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05
205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으니까
자리에 앉아 계시던 리처드 교수님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셨다. 그러더니 내게 손짓으로 본인이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자리를 권하셨다.
“이쪽으로 오게나. 여기 화면을 보고 말하면 저쪽에서 잘 들릴 걸세.”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교수님.”
공손하게 인사를 한 난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기 전 먼저 상대방을 바라보며 예의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꾸벅―
“처음 뵙겠습니다. 윤성 신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군요.]안경 속에서 빛나는 초롱초롱한 눈빛. 거기에 푸근해 보이는 인상까지. 비록 머리숱은 좀 적으신 편이었지만, 상당히 부드러운 느낌의 교수님이셨다.
[리처드 교수님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인터뷰는 그냥 간단하게 몇 가지 확인을 하기 위한 것이니 긴장 안 하셔도 됩니다.]혹시라도 내가 굳어서 답을 잘하지 못할까 걱정하시는 듯 보였다. 그 때문일까. 교수님께는 상냥해 보이는 미소를 띤 채 부드럽게 말문을 여셨다.
[우선 내 소개부터 하지요. 난 리오 토닉스 아르만이라고 합니다. 풀네임은 좀 길지만…… 미국인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간단하게 말하는 편이지요.]한국인의 세 글자 혹은 네 글자 이름에 익숙한 나로서는 미국인들의 이름도 짧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영국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이름들이 더 긴 모양이었다. 리오 토닉스 아르만. 그것도 줄인 이름이라니.
이분은 영국의 교수님이셨다. 정확하게는 UAL. 일명 런던 예술대라고 불리는 대학교의 순수 미술 전공의 교수님이셨다.
이런 교수님과 내가 리처드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화상 통화를 하게 된 이유? 그건 간단했다.
교환 학생을 가기 위해 진행하는 간단한 인터뷰. 난 그걸 이 화상 인터뷰로 대체하기로 한 상태였기에.
‘서류 통과하고 면접 기다리고 있는데, 연구실로 오라는 소리 듣고 좀 놀라긴 했지.’
에일대 교환 학생 선발은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다. 하나는 서류와 그다음은 면접이었다.
나로서는 학기 시작하자마자 제출한 서류 전형은 이미 다 통과한 후였기에, 면접만 남은 상태였다.
‘근데 이렇게까지 간단하게 해도 되는 건가? 원래 막 3 대 1 인터뷰 같은 것 한다고 들었는데.’
같은 영어권 국가이기 때문일까. 에일대에서 UAL로 교환 학생 가는 절차는 간략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절차조차도 더 간단하게 치러질 모양이었다. 화면상 보이는 교수님의 질문을 들어 보니 말이다.
[원래는 지원 동기나 꿈 이런 형식적인 것들을 물어봐야 합니다만.]그러면서 화면상의 교수님께서는 슬쩍 눈앞에 있는 종이 뭉치를 들어 보이셨다. 거기에 아무래도 방금 말한 그 질문들이 적혀 있는 듯 보였다.
[윤성 신 작가…… 아니 신 학생을 아는 내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이 좀 무의미하게 느껴지네요.]“……절 아세요?”
물론 내가 지원한 두 개의 대학 중 하나의 교수님이기에 당연히 날 알고 계시리라.
하지만 어째 교수님의 말투가 교환 학생 때문에 날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교수님께서는 떨떠름한 내 질문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셨다.
[후후. 지금 우리 전공에서 윤성 학생을 모르는 교수는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리의 목표 중 하나가 학생 같은 화가를 배출하는 것이니까요.]학교의 목표가 나와 같은 화가를 만드는 것이라니. 어마어마한 극찬이었다.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 말씀을 하시며, 빙그레 미소 지으시는 교수님. 그러더니 본격적으로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질문들을 좀 바꿔서 할 예정입니다. 제게 이 정도의 권한은 있으니까요.]“네에.”
[앞으로는 편의를 위해 약간 고압적인 어투를 사용할지도 모릅니다만, 양해 부탁드립니다.]“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영국식 영어 특유의 고풍스러움보다는 상냥함만 보였던 언어. 그랬던 어투가 이다음 순간 바로 건조하게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럼 질문하겠네.]꿀꺽―
교수님의 바뀐 표정 덕분일까. 난 나도 모르게 긴장한 상태로 손을 한 번 꽉 쥐었다.
[장르화를 그리는 이유가 따로 있나?]하지만 내 긴장과 달리 첫 질문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물론 최근에는 초상화도 그리고 자화상도 그린 것으로 아네만…… 자네의 주된 분야는 장르화지.]장르화. 조선에서 그렸을 때는 일명 풍속화라고 불리는 그림. 그게 나의 핵심이긴 했다.
[그걸 자네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은 이유가 궁금해서 말이네.]“사람이 가장 가지고 싶게 만들어지는 그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장르화가.”
진지한 교수님의 얼굴을 보며 난 내가 장르화. 그러니까 처음 풍속화를 그리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내 주변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흔함과 그 작품만의 독특함. 그걸 모두 맛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장르화라고 생각합니다.”
잘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잘 보이지 않는 그림. 그게 바로 장르화였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풍경이지만, 실제로는 잘 보이지 않기에 더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 많았으니까.
“그림을 보는 순간 나도 이런 작품 하나는 가지고 싶다고 만드는 그런 욕망을 가장 자극하기 좋은 것도 장르화입니다.”
[크흠. 자네의 장르화에 대한 생각은 잘 알겠네.]“예? 아직 다 안 말했는데요.”
다 말하긴커녕 시작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장르화를 선택한 이유. 전생의 이유부터 쭉 나열하면 하루 종일도 말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아실 리 없는 교수님께서는 어딘가 흔들리는 눈빛을 한 채 입을 여셨다.
[험험. 우리가 지금 국제 영상 통화를 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나. 내가 들어야 할 내용은 한정된 시간에 잘 녹여진 핵심이야.]그러고 보니 이런 류의 면접은 시간 제한이 있었다. 일정 시간 안에서만 답을 하고 그걸 인정하는 방식이었으니.
너무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보단 적절한 시간만을 사용해 답을 하는 게 나은 모양이었다.
“아…… 제가 좀 흥분했네요.”
‘그러고 보니, 이거 교환 학생 가려고 하는 인터뷰였지.’
인터뷰란 게 원래 딱 시간을 정해 두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속으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교수님께서는 다시 입을 여셨다.
[크흠. 우선 자네의 장르화에 대한 열정은 잘 알았네.]“……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딘가 민망해진 기분으로 난 볼을 긁적였다.
[이거 그냥 평범하게 질문을 해야겠구만.]교수님의 말씀이 좀 작았기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난 뭐라고 하신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못 들은 것 같아서요.”
[아닐세. 다음 질문이야. 영국에 교환 학생으로 오려는 이유가 뭔가?]‘교환 학생은 원래 그 나라의 교육을 들으러 가는 거 아닌가요? 저도 그래서 가는데요.’
라고 말하진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방금 말씀하셨지. 이건 한정된 시간에 적절한 분량의 답을 하면 된다고.’
교환 학생에게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한 질문. 그렇기에 난 이번이야말로 모범적인 답을 하기로 했다.
정확하게는 무난하면서도 논리적인 대답 말이다.
“영국의 현대 미술에 대해 직접 현장에서 공부해 보고 싶은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전 그 나라의 미술에 대해 알려면 모름지기 현장에 가 봐야 한다고 여기거든요.”
당시 조선은 해외를 나오기 쉬운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난 일본으로 갔다. 왜냐고? 청 나랑 미술과 다른, 그러니까 좀 더 색다른 미술을 접해 보고 싶었으니까.
“한국과 미국의 미술은 비슷한 듯하지만 확연히 달랐습니다. 당연히 미국과 영국의 미술도 다르겠죠.”
국제 사회라고 불리는 만큼 세계적인 미술 추세란 것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일까. 의외로 미술 작품들에는 각기 다른 나라의 특징이 녹아 있었다.
“그걸 가장 확실하게 배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미술 교육 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환 학생은 그런 의미에서 제게 제일 좋은 방식이죠.”
‘이 정도면 되었겠지.’
스스로의 대답에 난 뿌듯했다. 딱 알맞은 시간에 적절한 답을 한 것 같았으니까.
그러면서 슬쩍 교수님의 표정을 살폈다. 화질이 그리 좋은 건 아니라 확실치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일단 대답은 잘 들었네.]그러나 교수님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헌데 내가 진짜로 궁금한 부분은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았구만.]“궁금한 부분이요?”
완벽하게 대답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내가 답변하지 않은 부분이라니. 그게 뭘까 궁금해졌다.
[솔직히 자네는 이미 한 분야에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그 정도까지는…….”
[거장이라고 불리기엔 아직 세월이 부족할 뿐. 그 외에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자네가 아닌가.]교수님은 진지한 얼굴로 갑자기 내 칭찬을 하셨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려고 이렇게 시작을 하시는지 모를 정도의 과찬이셨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어보시는 교수님. 그런 그분의 말에 난 힘 있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난 늘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이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시대의 그림을 그리는 장르화. 그걸 그리는 화가라면 늘 배우는 걸 끊어서는 안 되었다.
‘내가 컴맹 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 뭘 배우려고 하는 이유가 뭔데!’
가끔 억울할 때조차 있었다. 요즘 화가들은 다들 SNS도 잘 쓰고 자기 PR도 하는데, 왜 넌 그게 약하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을 퍽퍽 치고 싶기도 했다.
전생에 조선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까. 난 기계를 다루는 것에 그리 능숙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내 또래 잘하는 아이들에 비해선 한계가 있었다.
그들이 숨 쉬듯이 사용하는 것이라면, 난 확실하게 배워서 사용하는 차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난 SNS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뭐든 새로운 걸 배워 보려고 했다.
왜냐고? 그렇게 해야 내 작품이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을을 울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속내를 다 쏟아 낼 수는 없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러나 정리해서 내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었으니.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조선에서처럼 옛 성인의 말씀을 인용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장본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난 내가 다시 태어난 이래 끊임없이 새로운 그림을 그려온 이유를 밝혔다.
“전 배우지 못하는 순간이야말로 사람이 진짜로 죽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시대의 새로운 걸 배우지 못했다면 어땠을 것 같은가. 과연 지금의 신윤성이 있을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난 회의적이었다.
신윤복의 그림에서 이 시대를 배워 신윤성의 그림이 되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내 그림에 관심을 보이고 좋아해 주는 것이리라.
“지금의 전 에일대 학생 신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환 학생은 하나의 좋은 기회이자 특권이죠. 학생 때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전생과 현생을 살며 느낀 점.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더 그리고 싶어서 전생의 몸이 따라 주지 못했던 것처럼.
다시 태어난 내가 먼저 붓을 잡고 싶어도 아기의 몸으론 한계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전 이 배움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전 죽어 있고 싶지 않으니까요.”
조선에서도 내가 붓을 놓은 건 죽음을 앞두고였다. 죽기 직전까지 난 동생에게서 새로운 안료를 받아서 공부했다.
이 안료를 어떻게 하면 더 생생하게 표현할지. 어떤 방식으로 그리면 더 나은 작품이 나올지.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했으니까.
내 연구과 배움이 멈춘 건 내가 죽은 이후였으니. 난 죽음이 앞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배우는 걸 그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도 그럴 생각인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미술을 배워 보는 것이라니. 그런 귀한 배움의 기회를 내가 두 눈 뜨고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교수님. 전 지금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제 장르화도 살아 있죠.”
“…….”
“살아 있기에 전 계속 새로운 걸,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걸, 동시에 가지고 싶어 할 만한 작품을 추구할 겁니다.”
“…….”
“그러기 위해선 제가 어느 정도의 이름값을 가지든, 제 그림이 어떤 위치에 서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으흠.]“전 죽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으니까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후련함 때문일까. 교수님의 표정이 오묘함에도 난 활짝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