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어린 천재들이라면 환장하는 사람들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장훈은 전화를 끊었다. 어찌어찌 수습이 된 것 같았다.
‘이럴 땐 안 피우는 담배라도 말고 싶을 지경인데.’
안쪽에선 여전히 성효림 관장이 이민철 화백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일단 중간보고를 위해 잠시 나온 것뿐이었다.
성진철 회장이 충분히 궁금해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되는 건데.”
그의 중얼거림에 대한 답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성 관장의 비서인 김 과장이 입을 연 것이다.
“후, 그래도 설득해서 다행입니다.”
“성 관장님까지 납시었잖아.”
“그렇긴 하죠.”
어지간한 화가는 관장을 볼 수도 없었다. 그 아래의 큐레이터들이 계약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계약은 홍림 차원에서 꽤 신경을 쓴 것이리라.
마음을 놓는 김 과장과 달리 장훈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계약이 진행된다고 해도 애매한 부분이 있었기에.
“으흠, 세 작품이라.”
“왜 그러십니까?”
“성 회장님이 만족하실지 모르겠어서요.”
성 회장. 관장인 성효림조차 눈치 보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그림에 있어선 돈을 아끼지 않는 그이기에. 과연 이번 계약 결과를 어찌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유난히 마음에 들어 하셨던 풍경화가 포함되어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구체적인 계약 조건은 아직 마무리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10개의 전시 작품 중 어느 작품이 그 세 작품 안에 들어갈지는 윤곽이 나온 상태였다.
다행히 그 세 작품 중 하나가 성 회장이 유난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었으니.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 뻔했다.
[번화한 서울에서 자란 사람들―京華子弟(경화자제)]성 회장이 좋아한 풍경화의 작품명은 특이했다. 옛 고사성어로는 부잣집 자제들을 뜻하는 말. 그 사자성어를 작품의 이름으로 지어 놓았으니까.
“그러고 보면 회장님께선 확실히 눈썰미가 있으신 것 같아요.”
“여기 회장님 없다. 그렇게 아부해도 소용이 없다.”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에요.”
장훈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진지한 것이 정말로 그렇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왜?”
“그 작품이요.”
김 과장은 방금 본 작품을 떠올리는 듯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작품명이랑 그림을 같이 보면 묘한 상상이 든다니까요.”
“묘한 상상? 아, 뭔지 알 것 같은데.”
“그렇죠? 평범한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인데, 자세히 보면 다 뭘 하려는지 알 것 같달까요.”
라 이름 붙은 그림은 특이했다. 흔한 풍경화라고 하기엔 그 안에 깃든 힘이 있었으니까.
언뜻 보면 서울의 흔한 거리였다. 하지만 모두 각기 다른 옷차림에 다른 표정을 한 이들.
거기다 그들의 표정이, 들고 있는 소품이. 짐작 가능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림 속 인물들 하나하나가 어떤 사람인지 말이다.
“성 회장님은 그 작품 보고 그림 속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보인다고 하셨죠.”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신윤성 작가의 그림은 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확실히 회장님이 이쪽 공부를 많이 하시긴 하나 보네.”
“한두 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무리 부자라도 관심이 없으면 이렇게까지 하기 어렵죠.”
“그렇긴 하지.”
거기까지 말한 김 과장은 문득 든 의문이 있었다.
“근데 세 작품 다 성 회장님이 가져가긴 쉽지 않으실 것 같은데.”
“당연하지. 제임스 킴이 달려들던 거 봤잖아? 하나는 가져가려고 할걸.”
제임스 킴.
성진철 회장 못지않게 자금력에 구애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신인 화가의 그림 정도라면 너끈히 살 수 있는 인물이란 뜻.
그런 그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나타났다. 사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빈손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 바닥 소문 순식간인 거 알지?”
“예. 뭐.”
“세 작품을 작가가 넘겼는데, 그걸 모조리 성 회장이 가져갔다? 근데 그걸 제임스가 알게 되면?”
“……다음부터는 우리랑 거래 안 하려고 하겠죠.”
“그래, 우리로서는 VIP 한 명 잃는 거나 다름없다는 소리지.”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안타깝게도 좀 더 나쁜 방향으로.
* * *
사무실을 나오며 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예, 작가님.”
내게 미소를 지어 준 후 그들은 할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선생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손자분 작품은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흥, 당연한 것을.”
우리는 그 상태로 훈훈하게 헤어졌을 것이다. 만약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너구나. 이민철 화백의 손자, 아니 신윤성이.]삐딱한 자세로 선 남자였다. 그는 쓰고 있던 온통 검은 안경을 벗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이였다. 그러나 난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어느 나라 언어인지는 눈치챘다.
‘미국 쪽인 것 같은데.’
환생을 하며 내가 가장 많이 본 글자는 한글이었다. 설마하니, 그 조선에서 언문이라고 불리던 것이 주류 언어가 되었을 줄이야.
그리고 한글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 그게 바로 영어였다. 덕분에 난 이 언어의 중요성을 꽤 빨리 깨달았다.
내가 살던 당시의 한문만큼이나 많이 쓰이는 언어였으니까.
‘근데 뭐라는 거야. 대충 내 이름이 들린 건 알 것 같은데.’
최대한 빨리 배우고 싶었다. 과거 왜의 언어를 배우던 시대보다 지금은 훨씬 사정이 좋았다.
서책도 풍부했고 배움을 얻을 수 있는 방법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영어란 언어에 있어선 난 아직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을 때는 침묵이 좋았다. 이를 경험으로 알고 있는 난 빤히 상대만을 바라보았다.
나와 잠시 눈이 마주친 그는 성큼 더 가까이 다가왔다. 험악한 인상을 찌푸린 채로.
어지간한 어린아이였다면 단박에 도망갔을 것이다. 나 또한 순간 난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았을 정도였다.
‘뭐, 뭐지?’
위협적으로 다가온 그는 내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할아버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이 선생님.”
“호오, 이게 누군가. 자네가 여긴 어인 일이야?”
“선생님께서 전시회를 하신다는데 와 봐야죠.”
조금 전, 영어로 말한 것이 착각이라는 듯. 그는 약간 어색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만한 한국어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지인이신 건가.’
전생의 나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오신 할아버지. 미국 말을 하는 사람 몇 정도 알고 계셔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적당히 할아버지와 안부를 나눈 그의 시선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어이, 꼬마. 너, 한국어는 알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방금 들은 미국 언어에 비하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아는데요.”
다짜고짜 나오는 반말, 게다가 꼬마라니. 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불퉁한 내 대꾸에 눈썹을 치켜올린 그는 조금은 착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이 첫 전시회라고 들었다. 맞아?”
“네, 맞아요.”
“혹시 다음 전시회 일정은 뭐냐?”
“다음 전시회 일정이요?”
그런 게 내게 있을 리가. 이번 전시회도 할아버지께서 권해 주셔서 하게 된 일이었다. 난 자연히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 할애비를 보는 게야? 이제 윤성이 너도 작가니, 네 일정은 네가 정하는 거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그 음성은 분명 장난스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럼…… 우선 그런 걸 물어보기 전에, 본인 소개부터 정식으로 하는 게 맞지 않으실까요?”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렸던 조선이 아니란 거 잘 안다. 그럼에도 모름지기 첫 만남에서는 일단 자기소개를 하는 게 기본 예라고 생각했다.
“아, 난 제임스 킴이라고, 제임스로 부르든 킴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제임스가 이름이고 킴이 성인 거죠?”
“그래, 맞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래서 전시회 일정이 있냐니까?”
아까부터 대체 왜 내 전시회 일정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대답해 주지 않으면 언제까지 물어볼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생각해 둔 새로운 전시 일정은 없는데요.”
“그래?”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어째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순간적으로 오싹해진 기분에 어깨가 떨려 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제안을 던졌다.
“그럼 너 다음 전시회는 아메리카로 해라.”
“아메리카요? 그거 미국을 말하는 거죠?”
“그래! 여차하면 내가 좀…….”
상대의 설명이 길어질 것이 느껴졌다. 이런 건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싫은데요.”
“뭐? 싫어? 아니, 대체 왜?”
“전 아직 여기서도 못 본 게 많은걸요.”
사실이었다. 이 세계는 아직 내가 해 보지 못한 것. 경험해 보지 않은 것들로 가득했다.
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이리도 많거늘. 내가 굳이 그 멀다는 해외를 가야 할 이유가 뭔가 있겠는가.
‘그것도 미국이라니.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멀잖아.’
물리적인 거리가 멀다는 것. 그건 내 생각보다 많은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과거 청이나 왜를 생각해 보면 고작 그 거리만 떨어져 있었음에도 문화의 차이가 상당했다.
이 시대의 지도로 보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게 중국이나 일본이었다. 그런데도 그만큼이나 다른 화풍과 문화를 가졌는데, 하물며 미국이라니.
‘그런 곳에 가는 걸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갈 수는 없지.’
기본적인 문화와 사람들이 즐겨 보는 그림들. 그리고 어떤 화가의 작품들이 있는지. 그 정도는 공부하고 가야 하리라.
“그러니까…… 당분간은 싫다는 거지?”
“네에.”
“아예 외국에 나갈 계획이 없는 거냐?”
“네에, 없어요.”
자꾸 이야기가 길어질 조짐이 보였다. 그렇기에 난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
잠시 날 말없이 빤히 바라보는 그. 그는 얼마간의 침묵 후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너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했지?”
대체 뭔 사고를 거치면 대화가 이렇게 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상대는 어른이다.
이 시대에 와서 참을성이 많아진 나다. 일단 순순히 이 통통 튀는 대화에 어울려 주었다.
“일곱 살인데요.”
“그거 코리안식 나이지?”
“네? 코리안식 나이요?”
저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이를 세는데도 뭔가 다른 방식이 있다는 뜻인가?
“어쨌든 아직 만 10세도 안 되었다는 거잖아. 진짜 어리긴 하네.”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그는 홀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은 외국에 안 나가겠다고 했지? 꼬마야?”
그놈의 꼬마 소리는 진짜. 속에서 뭔가 올라온 내가 대답하기 전 그의 입이 좀 더 빨랐다.
“고작 10살도 안 된 꼬마가 이 정도 실력인데, 안 나가겠다고?”
이제 발견했다. 그의 손에는 내 작품이 담긴 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내가 장담하지. 너, 이 국내에서만 있기가 더 어려울걸?”
그는 종이 안 내 작품을 가리키며 두 눈을 번뜩였다. 치아를 드러내는 그 웃음 안에는 어딘가 기묘한 박력이 들어 있었다.
“세상에는 어린 천재들이라면 환장하는 사람들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