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그래도 사고 싶어서요
잠시간 큰 소란이 일 뻔했다. 그러나 워낙 단호한 도슨트의 대처 덕분일까. 다행스럽게도 소동 없이 무사히 비엔날레는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이 작가님의 마지막 작품이죠. 이건 지금까지와 달리 사람들의 눈빛이 평온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그런데?”
“난 그보단…… 한국적인 면모가 별로 안 보이는데?”
앞의 두 작품이 한식과 한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이번 그림에서도 한국에 관련된 것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게 보였다.
하지만 막상 그런 특징이 눈에 들어오지 않자 조금 실망한 눈빛들이 되었다. 이번 작품은 뭔가 앞선 그림들과는 달라 보였다. 딱히 한국적인 것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평범하게 자판기에서 무언가를 내려 먹는 사람들. 이들이 본 그림은 그런 작품이었다.
“이미 몇몇 분들은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군요. 이건 얼핏 보면 앞선 그림과의 공통점을 모르겠죠?”
이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도슨트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이 그림은 앞선 그림들과 달리 사람이 한국 사람입니다.”
“오!”
“아…… 그런 거였어?”
검은 머리에 백인이라기엔 약간은 노랑 빛이 감도는 피부. 이들의 외향은 분명 동양인이었다. 그러나 그거만 가지곤 이들이 한국인이라고 특징 짓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의문을 떠올리기 무섭게 도슨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다들 식후에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먹는 모습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거죠.”
그녀가 가리킨 자리엔 컵이 나오는 입구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 불이 아직 들어와 있죠? 커피가 아직 다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근데 벌써부터 손을 넣고 있죠.”
“…….”
“크크크. 한국인이 좀 성격이 급하긴 하지.”
“예. 누가 벌써 정답을 말씀하셨네요. 아직 음료가 나오지도 않은 자판기에 손을 넣는 것도 모자라 벌써 뒤에서 자기 것 주문하려고 준비가 완료된 모습. 굉장히 서두르는 게 눈에 보이죠.”
앞선 두 그림이 불안한 시선을 한 것에 비해 이 그림은 사람들의 눈빛부터가 달랐다. 그야말로 확신에 가득 차서 서두르고 있는 모양새였으니까.
“평범한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누가 봐도 한국인입니다. 자! 그럼 세 그림을 같이 한번 보실까요?”
그녀의 말에 다시 사람들이 그림에 집중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 작품을 볼 때와 달리 이렇게 설명을 듣고 보니,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가 경계선 아니었나? 이건 확실히 재미있는 그림들이네.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번 보라고 해 주고 싶은데?’
무엇보다 표현력이 굉장했다. 그림에 있는 아주 사소한 물건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은 게 느껴졌다. 심지어 눈빛으로까지 표현하다니. 화가가 보통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리고 미국인도 흥미를 느낄 만한 요소가 많았다. 일본인과 중국인이 한식을 먹거나 한복을 입으면서 하는 행동들. 이건 미국인에게도 해당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겉모습은 비슷한 이들도 미국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다니.
‘이건 한국인이면 반가워할 것이요, 외국인이면 공감할 만한 그림이네.’
한국 사람이라면 외국에서 보인 한국 문화의 편린에 반가워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 어색한 사람들의 행동과 불안한 눈빛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리리라. 원래 사람이란 존재가 수상한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 더 관심이 가는 법이었으니까.
‘이거 누구 거지?’
작가가 굉장히 영리한 것이 그림에서도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은 작품 옆에 있는 판넬로 향했다. 작품명과 작가명이 거기 적혀 있었기에.
윤성 신. 국적이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이름이 한국식이었다. 물론 중국인이나 일본인일 수도 있었지만, 차경은 한국인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림 하나로 이렇게나 한중일을 뚜렷한 경계선을 만드는 화가가 이왕이면 한국인이면 좋지 않겠는가.
“이야길 듣고 보니 더 그림에 눈길이 가네요. 이런 면들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누군가 차경과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옆에서 들리는 영어에 도슨트는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작가님께서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 잘 안 보이는 것을 잘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작가님이요?”
“예. 이 작품들은 모두 윤성 신 작가님의 작품들이거든요.”
“오호.”
“이번 휘트니 비엔날레의 주제가 경계선인 만큼 미국에서 잘 보이지 않는 동아시아인이 가지고 있는 경계선을 표현하셨습니다.”
이건 동아시아계는 물론,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여러모로 사람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도슨트의 말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사실 이 작품들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비밀이요?”
“힌트는…… 모네의 수련을 아시나요?”
“네. 당연히 알죠.”
워낙 유명한 그림이었다. 게다가 여기 휘트니 비엔날레에 올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기본적으로 미술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었기에.
모네의 수련이 어떤 작품인지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게 힌트입니다.”
“수련? 모네? 그게 왜 힌트지?”
“글쎄다. 난 잘 모르겠는데.”
호기심이 든 사람들은 폰을 들어 검색을 하는 게 보였다. 원래 사람은 궁금한 일은 잘 참지 못하는 법. 자연스럽게 주어진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스마트폰이 동원되었다.
그 순간이었다. 차경의 머릿속이 번뜩인 것은.
“잠깐만…… 이 그림들 말이야.”
“응? 갑자기 왜?”
“이거 아무래도 한 장소인가 본데?”
분명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옆에서 남편 또한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어? 한 장소라니?”
“잠깐만 기다려 봐.”
차경은 그림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녀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생각이 정답일 것 같았다.
“이거 세 개가 이렇게 나란히 있으니까 알겠네. 이 그림들 모두 한 장소야!”
맞췄다는 생각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기쁜 얼굴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그를 보며 그녀는 신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음식을 먹는 방인 것 같고, 여기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는 건 그 앞의 마당 같은 곳인가 봐!”
그림들이 가까운 자리에 붙어 있었기에 그나마 눈치채기 쉬웠다.
물론 작품들 사이에 설명과 작품명이 적혀 있는 안내지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차경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마지막 그림은…… 이 사람들 마시고 있는 거 커피 아니야? 들고 있는 게 누가 봐도 후식용 음료수잖아! 여기 연결 이음새를 다 붙이면 분명 이어질걸?”
그제야 차경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네의 이란 작품. 그것이 비밀에 대한 힌트라는 이유를.
“시간 배경이 아침과 점심, 저녁인 모양인데…… 그래서 잘 봐야 알 수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이 정도면 거의 알라고 알려 주는 수준이지!”
현대 미술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작품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그림들은 사람들을 이해하게 만들기 딱 좋았다.
“그럼 이 그림 알고 보면 연작이었던 거야?”
“바로 그렇지! 그래서 힌트가…….”
신이 나서 말하던 차경의 목소리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도슨트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기에. 자기도 모르게 말을 멈춘 것이었다.
“…….”
그제야 그녀는 알아차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컸기 때문일까. 다들 어쩐지 차경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지는 중이었다.
“후후. 아무래도 이미 눈치채신 분이 계신 모양이군요.”
차경이 민망할까 봐, 도와주듯 도슨트는 다시 사람들의 주의를 본인에게 돌렸다.
그 덕분에 차경은 다시 그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유난히 시선이 가는 세 작품들에 말이다.
한참을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도중이었다. 누군가가 슬쩍 손을 든 것은.
“뭔가 따로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이런 질문을 공식적으로 하긴 좀 민망한데요…… 혹시 이런 그림은 얼마나 하나요?”
그 질문에는 차경도 질문한 당사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작품의 가격을 물어볼 수 있다니. 알고 보니 뉴욕에 숨겨진 부자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비쌀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사고 싶어서요.”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기 때문일까. 물어본 그 사람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왕 알려 주실 것이면, 세 개 다 구입했을 때의 가격을 알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후후. 잠시 후 절 따라오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작품 구매에 대한 건 제가 하고 있지 않아서요.”
그 말을 들은 차경의 손도 번쩍 올라갔다. 도슨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저도 따라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얼마든지 이따가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빙그레 웃는 도슨트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솔직히 가격이 비쌀 것 같기는 했다. 원래도 이런 그림들은 꽤 비싼데 이건 크기도 상당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물어봐야지 알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을 사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말이다.
알아야 다음에라도 구입을 시도해 볼 것이 아니겠는가.
* * *
휘트니 비엔날레가 시작한 5월. 난 리처드 교수님의 호출을 받았다.
‘진짜로 날 부른 건 그 사람들이겠지, 뭐.’
순수하게 교수님과의 호출이 아니기에 난 이미 필립에게까지 말해 둔 상태였다. 오늘의 만남에 대해서 말이다.
‘오겠다고 하는 건 말렸지만…….’
말린 이유는 간단했다. 난 오늘 만남에서 무언가를 결정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만약 이 자리에 라고시안의 필립이 함께 나온다면 난 라고시안의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내게 뭐든 요청한다고 해도, 라고시안 때문에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할 생각이었으니까.
동시에 나 혼자 나가야 진짜 속내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라고시안 앞에서도 할 말이었다면, 이런 방식을 취하지 않았을 테니까.
‘한번 들어는 봐야겠지. 날 보겠다고 그렇게나 노력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약속 장소인 식당에 들어서자 정장을 입은 직원이 날 반겨 주었다. 조명이며 분위기까지 볼 때 이 식당은 상당한 격식을 갖춘 채 밥을 먹는 곳인 게 분명했다.
‘으흠. 내 복장은 괜찮으려나.’
원래도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걸 선호하는 나였다. 이래 보여도 한때 격식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한복을 입고 궁에도 드나들었던 내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 시대에 맞는 격조 있는 옷차림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나였다.
하지만 밥을 먹으러 가면서 완전 정장을 입고 오라는 소리는 없었기에 깔끔하게만 입고 왔거늘. 설마 이 정도의 식당일 줄이야.
속으로 혀를 찬 나였지만, 겉으로는 직원의 물음에 답부터 했다.
“아마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리처드라는 이름으로요.”
“아. 그분이시라면, 먼저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 따라오시죠.”
목에 붙어 있는 마이크에다가 뭐라고 작게 이야기를 한 직원. 그는 정중한 태도를 한 채 날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교수님께서 자리에서 한 손을 들어 날 맞이해 주셨다.
“오 내 생각보다 이르게 왔군. 역시 시간 약속 하나는 참으로 철저하단 말이야. 후후.”
“교수님과의 약속인데, 더 잘 지켜야죠.”
반겨 주시는 리처드 교수님. 그런 교수님 맞은편에는 두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저 사람들인가.’
아트 바젤 스위스. 거기서 날 만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들인 장본인들. 그들이 저기 앉아 있는 두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나와 그들의 눈이 마주쳤기 때문일까. 교수님께서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들을 소개시켜 주셨다.
“흠흠. 이쪽은 아트 바젤 측에서 나온 총괄 디렉터 카이든 녹스라네. 그 옆은 비서인 카뮤엘 라이언이고. 그리고 이쪽은 이미 잘 알겠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신 작가님. 카이든 녹스입니다.”
“안녕하세요. 윤성 신입니다.”
상대가 누구라도 예의는 지켜야 좋은 법. 난 마찬가지로 공손하게 첫인사를 전했다.
솔직히 식사를 다 하고 나서야 본론을 들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으니.
“혹시 작가님. 유럽 쪽으로 진출하시는 바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