눈에는 그렇게만 보였군요?”
“예? 그렇게만 보이다니요?”
“아뇨. 대충 어떤 식으로 완성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씀하신 작가님께서는 은근하게 미소만 지으셨다.
뭔가를 더 많이 알고 있는 자 특유의 의뭉스러운 미소. 거기다 두 사람의 묘한 대화들. 필립과 윤성 작가님의 말은 모리엔에게 분명한 힌트가 되었다.
만약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위화감만 느끼고 넘어갔을 그 그림. 눈앞의 작품에서 그녀는 한 가지 비밀을 발견하고야 말았으니까.
“아! 표정이…….”
그제야 그녀는 세 사람의 묘한 눈길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냥 밥을 먹을 뿐인데 왜 서로를 저렇게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그림의 비밀을 알게 되자 그제야 저 눈빛들의 의미가 이해되었다.
“와…… 작가님 이 그림 진짜 재미있는데요?”
“예? 재미있다니요?”
필립은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리엔은 그런 필립의 말에 대꾸할 새가 없었다.
자신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이 감탄! 이걸 작가님에게 말씀드리지 않고서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건 일종의 다른 의미에서 반전화네요. 작가님은 이런 류를 진짜 좋아하시는군요!”
윤성 신 작가님의 작품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림 속에 숨어 있는 비밀들이었으니.
평범해 보이는 풍경이 알고 보면 그렇지 않았던 작품도, 단순해 보였던 그림 안에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에 ‘반전화의 화가’라고 불리는 윤성 신 작가님. 이번 작품은 다른 의미에서 반전을 보여 주는 중이었다.
“반전이 좀 있는 게 재미있으니까요. 그게 사람들이 더 이 그림을 가지고 싶어지게 만들 테고요. 근데 벌써 눈치채신 거예요?”
작가님은 그녀가 뭔가를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신 듯 입을 여셨다.
“큐레이터님이 이렇게 빨리 알아차리셨을 정도면…… 생각보다 제가 실마리를 많이 남긴 건가 싶은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두 분의 대화가 없었으면 몰랐을 거예요!”
그녀의 진심이었다.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을 뿐, 이거다 하는 느낌은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전혀 없었으니까.
“……저기요. 두 사람만 알지 말고 저도 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가만히 있던 필립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둘만의 대화에서 소외된 것이 퍽 아쉬운 표정이었다.
“작가님 제가 말해도 되나요?”
“그럼요. 저도 궁금한걸요.”
윤성 신 작가님께서는 여전히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신 채였다. 정말로 그녀가 그의 의도를 전부 알아차린 건지 궁금하신 모양이셨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부응해 주는 게 그녀의 할 일.
모리엔은 큐레이터가 아닌 작품을 설명해 주는 도슨트에 빙의해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