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그림은 상대 평가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영어를 잘하신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어린 시절 부모님 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미국에 와 본 기억이 또렷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외국인 분들과 저 정도로 대화하실 수 있을 줄이야.’
물론 발음은 애매했다. 그러나 또래의 외국인 할아버지들을 만나 저렇게 자연스럽게 손자를 멀리 보낼 수 있을 정도면 그건 무척이나 언어에 능숙하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저분들. 오늘 거의 처음 만나신 것 아니셨어? 왜 저렇게 죽이 잘 맞는 건지. 원.’
내 기억에 할아버지께서 저분들을 오래전부터 알고 계시다는 소릴 들은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분명 저분들도 할아버지를 원래부터 알던 눈치는 아니었다.
만약 할아버지를 알고 계셨다면 내가 아닌 할아버지를 물리셨을 테니까.
연결 고리가 강하지도 않은 그런 상황에서 나보고 베이글이나 사 오라고 하다니. 그것도 세 분이 거의 동시에.
‘대체…… 다들 무슨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 거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저분들의 접점은 나였다. 한 분은 내 할아버지였고 다른 한 분은 나와 함께 아트 바젤 홍콩에서 아트 페어를 연 장본인이셨으니까.
심지어 나머지 한 분은 나와도 인연이 없었는데. 이렇게 세 분만 둔 채 나오는 게 맞는지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내가 휘트니의 카페에서 나온 이상 최대한 빨리 베이글인지 뭔지를 사서 돌아가는 것. 그게 최고의 방법이었다.
‘다행히 이거 있으면 오늘 내로는 다시 들어갈 수 있으니…… 얼른 사 와야겠다.’
손목에 휘감겨 있는 휘트니 비엔날레 입장권. 이거만 있으면, 잠시 나갔다 와도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종일 입장권을 사둔 과거의 날 칭찬하고 싶어졌다.
결심을 굳힌 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뉴욕에서 가장 맛있다는 그 베이글 집. 그 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속으로 벼르고 벼르면서 말이다.
* * *
“갔지요?”
“간 게 분명합니다.”
“애초에 엘리베이터로 내려갔으면 끝이지. 다시 올라오면 우리가 발견 못 할 리 없으니까.”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같은 업계를 한다는 것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제자, 손자, 혹은 자식을 후계 비슷한 걸로 두고 있다는 점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야말로 오랜 세월 알아 온 절친처럼 죽이 잘 맞았다. 방금도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상대방의 의도를 완벽히 짐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손발을 맞춰보지 않고도 이렇게나 잘 협력이 되다니. 이쯤 되자 영혼의 단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참으로 머리가 좋으십니다. 그사이에 신 작가를 심부름 보낼 생각을 하다니요.”
“크흠. 칭찬 감사합니다. 애가 원체 순해서…….”
윤성이는 절대 순한 아이는 아니었다. 효심이 기어 부모나 조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아이긴 했다.
그러나 본인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성격이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순하다’의 기준에 부합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민철임에도 그는 슬슬 손주의 자랑에 시동을 걸었다. 원래 이 나이대의 할아버지들이 만나면 하는 이야기는 별거 없었다.
자식 자랑은 사나이 체면이 있지, 낯뜨겁게 할 수는 없었다. 그건 팔불출 소리를 듣기 딱 좋았으니까.
하지만 손주 자랑은 다르지 않은가. 그건 이 나이 또래의 할아버지들이 모이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귀엽고 귀한 내 손주 아닌가!
“아고. 신 작가는 순한 모양이네요.”
“근데 신 작가도 어릴 때부터 그림 그렸다고 하지 않았나?”
“제 기억에도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민철을 돌아보았다.
여기에 그 신 작가의 할아버지가 있으니, 사실 확인해 줄 수 있으리라.
“어릴 때부터 재능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그림을 일찍부터 시작했지요.”
“오호. 내 아들놈도 그랬는데. 역시 가족 중 그림쟁이가 있으면 새싹부터 다른 건가.”
“아들이라니요?”
“아. 아까 얼핏 이야기는 했는데…….”
알렉스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늘 아들놈이라고 칭해도 그에겐 여전히 사랑스러운 자식이었다.
“내 아들이 이번에 신 작가와 같이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 중이거든. 작품 위치는 신 작가 것과 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랬군요. 이거 몰랐습니다. 윤성이도 그런 이야기는 통 하지를 않아서요.”
“당연히 모를 겁니다. 아들놈은 아버지 이름을 최대한 팔지 않겠다고 벼르는 중이거든요.”
그렇게 말한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는 어투로 물었다.
“혹시 신 작가는 그런 거 없습니까? 이 화백도 이름이 알려진 분이신데.”
사실 윤성을 보내 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걸 당사자 앞에서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음…… 우린 솔직히 그런 걱정을 별로 할 새가 없었습니다.”
“어째서요?”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은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한쪽은 아들이고 하나는 제자였지만, 이들의 사연은 비슷했다. 둘 다 그 스승과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상황이었으니.
원래 이런 상황이면 아들과 제자만 괴로워하는 게 아니다. 부모와 스승 또한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했으니.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들은 민철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신윤성 작가는 그들의 아들이나 제자보다 더하지 않은가.
보다 더 어린 나이에, 보다 더 세계에서 유명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솔직히 한 업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일해도 말이 많은데…… 하물며 그쪽은 조손이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조부모와 손자녀가 같은 업계일 경우 손자녀가 그 윗세대인 조부모의 명성을 따라잡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부모와 자식 사이일 때보다 더 심했다. 세월의 힘이란 건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순수 미술계처럼 그 조부모가 현역일 수 있는 곳이라면 더하리라.
“윤성이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이름값 보단…… 본인의 그림에 더 신경을 쓰는 아이였습니다.”
두 사람의 뜨거운 눈빛에 민철은 슬슬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더 가지고 싶게 만들까. 그거 하나만을 고민하던 아이였지요.”
“그런…….”
민철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보통의 아이는 그냥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할 뿐. 그렇게까지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하니까.
“그런 아이에게 할아버지는 그냥 업계의 동향을 좀 알려 주는 어른 정도였습니다. 어차피 할아버지와 본인의 그림은 다르다는 걸 알았거든요. 흘흘.”
“지금 그걸 믿으라고…….”
“크흠. 어르신. 크흠.”
심한 말을 할 뻔한 알렉스. 그런 그를 막은 건 잭슨의 헛기침이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그들의 눈빛에도 민철은 꿋꿋했다. 그들이 믿거나 말거나 현실이 그랬으니까.
“이전에 제 딸이 윤성이에게 물어본 말이 있다더군요.”
“물어본 말이요?”
“할아버지가 이민철이니 네 그림 스타일에 대해 말이 많을 거라고.”
“그건…….”
“추상화를 그리는 나와 달리 윤성이는 장르화. 그러니까 실제론 잘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만드는 것을 좋아했으니까요.”
현실에 엄연히 존재함에도 잘 보이지 않는 장면들. 윤성 작가는 그걸 극대화해서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화가였다.
“한마디로 요즘 현대 미술 트렌드에 잘 맞는 편도 아니었으니, 애 엄마의 걱정이 더했죠.”
“그럴 법도 하지. 특히나 아이의 부모라면.”
“음. 거기나 여기나 비슷한 모양이군요.”
민철의 말에 그들은 신음성을 삼켰다. 익히 익숙한 대화였으니까.
그들의 제자는, 혹은 아들은 정확하게 이와 비슷한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 덕분일까. 그들은 급격하게 이해가 된다는 어투로 맞장구를 쳤다.
“윤성이가 고작 10살 때였나…… 그때 엄마에게 그랬답니다. 어차피 그림은 상대 평가가 아니라고.”
“상대 평가가 아니라…… 잠깐만요. 10살? 10살이 그런 말도 할 줄 압니까?”
그들은 영어를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학생이 그런 말을 했다니.
문제는 민철이 여기서 한술 더 떴다는 것에 있었다.
“아. 한국 나이로 10살이니…… 여기로 따지면 8살 정도였을 겁니다.”
“……허 참.”
“한국이 교육열이 높다고는 들었는데…… 이건 그 정도가 심하군요.”
상대방이 손자의 뛰어남에 탄식하고 있었으니, 말을 하는 민철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이야길 풀었다.
그 또한 과거를 이야기하며 슬슬 신이 났으니까.
“그림을 원하는 이는…… 이 그림도 원하고 저 그림도 원할 수 있으니, 자긴 누구랑 비교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더군요.”
“……그걸 고작 10살, 아니 8살 때 깨달았다고요?”
8살이 뭔가. 그 수배를 살고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 훨씬 많았다.
그걸 끝끝내 알아차리지 못해 남과 비교해 가며, 질투에 잡아먹히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보다 두세 배 이상, 나이를 먹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었다.
“그랬다더군요. 흘흘.”
꽤나 덤덤하고 구체적으로 풀어 놓는 과거 이야기.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민철의 말에서 깊은 신빙성이 느껴졌다.
비슷한 처지에 있기 때문일까. 그들은 저절로 본인들의 후계자들과 윤성을 비교하게 되었다.
‘……이 이야길 들으니 내 제자는 아직 멀었군.’
물론 제자에게도 사회적인 체면이 있는 법. 그렇기에 그걸 입 밖으로는 내지 않는 잭슨이었다.
그런 잭슨 나올로와 말하지 않아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절친이 옆에 있었으니.
‘나중에 아들놈에게 말해 줘야 할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는데? 어디 이 소리를 듣고도 네놈이 가만히 있나 한번 보자.’
늘 싸움을 피하려고만 하는 아들. 그런 아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고작 8살.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기이한 존재. 그런 존재와는 한 번쯤 부딪쳐 보고 싶지 않냐고.
원래 남들과 다른 천재란 존재는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호승심을 자극하는 존재였으니까.
눈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무슨 마음인지 알 리 없는 민철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손주 자랑을 은근슬쩍, 아니 정확하게는 꽤 대놓고 하는 중이었다.
주제가 다른 곳으로 튀지 않았다면 그 자랑 삼매경은 좀 더 길어졌으리라.
“윤성 작가도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며, 미국에 와 있는데…… 제 제자도 이거 해외를 좀 보내 봐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어리다고 여긴 본인의 제자보다 10살도 넘게 더 나이가 적은 윤성 신 작가.
그런 아이도 본인의 모국에서 나와서 이렇게 해외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다.
그건 아마 어릴 때부터 다져진 튼튼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런 신 작가에 비하면…… 그 녀석은 아직 어려. 세상 물정 모르고 제 잘난 줄만 아는 햇병아리지.’
잭슨이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제자의 마인드가 어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제자도 어느덧 중년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철을 들게 만들어야 했다.
“미국은 아무래도 좀 좁으니…… 이참에 유럽이나 동양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유럽?”
“동양이요?”
거의 동시에 다른 장소를 말한 민철과 알렉스였다.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한 겁니다만…….”
그런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잭슨은 방금 전 결심한 속마음을 드러내었다.
* * *
“여기요. 할아버지들.”
“어이쿠. 우리 손주. 사 오느라 고생했구나. 흘흘.”
“그 베이글 진짜 인기 있나 봐요. 벌써 없던데요. 그래서 다른 거라도 사 왔어요.”
“괜찮아. 괜찮아. 정 안되면 다음 번에 이 친구 집에 갔을 때 먹으면 되니까.”
“……이 친구 집에요?”
“그거 좋은 생각이구만! 이왕이면 우리 집도 한번 오게나. 내 기가 막힌 샌드위치 집 알지.”
“……우리 집이요?”
대체 그 잠깐 사이에 왜 이렇게 절친이 되셨는지 모르겠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중얼거리는 사이. 그분들은 익숙하게 서로의 스마트폰에 주소를 찍어주고 계셨다.
“두 사람이야말로 다음에 한국에 오면, 약속했던 그 작품! 꼭 보여 주지요. 흘흘.”
“오오. 그거 좋구만. 원래 혜성 신인의 첫 작품은 귀한 법이지.”
“한국이라…… 조만간 갈 일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혜성 신인이라니. 그런 사람의 첫 작품이 할아버지에게 있다는 말인가. 내가 속으로 의문을 품는 사이에도 세 분의 대화는 신나게 이어졌다.
“아무래도 다음번에 한국 쪽 전시회를 한 번 알아봐야겠네요. 그때 잘 부탁드립니다.”
“…….”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 찰나. 할아버지께선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마치 볼일은 끝났다는 표정으로.
“자. 윤성아. 우린 가자. 네 할머니와 부모가 기다리겠다. 가서 같이 점심 먹어야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올 때와 달리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한결 가벼움이 느껴지셨다.
‘잘은 몰라도 할아버지가 좋아 보이시니, 다행이지 뭐.’
이때까지만 해도 난 이 만남이 어떤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고작해야 베이글 사러 갔다 오는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