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0
20화 이 꼬마, 아니 이분이?
“흐흐흐, 맞네. 그 설마가.”
난 정체불명의 손님을 안타깝게 바라보셨다. 오늘 할아버지의 놀림감은 저분이신 모양이었으니.
“하지만 분명 제자분이시라고.”
“요즘 내게 그림을 배우고 있거든. 내 손주가.”
헌데 듣자 하니 아무래도 나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다음 문장은 내게 확신을 심어 주기 충분했다.
“분명 몇 년 뒤에 학교에 입학하게 될 예정이라고…….”
“몇 년 뒤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될 거거든.”
“…….”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분위기가 여길 나가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성아. 잠깐 이리 와 볼래?”
“네에.”
난 쪼르르 할아버지의 앞으로 달려갔다.
“정식으로 인사하시게나. 내 손주이자 방금 자네가 본 그 그림을 그린 주인공이라네.”
“허. 그러니까 이 꼬마, 아니 이분이…… 허…….”
“그리고 윤성아. 이쪽은 홍림아트센터의 큐레이터이자 전시기획팀에서 일하는 윤장훈이라는 분이시다.”
“아! 큐레이터! 저 알아요.”
얼마 전 새로 배운 단어가 튀어나왔다. 난 기쁜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금세 내가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전 신윤성이라고 합니다. 여기 계신 이민철 할아버지의 손주예요.”
난 최선을 다해 내 소개를 했다. 호도 가문도 소개하지 않는 최근의 방식. 여기에 익숙해지기 참 어려웠다.
그리고 슬쩍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그분은 날 멍하니 바라본 채였다. 입을 벌리고 있는 건 덤인 모양이었다.
‘나 뭔가 실수했나?’
혹시나 또 틀리게 소개한 걸까 슬쩍 눈치를 봤다.
그러나 상대는 날 멀거니 바라만 볼 뿐. 내 소개에 대해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니까…… 손자님이시라고.”
“전 손자님은 아닌데요.”
“그게…… 아이님의 그림이었다고요.”
내 호는 아이도 손자가 아니었다. 내 떨떠름한 반응에도 상대는 여전히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상대의 반응에 내가 지루해지려는 찰나, 그는 날생선처럼 퍼뜩 튀어 올랐다.
그러더니 곧바로 내게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이가 어찌 되나요?”
“여섯 살인데요.”
“그림은 여기 계신 선생님께 배운 겁니까?”
“전…….”
“아, 생각해 보니 선생님의 손주분이시면 어머님이 혹시.”
“자자, 거기까지.”
질문들을 끊어 낸 건 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는 그분의 말을 끊어 내는 동시에 날 향해 입을 여셨다.
“윤성아. 챙길 것 다 챙겼니?”
“앗, 네. 다 챙겼어요.”
난 얼른 내 손에 들린 물건들을 돌아보았다. 간단하게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 죄다 내가 든 꾸러미 안에 있었다.
“그럼 잠시만 나가서 기다리려무나. 이 할아버지도 곧 나가마.”
“네에.”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이라 여긴 난 순순히 방 밖으로 향했다.
애초부터 내 목적은 이곳에서 내 화구들을 가져가는 것이었으니까.
* * *
탁―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장훈은 재빠르게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경솔했습니다.”
‘내가 너무 흥분했어.’
다시 생각해 봐도 아이에게 곧바로 인터뷰하듯 들이댄 건 잘못한 일이었다.
장훈이 속으로 반성하는 사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철의 입이 열었다.
“뭐, 괜찮네.”
시큰둥한 목소리. 거기선 미묘하게 날 선 기색이 느껴졌다. 눈치가 그다지 없는 장훈이 느껴질 정도였다.
장훈은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간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았다. 원래 그는 여기 민철의 전시회를 위해 오지 않았는가.
‘방법을! 방법을 생각해 내라, 윤장훈!’
초조해진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그래, 이거다.’
하늘이 아직 장훈을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의 머릿속에 이런 아이디어를 내려 주다니.
“선생님, 전시회 말입니다.”
“그때 말했다시피 난 아직은 생각이 없네. 그만큼 그림을 그리지도 못했고.”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바였다. 그랬기에 장훈의 얼굴빛은 변함이 없었다.
“만약 그림 수 때문이시라면 혹시 이 방법은 어떠십니까?”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회심의 수가 통하길 바라면서.
장훈은 지난번에 했던 대화를 끌어다 왔다.
“지난번 저희 기획을 거절하신 게 작품 수 때문이셨죠.”
“으흠, 그랬지. 전시회를 열기엔 지금 내 작품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민철은 턱을 쓰다듬었다. 장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부터가 핵심이었다.
“만약 그림 수 때문이시라면 혹시 손자분과 같이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요즘은 이런 식의 기획 전시를 많이 하는 편이죠.”
윤장훈은 재빠르게 들고 온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거기서 모아 둔 전시 기획안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선생님과 손자분이 할아버지와 손주의 관계이신 만큼 함께 전시회를 하셔도 좋을 듯해서요.”
그가 태블릿을 돌려 보여준 건 가족 전시회 관련 자료였다.
아버지와 딸이, 혹은 어머니와 아들이. 예술가 집안에서 하는 가족 전시회는 생각보다 많았다.
“이런 가족 전시회도 초대전으로 가끔 열립니다.”
“들어 본 적은 있네만…….”
부정적이기만 했던 분위기가 풀리는 게 느껴졌다. 턱을 쓰다듬던 이민철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건 보통 성인 자녀들과 함께하는 거 아닌가?”
“예, 보통은 그 정도는 되어야 같이 전시할 수 있죠.”
어린아이의 그림은 대부분 뻔했다.
얼마나 사물을 잘 따라 그리는지. 얼마나 정확하게 붓 터치를 하는지. 그런 부분만 잘 보였으니까.
자신만의 화풍을 가지고 뚜렷한 색채를 보이는 성인 화가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하물며 전시회를 열어서 성공하는 작가들. 그건 성인 작가들 중에서도 특출난 몇몇만 가능했다.
“그럼 안 되지 않나? 윤성이는 보다시피 아직 어린아이거든.”
“그런 건 보통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그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그는 다시 한번 방금까지 눈을 떼지 못했던 그림을 보았다.
보고 또 봐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그림이었다. 그만큼 따스함이 그림 자체에서 풍겼으니까.
유화로 그렸음에도 은근한 동양적인 따뜻함까지 깃든 그림. 어지간한 화가는 이 앞에서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하리라.
그림을 보면 볼수록 장훈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덕분에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겼다.
“지금 손주분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합니다. 오히려 차고 넘칠 정도예요.”
“그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장훈은 이참에 쐐기를 박기 위해 노력했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다음에 올 때는 기획안을 가져오고 싶습니다.”
“으흠. 나와 내 손주의 전시회라…….”
“맡겨만 주시면 멋지게 기획해 보겠습니다. 손주분의 작품이면, 선생님의 화풍과 비교되어 더 두드러질 겁니다.”
아이의 화풍은 기묘했다. 동양화의 색채가 깃든 그 신비로움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당연히 이민철 화백의 화풍과도 명백한 차이를 보였다. 이 작업실에 있으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손주의 그림이 나와 확실히 차이가 있나?”
시험하듯 질문하는 이민철 화가였다. 그런 상대를 향해 장훈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준비한 공부 내용을 써먹을 기회였으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몇몇 그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손끝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쪽에 있는 그림들. 손주분의 그림이시죠?”
“오호, 그게 보이나?”
“예, 두 분 다 화풍이 확고하시니까요.”
장훈은 단번에 윤성의 작품들을 찍어 냈다. 기이할 정도로 망설임이 없는 어조였다.
민철은 그런 장훈이 신기하다는 눈초리였다.
“이 기획전은 멋지게 치러질 것이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장훈은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을 느꼈다. 민철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니 저희에게 기회를 주시면…….”
하지만 그 생각은 짧았다. 장훈의 희망찬 포부를 민철이 단박에 잘라 내었기에.
“크흠, 우선 이건 내가 결정할 부분이 아니네.”
“예?”
그럼 누가 결정한다는 말인가. 순간 의문에 휩싸였던 그는 금세 납득했다는 얼굴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방금까지 민철이 보호자를 거론하지 않았는가. 이를 떠올린 그는 재빠르게 행동했다.
“아, 물론 손주분께서 아직 아이인 만큼 보호자분과도 같이 잘 이야기해서…….”
“그런 것이 아닐세.”
이민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이는 어렸다. 당연히 윤성이의 부모 의견도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분이 있었으니.
“전시회면 화가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나?”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당연한 일이었다. 전시회의 주체는 그 전시회를 하는 화가였으니까.
“일단 윤성이에게 그림을 얼마나 그릴지도 물어봐야 할 것이고.”
민철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윤성이를 어엿한 화가로 봤다면, 그에 걸맞게 의견을 물어봐야겠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그를 향해 이민철은 시원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이와 내 한번 이야기를 해 보지. 허니, 좀 기다리게.”
그렇게 윤장훈은 이민철의 작업실에 매일같이 찾아온 지 어언 3개월. 무려 석 달 만에 반승낙을 받아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