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갤러리가 아니라 화가를 위해
리처드 교수는 오늘도 자신의 작업실에 있는 작품을 보며 흐뭇해하는 중이었다.
‘역시나 좋은 그림은 언제 봐도 느낌이 있다니까.’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함께 즐기는 그림 감상 시간.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때였다.
그렇기에 연구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그의 이마는 미미하게 주름이 생겼다.
똑똑―
“크흠. 들어 오십시오.”
“교수님 그……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손님분이 20분 내로 오신답니다.”
그의 연구실 문을 연 사람은 에일대학교 교직원인 톰이었다.
‘전화로 해도 될 말을 찾아오다니. 별일이군.’
리처드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직원이 전화로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직접 연구실로 올라오다니.
아무래도 손님이 보통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난번? 언제 말하는 건가?”
“왜, 저희 미대 쪽에 기부하시겠다며 찾아오실 분이 계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듣자 리처드의 머릿속에 스치는 정보가 있었다. 분명 과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 이런. 이제 이 나이쯤 되니 깜빡하는 게 너무 많아진다니깐.”
“……그래서 기억하고 계신 것 맞으시죠?”
이마를 툭 치는 그를 보며 직원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눈빛이 흔들리는 그를 보며 리처드 교수는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제야 확실히 기억났네. 그래…… 분명 언뜻 들은 기부금의 액수가 꽤 커서 기억에 더 잘 남았지.”
수십억 단위를 넘어 수백억 단위의 기부금을 받는 에일대. 그런 에일대 교수인 리처드에게도 분명 그 금액은 심상치 않았었다.
그제야 리처드는 눈치챘다. 전화나 간단하게 하면 되는 사소한 일인 손님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 이걸 전달하기 위해 왜 교직원인 그가 직접 교수실로 온 것인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게 연락 오신 바에 따르면 이제 30분 내로 도착하신다고 하시니…… 서둘러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호. 뭐. 준비랄 게 있나. 손님 맞이할 다과만 있으면 되겠지.”
한껏 긴장한 그와 달리 리처드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에일대 전체에 기부하는 것이 아닌, 미대에만 하겠다는 것. 그건 좀 특이했다. 그러나 그뿐.
리처드는 결국 평소에 투자하러 오는 기업가들과 비슷하리라 여겼다.
그도 그럴 게, 찾아온다는 사람이 아트 바젤, 이 업계에선 상업적인 측면으로 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이었으니.
* * *
“교수님! 리처드 교수님!”
교정을 거닐던 그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리처드 교수는 복도가 울리도록 불러 대는 상대방을 보기 위해 뒤를 돌았다.
“오. 이게 누군가. 시아나 교수가 아닌가.”
상대는 그의 직장 동료라고 할 수 있는 교수였다. 다른 과 교수였지만, 같은 에일대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기에. 리처드도 이미 잘 아는 얼굴이었다.
“허억. 헉…… 역시 이제 뛰면 힘든 나이군요.”
“후후. 그러게 왜 뛰고 그러나? 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헉헉거리며 뛰어온 상대는 숨을 고르기 무섭게 리처드에게 질문부터 던졌다.
“아니, 제가 방금 엄청난 소식을 들었는데, 사실이에요 교수님?”
“엄청난 소식?”
“아트 바젤 측에서 우리 학교 미대에 기부하겠다면서요. 그것도 꽤나 큰 액수를.”
상대의 입에서 나온 소식에 리처드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이 자리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네가 그걸 어찌 아나?”
당사자인 리처드도 얼마 전에야 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벌써 다른 과 교수가 알고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교수님의 반응을 보니까, 사실인가 보네요.”
“크흠.”
“와…… 무슨 기부를 그렇게 콕 찝어서 미대에만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아무리 아트 바젤이라지만.”
보통 기업들도 에일 대학교에 기부할 때는 전체 학교에 기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특정한 과에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학교 전체나 학생회에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이건…… 말이 기부지, 일종의 투자에 가까웠거든. 알지 않나. 투자는 해당 과에도 많이 한다는 걸.”
“알죠. 그래서 공대 쪽이 제일 부자잖아요. 우리 학교도.”
상대적으로 순수한 기부와 달리 해당 과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투자들. 그건 확실히 학교 전체보다는 특정한 과에 집중되는 케이스가 많았다.
대학 교수의 핵심 업무 중 하나. 그것이 바로 학비를 지원받는 것이었다.
사실 이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지원을 받는 방식이나 기업 등에서 투자를 받는 형식 등 방법 자체는 많았다.
하지만 그중 유난히 어려운 것. 그게 바로 기부란 방식이었다. 이건 투자의 개념과 달리, 오직 가능성만을 보고 무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니까.
“근데 투자에 가깝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음…… 온전한 기부는 아니라는 소리인데?”
“…….”
“흐흐. 알고 싶나?”
“……교수님은 진짜 여전하시네요.”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시에나였다. 에일대에서 리처드 교수는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강단에 선 교수였다. 그렇기에 시에나 또한 이전에 학생일 때 그의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리처드 교수는 그만큼 흥미롭게 미술 수업을 하는 교수님이셨으니까. 그 덕분일까. 그녀는 리처드의 반응 때문에 오랜만에 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교수님께서 그러시니…… 저도 다시 학생이 되어 그 수수께끼 한 번 풀어 보죠.”
“오호. 좋은 태도일세.”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말했음에도 리처드 교수의 반응은 태연했다. 박수를 짝짝 치면서 오히려 부추기는 중이었으니.
“어디 보죠. 온전한 기부는 대가 없이 오직 우리 에일대만을 보고 하는 건데…… 온전하지 않다는 말은, 뭔가를 요구했나 보네요?”
“후후.”
“거기다가 미대 쪽으로만 기부하겠다고 하면서 서명을 쾅 박아 넣은 걸 보니…… 그 대가는 미대 측에서 줄 수 있는 거고요?”
“오오.”
“근데 몇 명이나 되는 교수님들 중에서 대외 협력을 맡고 계시지도 않은 리처드 교수님을 찾은 걸 보면, 교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 같고…….”
“거의 다 왔네! 좀만 더 힘내 보게나.”
그녀의 추측을 들으며 리처드 교수의 두 눈은 한층 더 반짝거리는 중이었다. 적당한 추임새까지 곁들이는 그의 반응에 시에나는 이쯤 되자 정답을 알 수 있었다.
“교수님 인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에요? 아트 바젤이면…… 뭔가 갤러리나 작가 중 하나 연결해 달라고 한 것 맞죠?”
“와우! 브라보.”
리처드는 감탄하며 박수 쳤다. 그러더니 시에나를 향한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자네가 내 학생 때부터 우수하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지.”
“……설마 진짜였어요?”
“그럼 가짜인 줄 알았나?”
아무렇게나 추측한 게 다 들어맞을 때의 놀라움. 그걸 실시간으로 느끼게 된 시에나였다.
“아니 어디에요? 어떤 갤러리길래 그 많은 돈을 쏟아부으면서까지 교수님보고 연결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진짜 궁금했다. 아트 바젤쯤 되면 이미 아는 갤러리가 산처럼 쌓여 있을 텐데. 그런데도 교수님에게 말까지 해서 만들고 싶은 관계라니. 그런 곳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으흠. 갤러리라고 생각하나?”
“……갤러리가 아니면요?”
“방금 자네도 말하지 않았나. 갤러리 말고 다른 존재.”
“……설마 진짜 화가 쪽이에요? 갤러리가 아니라?”
그나마 갤러리는 많은 작품을 보유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가라니! 작가라니!
저 말은 화가가 죽어야 가치가 더 커진다는 순수 예술계에서, 죽은 사람도 아닌 살아 있는 화가에게 아트 바젤이 이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으니.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솔직히 아트 바젤 정도면 화가야 그냥 부르면 되죠. 다들 나가고 싶어서 오랜 기간 심사까지 보는 곳이잖아요.”
아트 바젤이 어디인가. 일단 거기 참석만 해도 차후 경매에서 그림 가격까지 달라지는 곳이었다.
실제로 아트 바젤에 참가한 이후에 주목받기 시작해 소더비나 크리스티에 올라오는 그림의 가격이 폭등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대체 어떤 화가길래 직접 컨택해도 될 일을 리처드 교수님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한다는 말인가.
“누구예요? 그 비싼 몸값의 주인.”
“후후. 그건 말이지…….”
“네네.”
점점 더 목소리가 작아지는 리처드 교수. 덕분에 시에나 또한 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 대단하다 못해 어처구니없을 지경인 화가가 누군지 궁금했기에.
“비밀이라네.”
“…….”
“그렇게 봐도 아직은 알려 줄 수 없네. 아직 그 작가에게 말도 못 꺼내 본 상태거든.”
“그게 무슨…….”
당장에 그 소식을 알려도 모자랄 판국에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니. 오늘 시에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많이 겪는 중이었다.
“자네 말대로 이상하긴 한 경우니까. 우리 귀한 작가님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그럼 언제 그 소식 전달하실 건데요?”
“조만간 할 걸세. 조심스럽게 할 거니까…… 일단 자네는 모른 척 하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뭐 알게 된 정보가 없는데요.”
결국 아트 바젤에서 누굴 찾는지 왜 찾는지 등등 제대로 획득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겨우겨우 추측으로 아트 바젤 측에서 화가를 만나기 위해 기부금을 냈다는 것. 그 정도만 알게 된 상환이었으니.
‘심지어 그나마 안 것도 내가 유추해서 안 거잖아…… 교수님이 알려 주신 게 아니라.’
어딘가 억울해지는 시에나였다.
* * *
드디어 휘트니에 대한 준비가 끝났다.
“흥흥흥.”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림도 다 그렸으니까. 얼른 문안 인사 드려야지.’
몸이 멀어졌다고 해서 부모님께 효를 줄일 수는 없는 법.
다만 그림을 한창 그리는 도중에 하는 문안 전화는 그 길이를 짧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휘트니 비엔날레의 작품이 완성되었으니, 오늘 전화는 좀 더 길게 해도 괜찮으리라.
기분 좋게 영상 통화를 시작한 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네 비행기표를 좀 늦췄으면 좋겠어.”
방학 때 한국에 돌아갈 이야기를 하던 도중 난데없이 들려온 제안. 그에 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저 방학 시작하자마자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요.”
“엄마는 네 전시회 못 본 지도 한참이잖아. 매번 해외에서 하니까 가기 쉽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라고시안 소속인 난 국내보단 아무래도 해외 전시가 많았다. 특히나 최근 들어선 수로 대형 미술제에 많이 참여하는 중이었으니.
해외에서 많이 진행되는 이런 행사의 특징상 한국에서 일하시는 어머니가 관람하시기 어려웠다.
“거기다 할아버지도 이번에야말로 보겠다고 벼르고 계시거든. 아트 바젤 홍콩도 못 가 보셨으니까.”
“……홍콩은 못 오시긴 했죠.”
서울과 가까운 홍콩이었지만 해외를 나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어머니같이 바쁘신 상황이면 더더욱.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당시에 일이 있으셔서 못 오신다는 걸 가지고 얼마나 아쉬워하셨는지.
그걸 알기에 난 결국 두손 두발을 다 들고 어른들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할아버지는 영어도 잘하시니…… 더더욱 미국은 오시고 싶어지시겠군요.”
“원래도 미국을 좋아하셨잖니. 너 기억 안 나? 어릴 때 할아버지가 막 같이 미국 데려가고 그랬는데.”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었다. 난 다른 아이들과 달리 환생을 한 시점부터 기억이 있었기에.
까먹지 않은 이상 내 기억은 어린 시절을 알지 못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온전했다.
“당연히 기억나요. 할머니랑 센트럴 파크도 가고 한걸요.”
“그러니까. 당시 MoMA도 가고 했던 네가 이제는 거기 근처인 휘트니에서 비엔날레를 하다니…… 진짜 세월 빠르다니까.”
“이제 성인이니까 다 큰 거죠. 뭐.”
“다 크긴 무슨. 그 나이면 아직 얘야. 어쨌든 우리 가족들이 다 같이 방학 때 갈 거니까 얼른 표 바꾸라고 하려고 연락했어.”
“방학 때면 한창 휘트니 진행할 때니까…… 좋네요. 비행기표는 얼른 바꿔 놓을게요.”
“그래 그럼. 바쁠 테니, 다음에 또 연락하자. 그때는 할아버지가 직접 연락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어머니와의 대화는 끝이 났다. 온 가족이 내 휘트니 비엔날레에 오실지도 모른다는 희소식과 함께.
* * *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날이 점점 좋아지는 5월. 휘트니 비엔날레가 드디어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