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7
17화 이 길을 걸어가길
이민철은 아이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작업실에 혼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는 요즘 들어 종종 이렇게 손자를 지켜보는 일이 많아지고 있었다.
‘우리 손자는 집중력도 좋지.’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는 이것저것 물어보는 걸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이는 반드시 하는 일이 있었으니.
‘설명을 들은 뒤에도 꼭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네.’
손으로 직접 물감을 만져 보는 윤성이. 그 와중에 아이가 입으로 먹어 보려는 것을 겨우 막은 민철이었다.
그만큼 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각각의 재료들이 가진 특성을 온전히 파악하고,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뭐든 배우겠다는 아이의 욕구. 그 지식욕은 마치 한참 동안 그림에 굶주린 사람 같았다.
‘어제는 캔버스를 찢어 보았으니, 오늘은 뭘 하려나.’
아이가 하나하나 배워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발전 속도 때문일까. 손자가 여러 가지를 배워 가는 것. 그 자체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가 여느 때처럼 손자를 보며 흐뭇해하고 있는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똑똑―
“아빠. 저예요.”
급작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 그 목소리는 민철도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저 들어가도 되나요?”
“내가 나가마.”
민철은 힐끔 아이를 바라보았다. 누가 옆에서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한 상태였다.
‘저걸 방해할 수는 없지. 흘흘.’
그 또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손자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민철은 상대를 안쪽으로 들이는 대신 본인이 직접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탁―
조심히 문을 닫는 그. 민철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윤성이 때문에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민철의 딸이자 안에 있는 손주의 엄마인 가영. 그녀는 퍽 진지한 눈빛으로 민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애가 집중 중이다. 다른 방으로 가자꾸나.”
가영의 심상치 않은 표정 때문일까. 민철은 그녀를 다른 가족들이 있는 거실이 아닌 작업실 옆방으로 안내했다.
“그래, 윤성이 때문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냐.”
“제가 이런 소리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것 잘 알아요. 아빠.”
민철의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 가영은 결심했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어딘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빠. 아니, 아버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평소와 달리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 부른 가영. 그녀의 입에선 민철이 익히 예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윤성이를 그냥 귀여운 손주로 대해 주세요.”
“그게 무슨…….”
민철이 더 자세히 묻기 전. 가영의 말이 좀 더 빨랐다.
“아버지의 후계자가 아니라요.”
힘겹게 입을 연 듯한 그 목소리. 거기엔 숨길 수 없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저라고 왜 모르겠어요. 아이가 재능이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비범한 아이는 누구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물며 아이가 두각을 드러내는 분야는 그녀에게 익숙한 분야였기에.
한때 그녀 또한 붓을 잡았기에 알았다. 그녀의 아들의 재능은 그야말로 찬란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에 그건 오히려 독이었다. 그것도 매우 치명적인.
그녀의 아들이 이민철 화백의 손자인 이상, 그 재능은 언젠가 아이의 목을 조이리라.
이민철.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대중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그 이름.
살아 있는 화가 중 가장 그림값이 높은 화가를 꼽으면 늘 순위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였기에.
추상적이고 독특한 그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묘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건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대중들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뚜렷할 정도였다.
덕분에 그녀의 아버지 이민철은 언론도 많이 타는 화가였다. 그 높은 이름값은 평범한 가족에겐 축복이었을 것이다.
단, 그 가족이 이민철과 같은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뼈저리게 느낀 가영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목소리는 절로 무거워질 수밖에.
“제 아들이 재능이 있는 건 확실하죠. 하지만…… 적당한 재능으로는 그냥 이민철의 손자가 될 뿐인걸요.”
그녀 본인이 그랬다. 한때 천재라고도 불렸다. 환경도 좋았다. 그 누구도 그녀가 붓을 잡는 걸 반대하는 이가 없었으니.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그 모든 건 독이었다.
그녀가 어떤 그림을 그려도, 어떤 작품을 내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가영이 만든 작품은 이민철의 딸이란 이름을 단 한 번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진 아직 한참 현역이시죠.”
가영은 방금 보았던 작업실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작업실은 늘 그대로였다.
수없이 쌓여 있던 종이들, 제각각의 크기를 자랑하는 캔버스들. 그건 민철이 아직도 계속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윤성이는 저와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거에요.”
유명 운동선수의 자식들도 종목이 같으면 그 부모와 비교된다.
미술계도 비슷했다. 문제는 예술은 운동과 달리 은퇴의 시기가 죽을 때라는 것.
건강한 민철은 아직도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는 현역 화가였다. 아마 몇 년간은 계속 그러리라.
“전 제 아들이 그 길을 걸어갈 줄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 둘 수 없어요.”
“…….”
딸아이의 솔직한 말에 민철의 침묵이 길어졌다. 막연히 상상하는 것과 그 어려움을 직접 당사자에게 듣는 것은 달랐기에.
꽤 오랜 침묵 후 그는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몰랐구나.”
머뭇거리는 어조에서 느껴졌다. 그의 당황스러운 심정이.
“예술은 어차피 자기와의 싸움이야. 헌데…….”
“예. 잘 알죠.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것. 남과 굳이 비교할 필요 없다는 것.”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소리였다. 열심히 하면 된다고. 남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던가.
“제가 그 소리도 수없이 많이 들었죠. 근데요, 아빠. 솔직하게 물어볼게요.”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계통. 이 미술 쪽에서 정말 남과의 비교는 전혀 없다고요?”
“…….”
딸의 질문에 민철은 침묵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가영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오랫동안 묵혀 둔 마음이었다.
“전 수없이 많이 들었어요. 넌 이민철의 딸이니까. 혹은 이민철 화백의 따님이 어쩌고…… 하는 그런 소리요.”
그건 가영이 잘 그릴 땐 당연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가영이 못 그릴 땐 “왜 그것밖에 안 되냐”는 비난의 이유가 되었다.
모든 건 가영이 아닌 민철이 중심이었다.
“아마 윤성이가 이쪽에 들어와도 똑같은 소리 들을 듣게 되겠죠. 제가 들은 그 모든 말이요.”
이미 그녀란 전적이 있었다. 덕분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그런 상황이 말이다.
“제가 궁금한 건 딱 하나예요, 아빠.”
마른침을 삼킨 가영은 드디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 말을 반드시 하고 싶었기에.
“윤성이는 저랑 다르겠죠?”
어머니로서의 희망이 담긴 말이었다. 진지한 딸의 고민에 민철은 조심스럽게 답하기 시작했다.
“네가 솔직히 말하니, 나 또한 솔직히 대답하마. 확답은 못 한다.”
“그럼…….”
“하지만 이거 하나는 말해 줄 수 있겠구나.”
뭐라 말하려던 그녀의 말문을 막은 민철.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난 오랜 기간 수많은 아이들을 봐 왔다.”
과거를 떠올리는 그의 얼굴은 아련해졌다.
“그중에는 언론에서 영재라고 치켜세운 인물도 있었고, 정말 세기의 천재라 불린 이도 있었지.”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서도 그런 인물은 많았다. 하지만 민철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윤성이는 다르단다.”
“달라요?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그래. 나이에 맞지 않는 집중력이며, 그 모든 게 다 특별하지만…….”
아이가 범상치 않다는 증거는 여럿이었다. 그러나 그중 민철의 이목을 사로잡은 건 단 한 가지였다.
“그중 제일은 딱 하나지. 저 아이는 그림에 제 뜻을 담을 줄 알거든.”
가영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모든 화가는 그림에 자신의 의지를 담는다. 그런데 그게 왜 특별하다는 말인가.
“보통 저 나이대 아이들은 물체를 똑같이, 그리고 잘 그리려고 하지. 너 또한 그랬고.”
저 나이대뿐만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미술학도들은 다들 그랬다. 자신만의 창작 대신 말이다.
“헌데, 윤성이는 생략과 강조를 통해 제 뜻을 확연히 드러낼 줄 알더구나.”
그건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지 확실히 아는 작가라는 뜻이었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기만의 뜻이, 그리고 기술이 있다는 의미지.’
사람이란 신기한 존재였다. 어린 시절 기술이 없을 때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그대로. 상상하는 걸 현실로 뽑아낸다.
하지만 어느 정도 배워서 기술도 생기고 나면 오히려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리라. 남들의 눈을 고려하느라. 자신의 실력에 한계를 느껴서 등.
그렇게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평범해지는 것이다.
이날 이때까지 이 바닥에 있는 민철이기에. 그런 예술가를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제 손자가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특이한 아이인지 말이다.
“그 어린 나이에도 벌써 손에 익은 기술이 있고, 동시에 자길 표현할 의지도 살아 있지.”
그렇게 말한 민철은 가영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 지금 종이와 붓을 주면 뭘 그리고 싶니?”
“저요? 전…….”
순간적으로 돌아온 질문에 말문이 막힌 가영이었다. 딸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본 민철은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망설인다는 게 그 아이와 다른 점이야.”
“그런가요…….”
“아마 윤성이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 보려무나. 아이는 곧바로 대답할 테니. 아니, 곧바로 그려 낼 수도 있을 게다.”
민철의 말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아이의 재능을 말하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럼.”
“물론 아직 어리니 확답은 할 수 없지.”
윤성이는 아직 젊다 못해 어렸다. 당연히 그 재능이 변할 수 있었다. 어쩌면 민철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고.
그럼에도 민철은 확신을 담아 입을 열었다.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 어조였다.
“허나, 난 내 손주가 이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구나.”
이민철. 그는 재능 있는 화가의 더 다양한 작품을 보고 싶었으니까.
“정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좀 지켜보는 게 어떠니. 아직 윤성이는 어린아이 아니냐.”
민철의 말에 가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