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4
4화 뭐라도 쥘 수 있겠는걸?
세월의 힘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사람이란 생물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는 존재였다니.
‘이 정도로 현실감 있게 표현이 가능하다고.’
신기한 문물들이 많았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 저절로 돌아가는 물품들. 내가 성숙한 어른이 아니었다면 놀라서 심장이 떨어졌으리라.
그중 가장 충격적인 건 부모님이 내게 자주 들이대는 물건이었다. 스마트폰이라고 했던가.
작고 네모난 검은 물건이었다. 난 아기여서 들 수 없었지만, 성인인 부모님이 한 손으로 가뿐하게 드시는 걸 보니 무게도 가벼운 듯했다.
그 하찮게 보이던 물건의 힘은 엄청났다. 그 검은 물건을 부모님이 내 앞에 들이댄 순간.
난 다시 이 시대를 의심할 뻔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정말 조선에서 나와 함께 살던 인간들이 맞는가?
그만큼 그건 그림을 업으로 삼은 나에겐 꿈에서만 그리던 물건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다니! 단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심지어 그렇게 남기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딱히 큰 수고를 들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도깨비방망이 같은 그 기이하기까지 한 물건을 보는 순간. 난 확신했다. 저 물건은 분명 화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저 물건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덕분에 한때는 꺼려지던 것. 그러나 난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 물건의 본질을 어느 정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물건으로 틈틈이 내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시는 부모님. 사진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현실을 빼다 박은 것 같았다.
‘사진이란 게 이 정도로 현실을 똑같이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도 다르게 발전했겠는데.’
종이로 되었다는 지폐. 그걸 봤을 때의 충격이 잊혀지지 않았다. 일개 화폐에 그 정도의 그림 기술을 투입할 수 있다니.
하물며 이제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도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스마트폰이란 것으로 말이다.
‘그럼 이 시대에는 나와 같은 사람은 없는 걸까.’
조선에서의 난 그림을 그리는 화공이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자, 현실을 표현하는 당사자. 그것이 나였으니까.
내가 본 것들. 내가 상상하던 장면들. 그 모든 걸 내 손끝으로 그려 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가지지 못한 나만의 힘. 하지만 시대는 그런 힘을 모두에게 부여할 수 있게 만든 모양이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없다고 하기엔, 그림들이 꽤 많이 보였지.’
이 시대에선 가만히만 있어도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 발품을 팔 필요도, 수많은 비용을 들일 것도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행동하시는 것을 지켜만 봐도 되었으니까.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액자에 걸려 있는 색다른 그림들. 그리고 거대한 화면에 종종 비추는 누군가의 작품들까지.
이 시대에도 분명 당시의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든 표현을 할 수 있는 시대. 이런 시대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낼까.
‘역시나 좀 더 공부를 해 봐야겠네. 난 아직 여기에 대해선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 원.’
조용히 공부를 하는 것. 한때 조선을 떠나 타지 생활을 했던 나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말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살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 * *
가영의 시름은 날로 깊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게 아들의 말문이 여전히 트이지 않았기에.
그녀는 결국 남편인 주혁에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윤성이가 벌써 두 돌이 한참 전에 지났는데도 아직 한마디 말을 안 해.”
“그래? 한마디도?”
“그렇다니까. 밥도 잘 먹고, 기어 다니는 것도 잘하는 애가 아직도 엄마, 아빠조차 안 하다니.”
하루 종일 옆에서 엄마, 아빠란 단어로 노래를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아들은 빤히 쳐다만 볼 뿐 입을 열진 않았기에.
“검색해 보니 윤성이 정도면 이미 엄마, 아빠는 다들 한다고 하더라고.”
아내의 말을 들은 주혁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평소처럼 조용하게 있는 아이.
윤성이를 본 주혁은 두 팔로 아들을 안아 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일부러 아이와 눈을 맞췄다.
“윤성아. 아빠 해 보자. 아. 빠.”
그는 여전히 TV 쪽으로 가 있는 아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이는 힐끔 쳐다만 볼 뿐. 여전히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진짜 별 반응이 없네.”
주혁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자 아이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주혁을 위로하는 듯. 이상하게 아이의 눈빛에서 미안한 기색이 읽혔다.
토닥― 토닥―
심지어 진짜로 어른이 위로하는 것처럼 주혁의 손까지 토닥이는 것이 아닌가.
아빠의 손을 아기자기한 손으로 천천히 두드리는 아들은 귀여웠다. 순한 아이임에는 분명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름을 부르면 눈도 맞추고, 반응도 하는 아들. 초롱초롱한 눈빛이 아무리 봐도 못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주혁의 생각에 가영 또한 동의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혹시나 말하는 거만 문제가 있나 싶어서.”
“으음.”
주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조심스러운 제안을 던졌다.
“당신이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지금 꺼내는 이 제안을 하기까지 주혁 또한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 방법이 최선이리라.
“우리 한번 장인어른네 가 보는 게 어떨까?”
“뭐?”
“아니, 아무래도 이런 일은 아이를 키워 보신 분에게 여쭤보는 게 좋잖아.”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반응하는 그녀. 그런 아내를 보며 주혁은 달래듯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난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
가영의 아버지인 민철은 주혁이 고아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그런 아버지를 아는 가영은 선뜻 집에 가자고 말하기 꺼려졌다.
또다시 주혁에게 모진 말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주혁은 가영의 미안한 마음을 안다는 듯이 그녀를 계속 설득했다.
“장인어른 댁에 가서 장모님이나 장인어른께 한번 여쭤보는 게 어떨까 해서.”
“난 아직 아빠를 만나기가 좀…….”
“윤성이도 태어났으니, 우리 한번 다시 가 보자.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잖아.”
벌써 연락을 뜸하게 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아예 인연이 끊길 수도 있었다.
주혁은 자신 때문에 아내가 부모님들과 연락 두절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아내는 번듯한 부모님이 아직 다 살아 계시지 않는가.
그의 마음을 짐작한 가영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럴 때의 남편은 그녀가 이길 수 없었기에.
잠시 한숨을 내쉰 그녀. 가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윤성이 보시면 좀 나으시겠지?”
“당연하지. 귀여운 외손주잖아.”
부부는 그렇게 아이를 보며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를 가진 부모이기에 할 수 있는 결심이리라.
* * *
난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이제는 어지간한 근육은 내 뜻대로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인고의 세월이 꽤 길었다.
‘참으로 인내심을 시험하는 나날이었지.’
많이 먹고 꾸준히 움직이기. 누구나 아는 정석이었다. 하지만 원래 정석은 실천하기 어려워 정석인 법.
하물며 그 정석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먹는 욕구와 관련이 있다면 말 다 했다.
오물― 오물―
계속 멀건 죽 같은 걸 먹었다. 그러다 이제 슬슬 씹히는 걸 먹기 시작하니. 살 것 같았다.
밍밍한 것만 먹던 입이 요즘은 호강 중이었다. 흐뭇해진 나는 기분 좋게 밥을 먹었다.
오늘 주어진 밥은 유난히 맛이 있었다. 이제 어머니께서 슬슬 내 입맛을 알아 가시는 건지도 몰랐다.
‘역시 조선, 아니 한국인은 밥심이지.’
내가 열심히 먹는 것을 본 어머니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셨다.
씹고 넘기는 일이 내 일이었다. 어머니께서 수저를 끊임없이 내 앞으로 날라 주셨기에.
“우리 윤성이. 밥 잘 먹네. 오구오구. 맛있어요?”
맛있었다. 그러나 원래 밥을 먹을 때는 밥에만 집중하는 것이 예의. 난 이런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어길 생각이 없었다.
그 대신 내 머릿속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겉으로는 못해도 속으로는 뭐든 할 수 있었으니까.
‘어디 보자.’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손의 움직임을 보기 위함이었다.
다섯 손가락 모두 문제가 없었다. 작은 손이었지만 힘도 충분히 들어갔다.
‘쥐었다 펴는 건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인내의 결과는 달콤했다. 묵묵히 성장하는 것에만 집중한 덕분일까. 내 손아귀 힘은 이제 뭐든 잡고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괜찮았다.
‘이 정도면, 뭐라도 쥐고 그릴 수 있겠는걸?’
물론 당장 붓질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 집에는 붓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난 걱정하지 않았다.
원래 그림의 처음 시작은 흙바닥에 낙서하는 법. 전생의 그도 흙장난부터 시작했으리라.
그러나 환생까지 했는데, 어린아이처럼 흙바닥에 낙서할 생각은 없었다. 난 이미 종이와 낙서할 수 있는 필기구는 봐 둔 상태였기에.
‘아버지, 어머니께서 쓰시는 물건이 저쪽에 있었지?’
구석에 있던 작은 탁자. 거기엔 오늘의 내가 노리는 물건이 있었다. 두 분 부모님께서 그거로 글씨를 쓰는 걸 똑똑히 봤다.
이제 슬슬 몸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이번에야말로 뭐라도 그려 보려고 했다.
다시 태어나고 이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니.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되었기에.
‘그 길쭉한 것들은 지금 시대의 필기구가 틀림없을 테니, 그걸로라도 한번 그려 보자.’
도구들의 구체적인 생김새를 떠올린 나. 식사만 마치면 바로 움직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