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8
18화 그래서 대체 누굽니까
가영이와의 대화가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일까. 윤성이는 요즘 들어 매일같이 민철의 집으로 오고 있었다.
사람 간의 관계란 것이 자주 보면 친근해지는 법. 민철과 주혁의 관계는 물론 다른 가족들 간의 사이도 좋아지고 있었다.
민철은 이 모든 현상을 만들어 준 손자가 보면 볼수록 예뻐 보였다.
“윤성아. 간식 먹고 하자꾸나.”
덕분에 언제 무뚝뚝했냐는 듯 그는 틈만 나면 아이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했다.
마침 좋은 파이가 선물로 들어왔다. 달달한 걸 좋아하는 아이니, 이 간식도 마음에 들어 하리라.
“윤성아?”
평소라면 빠르게 달려 나와 접시를 들여다보았을 아이였다. 그런 손자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민철은 의아한 기분이 되었다.
‘오호.’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금세 윤성이가 지금 집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손자는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유화 물감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제 몸 크기만 한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 민철은 한눈에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우리 식구들을 그린 건가.’
본인이 포함된 다섯 식구들이었다. 가영과 주혁은 물론 민철 본인과 아내인 미숙까지 있었다.
보아하니 식사를 한 후 함께 디저트를 먹는 모습이었다. 그림 속의 디테일이 당시 어떤 상황인지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탁―
민철이 접시를 옆에 내려놓았음에도 아이의 시선은 여전히 캔버스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윤성이의 손이 붓에서 떨어졌다.
손자가 그림을 마무리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민철. 그는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서양화도 꽤 잘 그리는구나.”
“어? 할아버지. 오셨어요?”
“흘흘, 간식 먹고 하려무나.”
“우와, 맛있겠다.”
진지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 윤성이는 금세 아이다운 표정이 되었다. 잽싸게 접시 앞으로 다가와 파이를 들여다보았다.
신기한 듯 눈을 반짝거리던 아이는 손가락으로 한 파이를 가리켰다.
“이건 뭐예요?”
“수제 파이라는 건데. 맛있을 게다.”
“수제 파이요? 진짜 예쁘게 생겼다.”
요리조리 파이를 살펴보던 손자. 윤성이는 입을 크게 크게 벌렸다.
오물오물.
“와…… 참으로…… 맛있어요.”
윤성이는 음식에 퍽 감동한 얼굴이었다. 어찌나 맛있었는지 먹으면서도 계속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흐뭇하게 손주의 먹는 것을 보던 민철. 그는 다시 방금까지 윤성이가 그리던 캔버스로 눈을 돌렸다.
“며칠 만에 유화에도 익숙해진 모양이구나.”
“아직 멀었죠. 이제 겨우 그릴 수 있는 수준인걸요.”
어지간한 미대생 뺨 때릴 실력이었다. 그럼에도 윤성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그래? 재미는 좀 있고?”
아직 어린아이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작업 활동에 대한 흥미였다.
“재미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는데요.”
민철의 질문에 윤성은 얼굴을 찡그렸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기색이었다.
“이쪽 방식은 원래 제가 하는 것과는 차이가 많이 있어서 흥미롭긴 해요.”
“차이라니?”
민철의 질문에 아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전 보통 한 번 터치한 부분을 잘 수정하진 않거든요.”
“으흠. 아무래도 동양화가 그런 편이지.”
한지 위에 붓으로 그리는 그림들. 대부분 한 번 그어진 선을 수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쪽은 반대로 여기저기 덧칠하면서 그려 나가더라고요.”
반면 유화 물감으로 그리는 서양화는 아예 방식이 달랐다. 한 번 그린 곳 위에 다시 칠하는 기법이 일반적이었으니까.
“솔직히 처음에는 별로였거든요?”
윤성이는 입안에 있는 간식을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단번에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도 흥미롭더라고요. 질감이나 두께감으로도 작품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고요.”
신이 난 듯 손짓 발짓까지 하는 아이였다.
“거기다 하나하나 그려 가며 작품을 점점 드러내는 맛이란 게…….”
그 순간 아이는 활짝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기쁘다는 듯이.
“참 황홀했어요.”
“…….”
“수묵화나 수채화와는 다른 매력이 정말 멋졌어요.”
손자의 말을 들은 민철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만큼 아이의 말은 서양화의 맥을 관통하는 것이었기에.
“서양 화가들이 왜 이 유화를 많이 썼는지 알 것 같아요.”
직관적이고 한 번의 터치로 그려지는 동양화와 논리적이고 덧바르는 방식이 많은 서양화.
‘그걸 고작 그림 좀 그리면서 다 파악했다고?’
그 차이를 단번에 잡아내는 손자였다. 그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민철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봐도 그의 손자는 그림의 감각에 있어선 정말 탁월한 면이 있었다.
“아마 유화 물감과 수채화 물감의 차이일 수도 있겠죠? 신기하네요.”
윤성이의 말을 들은 민철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나야말로 참으로 신기하구나. 말하는 게 꼭 동양화의 대가가 서양화를 배우는 기분이니.’
그런 생각을 하며 민철은 아이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보통이 아니었다.
물론 부족한 면은 있었다. 문제는 그 부족한 부분조차 개성으로 보이게 하는 느낌이었으니.
‘대체 이 아이는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려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을 흡수하며 배우는 손자. 그런 아이가 어디까지 갈지 그 미래가 궁금해지는 민철이었다.
* * *
윤장훈은 큐레이터였다. 그중 그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바로 전시 기획이었다.
전시물을 잘 확보해 좋은 전시전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 자체가 그의 직업이었으니.
꽤 큰 전시관의 팀장급인 그였다. 업계에선 나름대로 잘나가는 그였지만, 오늘 만나러 가는 인물 앞에선 턱도 없었다.
덕분에 그의 긴장도는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다.
‘후, 이번에는 진짜 꼭 성공해야 하는데.’
그가 만날 인물은 최근 그가 일하는 전시관이 공을 들이고 있는 상대였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이민철 화백 말이다.
현존하는 한국의 화가 중 가장 유명한 이. 그만큼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미리부터 준비해 둔 자료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은 준비도 완벽해.’
장훈은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 되뇌었다. 지난번 만나러 갔다가 그림 보는 눈에 대해 한참 잔소리를 들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잘해야 했다.
벌써 이민철의 작업실을 드나든 지 어언 수개월째니까. 슬슬 결과물을 만들 때가 되었다.
띵동―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그를 맞이한 건 사모님이셨다.
“아이고,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네요.”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안에 있어요. 내가 알기론 이미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들어가면 될 거예요.”
장훈은 그를 반겨 주는 사모님의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느낌이 좋네. 날 기다리고 계시다니.’
한층 편안해진 기분으로 장훈은 인기척을 냈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작업실의 문 앞에서.
똑똑―
“들어오게나.”
지난번 본 익숙한 풍경이 그를 반겼다.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이민철 화백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오, 자네 왔구만.”
“예, 선생님. 저 오늘도 왔습니다. 하하하.”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장훈. 그런 그를 향해 민철은 자리를 권했다.
“거기 앉아 있게나. 난 이것만 하고 갈 테니.”
“아, 예. 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장훈은 감히 민철의 작업을 방해할 이유가 없었다. 힘들게 와서 일을 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있기로 했다.
만약 그의 눈에 어떤 작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 가만히 앉아서 침묵만을 지켰으리라.
“호오…….”
장훈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가 앉은 자리의 정면. 그 앞에 놓인 작품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기에.
그림은 작았다. 고작해야 6호(40.9cm x31.8cm) 정도 되는 크기일까. 문제는 그 속에 담긴 그림이었다.
‘유화로 이런 느낌을 낼 수 있다고?’
안에 담겨 있는 세 사람. 누가 봐도 부부로 보이는 이들에게선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부부가 바라보고 있는 아이. 그 아이를 향한 사랑의 감정도 확실하게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의 표현력이 아니었다.
스윽―
장훈은 슬쩍 눈치를 보았다. 아직 이민철 화백이 작업을 하고 있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가까이서 보자.’
딱 봐도 이민철 화백은 바빠 보였다.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가까이서 그림을 감상해도 문제는 없으리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장훈은 그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멍해지고 말았다. 가까이서 본 그림은 더 굉장했으니까.
‘이리도 입체적으로 표현하다니.’
따뜻한 햇살이 방 안을 비추는 것이 그림으로도 느껴졌다. 부드러운 선은 인물의 표정을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붓 터치.
그럼에도 그 안에는 따뜻한 느낌이 녹아들어 있었다. 섬세한 작품이었다.
마치 한 가정이 가진 행복한 모습을 그림으로 빚어 놓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어두운 계열의 유화를 사용했음에도 그렇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색이 주는 느낌과 그림 전체의 느낌을 이리도 다르게 할 수 있다니.
‘대체 이 그림은…….’
그가 이 기묘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다가온 민철이었다.
“좋은 그림이지 않나?”
“아,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림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장훈.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님으로서 자리를 이탈했으니 사과부터 해야 했다.
“아니, 아닐세. 흘흘. 나도 이 그림을 좋아하니……. 자네 마음 이해하네.”
장훈의 사과에도 민철은 손사래를 쳤다.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과 함께.
그러더니 민철은 장훈과 마찬가지로 그림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이걸 보고 있으면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평안해진다네.”
“선생님, 이거 누구의 그림입니까?”
장훈은 결국 그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대체 누구일까. 어느 누가 이런 색다른 시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왜 물어보는 건가?”
“이 정도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면, 저희 같은 큐레이터들은 꼭 체크하고 있어야 합니다.”
“으흠…… 그 정도로 제법으로 보이나?”
“제법 정도가 아닙니다. 선생님.”
장훈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 그림은 보는 이에게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림입니다.”
일부러 따뜻한 색채를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감상을 하게 만들다니. 화가 고유의 관념이 확고히 들어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따뜻하면서도 독특한 작품은 언젠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마련이니, 저흰 먼저 알고 있어야죠.”
장훈은 오늘 오길 정말 잘했다고 여겼다.
역시 부지런히 움직여야 남들보다 빨리 이런 그림을 발견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대체 누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