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06
206화 역시 난 이쪽이 체질이네
“안녕히 계세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윤성 학생이었다. 미국에서 이렇게 머리를 숙여 하는 인사법이 익숙하지 않음에도 늘 이렇게 인사했기에, 이제는 리처드 교수도 익숙한 상태였다.
“그래. 그래. 얼른 들어가 보고.”
그 덕분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줄 수 있었다.
“예. 내일 뵙겠습니다.”
탁―
연구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리처드 교수. 그런 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갔죠?]분명 같이 문 닫히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리오 교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그럼 갔지.”
[진짜 간 거죠?]“내가 자네에게 거짓말해서 얻을 게 없을 것 같은데.”
그제야 리오 교수는 윤성이 완전히 연구실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직후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속내를 드러내었다.
[와…… 역시 천재와 또라이는 종이 한 끗 차이라더니.]“흘흘.”
[제 질문에 아주 칼을 물고 달려들더군요. 어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냐며.]질문에 답을 하는 신 작가, 아니 윤성 학생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쏘아 나오는 것 같았다.
“뭐. 내가 봐도 좀 무서운 표정이긴 했네만.”
[배움에는 끝이 없긴 하죠. 근데 그걸 형식적인 대답이 아니라 저 정도로 온 감정을 다 실어 답하다니.]“내가 말했지 않나? 요즘 보기 드문 친구라고.”
마치 이런 학생이 우리 에일대에 다닌다는 것을 자랑하듯, 리처드 교수는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에일대 정도가 아니면, 이런 인재가 나올 수가 없지. 후후.”
원래 학생의 뛰어남은 교수의 업적인 법. 윤성 신이라는 작가가 자신의 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리처드 교수는 리오 교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었다.
“신 작가가 에일대에 들어와서 한 전시면 전시, 행사면 행사.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지. 참으로 대단하지 않나?”
본인이 크게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학생. 그게 바로 윤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뻔뻔하게 자랑했다.
그런 그를 보며 리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랑질을 끊는 방법은 꽤 간단했다. 그 자랑의 대상이 되는 학생을 우리 쪽으로 끌고 오면 되는 법 아니겠는가.
[이거 진짜 저희가 뺏기면 안 될 것 같은데…… 교수님 저희 쪽으로 보내 주시죠.]그는 알고 있었다. 교환 학생도 일반 대학 입학 전형과 비슷했다. 한 학생이 한 곳만 쓰는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즉, 이 윤성이라고 한 학생도 여러 대학에 붙을 경우 그 선택지는 학생 본인에게 있다는 소리였으니.
이럴 때 제일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뭐겠는가. 바로 주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리오는 신 화가의 전공 교수인 리처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상대의 초조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처드 교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시치미를 뗐다.
“보내 주려고 이렇게 면접도 간략하게 하고 있지 않나?”
[거짓부렁은 그만두시죠. 아까 신 작가, 아니 윤성 학생이 내일 뵙자고 하는 거 다 들었습니다.]“……크흠.”
[그거 분명 내일도 지금 같은 화상 면접 있는 거죠? 어딥니까? 우리랑 맞상대하는 데가.]리오는 눈에 불을 켜고 질문을 던졌다.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이 화상 통화를 통해서도 느껴질 지경이었기에, 리처드는 헛기침했다.
“커험험. 그걸 그새 들은 게야? 귀도 밝네. 아직 안 늙었구만. 요새 뭐 좋은 거 먹나?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아.”
[딴소리 마시고요. 영국에서는 분명 우리가 최고이니…… 프랑스나 뭐 스위스 쪽이에요?]런던예술대는 6개의 큰 칼리지로 이루어져 있는 영국 최고의 예술대였다. 나라를 막론하고 그 어떤 리포트에서도 세계 순위 5위 안을 차지하는 미술 대학이었다.
크기 또한 유럽 최대 규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리오 교수가 본인의 학교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
‘역시 내 순발력…… 이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 주든 윤성이 가려는 학교를 알아낼 수 있겠지.’
그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질문을 던진 스스로를 칭찬했다. 리오는 그의 자부심대로 영국이 아닌 다른 학교가 튀어나오든, 아니면 영국의 어떤 대학교가 나오든 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리처드 교수는 리오 교수가 파 놓은 함정을 자연스럽게 회피했다. 리처드 쪽이 교수 경력도 사회 경력도 위였으니, 이런 얕은 수법에 당할 리가 없었다.
“그걸 내가 말해 줄 수는 없지 않나. 흘흘”
[……좋습니다. 그럼 신 작가. 아니 윤성 학생에게 잘 좀 말해 주세요.]전공 교수의 조언은 원래 학부생에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법. 하물며 그게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불리는 리처드 교수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리처드 교수 쪽에서 런던예술대에 대해 좋게 말한다면, 윤성이 선택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리라.
“그냥 맨입으로 말하긴 좀 어렵긴 하지.”
[……그럼 뭐 뇌물이라도 드려요?]“흘흘. 내가 그런 거 바라는 사람은 아니란 거 알면서 그러나.”
[…….]잠시 리처드 교수와 말 없는 눈싸움을 벌인 리오. 그는 상대가 뭘 말하는지 알아들은 상태였다.
[하…… 입학생도 아니고 교환 학생에게 줄 수 있는 학교 차원의 혜택은 거의 없다고요.]“그야 그렇지.”
[그걸 잘 아시는 교수님이 지금 제게 뭘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사실이 그랬다. 교환 학생은 말 그대로 손님이었다. 다른 학교의 학적을 가진 채로 이곳에서 경험만 쌓으러 온 손님. 그런데 그런 손님에게 수많은 재정 지원을 투입할 학교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학교에서 하루 이틀 있는 사람도 아닌 리처드 교수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알게 뭐냐는 표정으로 리오 교수를 볼 뿐이었다.
“나야 모르지. 그런데 좀 팍팍 밀어주는 게 있다면, 내가 윤성이에게 말할 거리가 좀 더 있지 않겠나…… 뭐 이런 이야기라네. 후후.”
[윤성이…… 신 작가. 아니 그 학생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좀 부럽군요.]진짜로 부러운 듯 입맛을 다신 리오 교수. 그는 잠시 고민 후 결심한 듯이 눈빛을 빛냈다.
[좋습니다. 내일까지 저희도 협의 한번 해 보죠. 윤성 신 작가가 우리 학교 교환 학생으로 온다는데 뭐든 해 봐야지요.]윤성의 또래에 저 정도 화가는 세계를 통틀어도 신 작가 하나뿐이었다. 젊다 못해 아직 어린 나이에 벌써 이 정도라니. 이런 화가가 나이가 들면 미술사적으로 족적을 남기는 화가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화가의 일생은 전 생에 걸쳐 주목받는 법. 당연히 출신 학교나 한때 공부한 곳까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시대 순수 미술계에서 가장 유망한 작가. 그런 화가가 비록 교환 학생이지만 이쪽에 온다는 데 뭐라도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굳을 결심을 보이는 리오 교수를 본 리처드.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슬쩍 힌트를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맞다. 그리고 자네가 하나 착각한 사실이 있어.”
[착각한 거요?]“런던예술대는 분명 좋은 학교지. 그런데 런던에 하나 더 있지 않나. 괜찮은 학교가.”
리오도 교수 자리를 공짜로 받은 것이 아닌 만큼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리처드 교수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말이다.
[설마…… 골드스미스예요?]영국의 런던에 있는 골드스미스 런던 대학교. 종합 대학이지만 미술, 음악, 영화 등 예술 및 미디어 분야에서 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학교였다.
현대 미술계에서 그 유명한 포름알데히드에 박제한 상어로 유명한 데미안 하스트. 그 또한 이 학교의 출신이었다.
“골드스미스. 거기가 우리 학교랑 좀 비슷한 학교긴 하지? 이론 중심이기도 하고. 런던대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종합 대학의 성격도 가지고 있고 말이야.”
은근하게 웃으며 입을 여는 리처드 교수. 평소라면 왜 저렇게 웃는지 바로 알아차렸을 리오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뵈는 건 없었다. 잘못하다간 바로 옆에 있는 학교에 원하는 학생을 뺏기게 생겼으니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영국의 런던에서 그런 일을 당한다니. 진짜로 그랬다간 런던예술대의 이름이 울지도 몰랐다.
[안 돼요! 금반짝이 자식들한테 윤성 신 화가라니! 이게 뭔! 돼지에게 금덩이를 던져 주는 것도 유분수지!]“아니 뭘 그렇게까지…….”
골든스미스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금반짝이라고 부르다니.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돼지란다. 어이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말문까지 막한 리처드였다.
그러나 리오는 리처드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일! 내일까지만 기다려 주시죠. 괜찮은 조건 하나 어떻게든 만들어 볼 테니!]“저기…….”
뚝―
“음. 끊어 버렸군. 윤성은 딱히 거긴 생각도 안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말이야.”
애초에 이론 중심이고 종합대학인 골든스미스. 그건 에일대와 너무 비슷한 포지션을 가진 학교였다.
그 때문일까. 윤성은 딱히 그쪽은 지원할 마음도 없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이번에 낸 교환 학생 신청 학교에 그 학교는 빠져 있었기도 했으니, 확실하리라.
“뭐…… 그걸 저쪽에서 끊은 이상 다시 걸어서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리처드. 그는 다시 화상 통화를 거는 대신 고개만 들어 올렸다. 연구실에 걸려 있는 윤성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함이었다.
* * *
‘역시 난 이쪽이 체질이네.’
휘트니를 위해 자화상 연작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자화상도 좋고 초상화도 좋지만, 역시 나의 본질은 장르화에 가깝다는 것을.
그 때문일까. 난 이번 스미소니언에 조금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꾸준히 조금씩 그렸지만, 아직은 세상에 내놓을지 망설였던 작품. 그걸 최선을 다해 완성해 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어쩌면 이번이 좋은 기회일 수 있어. 이걸 일반 전시전이나 아트 페어에 내놓긴 어려울 거라고 여겼잖아.’
지금 내가 준비하는 작품은 그런 작품이었다. 상업성이 극대화된 아트 페어에 놓긴 좀 애매한 작품. 내 과거의 작품들을 모른다면 곧바로 전시하긴 좀 모호한 그림.
그러나 그리는 나로서는 참으로 재미있는 그런 작품 말이다.
‘스미소니언…… 고민했는데, 이런 식의 도움을 주네.’
역시 단독 전시회를 하겠다고 하길 잘했다. 이 정도 규모의 단독 초대전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작품은 한참 뒤에야 세상에 나왔으리라.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다잡은 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내 손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새기기 위해 꾸준히 그렸던 그림인 만큼 이미 상당 부분 많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습작이 되기 딱 좋았으니까.
‘완성하기 위해서 주어진 시간은 한 달. 그 정도면 충분해.’
그리는 속도를 생각해 보면 시간은 적절하게 남아 있었다. 비록 작품의 크기가 내 키를 훌쩍 넘어가는 거대한 그림이어도, 난 자신이 있었다.
‘연작을 그려본 경험도 있고, 이미 기존에 대형 작품을 전시도 했어. 그러니 가능해.’
조선에서 막 환생했을 때와 달리 난 이미 이번 생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각종 물감들을 활용해 대형 작품을 한 적도. 하나의 그림도 되고 쪼개도 그림이 되는 연작도 이미 해 봤다.
그랬기에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스미소니언이 전시회 한다는 그 일정에는 맞출 수 있을 거야.’
남은 기간은 고작 한 달 남짓. 이 거대한 연작을 완성 시키기 위해선 온전히 그 기간을 소모해야 한다는 것을.
‘원래 훗날을 기약한 작품을 끌어다 쓰는 만큼…… 시간을 최대한 쪼개서 해 보자.’
딱 한 달. 그 시간 동안만 난 내 모든 작업 역량은 여기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수업과 작업. 이 두 가지에만 집중했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깜빡 잊어버린 것이 있었다.
내가 그걸 기억한 건 날이 좋은 어느 가을 날, 어마어마한 걸 목격하고 난 이후였다.
‘이, 이게 다 뭐야?’
다시 환생해서 어지간한 일에는 당황도 하지 않았던 나였다. 그런 날 당황하게 만든 이들이 내 눈앞에 멀쩡하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