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46
46화 혹시 저 짤리지는 않겠죠?
조선에서 그림은 생각보다 정형화되어 있었다. 단순한 남녀상열지사를 그릴 때도 말들이 많았으니까.
정형화되어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만 그리는지 물어보면,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아버지 신한평은 물론 내가 만난 그 어떤 화가도 답을 주지 않았다.
나와 똑같이 답을 구하지 못한 대다수의 선택은 어이없었다. 그냥 남들이 그린다는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뿐이었으니까.
화가의 혼이라곤 손톱만큼도 담기지 않은 그 작품들. 물론 난 아니었다. 혼이 담기지 않은 그림들을 보며 반발심만 생기곤 했기에.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 한 번쯤 소유하고 싶은 작품. 난 그런 작품이라면 소재는 뭐든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건 볼 때마다 신기하네.’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는 일은 늘 재미있었다. 개안하는 기분이라고 할까. 내 그림을 만들어 내는 것과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작품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뉴욕에서 방문한 뉴욕현대미술관. 통칭 MoMA. 거기서도 이런 류의 작품은 꽤 있었다.
그래도 난 이쪽이 좋았다. 아무래도 작가가 직접 작품을 설명하는 만큼 느껴지는 바가 달랐으니 말이다.
“이 철로 만든 것. 다 직접 제작하신 거예요?”
“예, 재료만 구해서 직접 두들기고 펴서 만듭니다.”
그는 내게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그게 편하다나 뭐라나. 머뭇거리는 기색은 여전했지만, 작품에 대한 설명 하나는 확실했다.
“이건 하나의 길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철은 우리 산업의 핵심 중의 핵심이니까요.”
“오호.”
“그 철길이 하늘로 이어지는 걸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상당히 거대하네요. 이런 건 보통 얼마나 걸리세요?”
“이 작품의 경우는 세 달 정도 걸렸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꽤 다양했다. 철, 점토 등 직접 손으로 작업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쓰는 듯 보였다.
다양한 재료들과 가지각색의 모양들. 하지만 표현하는 바에서 묘하게 공통점이 존재했다.
“주로 길을 표현한 작품이 많네요.”
“아, 그게…….”
가벼운 내 말에 그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쑥스러워하는 표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어디 잘 다니진 못하지만, 멀리까지 나 있는 길은 동경하거든요. 이게 표현이 좀 어렵긴 한데요.”
작은 크기부터 거대한 것까지. 다양한 작품을 능숙하게 표현하는 그였다.
그러나 의외로 정작 말로 표현하는 것에 있어선 좀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덕분에 좀 두서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서 내게 자신의 뜻을 전달해 주려고 했다.
“신체 내부에 있는 혈관이나, 자동차가 다니는 길 등. 길이 있어야 안 멈추고 멀리 갈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전 멈추지 않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길을 표현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게 어떤 길이든지요.”
확실히 지금 이 시대의 화가들은 특이했다. 이 정도로 하나에 몰입해야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듯 보였으니.
‘길이라…….’
뭔가 잡힐 듯 말 듯 한 실마리가 있었다. 더 자세한 건 이 전시가 끝나고 붓질을 좀 해야겠지만 말이다.
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갑자기 날 불렀다. 작품을 설명할 때와는 달리 급격하게 작아진 음성이었다.
“저기. 신윤성 작가님.”
그의 부름에 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위쪽을 보자 그는 아차 한 듯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한층 더 소리를 낮춰 내게 질문했다.
“역시 저희는 어렵겠죠?”
“어렵다니요?”
“제 작품은 최첨단 기술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라…… 작가님과는 잘 맞지 않을 테니까요.”
본인 것이 최첨단이라 잘 맞지 않을 거라니.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난 고개를 모로 수그렸다.
“최첨단인 거랑 제 작품이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진짜 궁금해서요.”
“실은 제가 이전에 이미 작가님의 작품들을 꽤 봤습니다.”
“이전에요?”
이전이라니. 이 말뜻은 이번 베니스를 계기로 서로가 작품을 보여 주기 전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이전 생과 달리 아직 내 작품은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지지 않았다. 그가 내 이전 작품 하나가 아닌 여럿을 보았다면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저와 할아버지의 가족전에 오신 적이 있으시군요.”
“예, 그때 처음 작가님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흡입력이 강력한 작품들이었어요.”
“잘 봐 주셨다니, 감사한 말씀이시네요.”
“실은 저도 한 작품 구입하고 싶었는데, 이미 팔렸거나 비매품이라고 해서 사지 못했죠. 물론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사려고 해도…… 아, 이게 아니라.”
잠시 딴 길로 빠질 뻔한 사태를 겨우 막아 낸 그. 현민은 얼른 본론으로 돌아와 다시 의견을 제시했다.
“이게…… 협업이란 게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할 것 같아요.”
“다른 한 분이 계시다곤 해도, 저와 작가님의 스타일이 워낙 다르니…… 흡.”
그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공포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새하얗게 낯빛이 변한 그는 날 붙잡고 어딘가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저 짤리지는 않겠죠?”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리로 튄다는 말인가.
“짤리다니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아니요. 제가 알기론 신 작가님은 무조건 모셔 온 분으로 들었거든요. 그럼 아무래도 제가…….”
상대가 더 불길한 소리를 하기 전에 끊어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경험상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초창기에 확실히 뿌리를 뽑아야 좋았다.
“일단 우린 같이할 수 있어요.”
“예? 왜요? 아니, 어떻게요?”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이걸 어찌한다?’
한순간 고민을 한 나였다. 그러나 역시나 내게 제일 익숙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속이 편하지 않겠는가.
“잠시만요. 원래 이런 건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난 즉시 그 장소에 자리를 폈다. 쪼그리고 앉는 것보다 아예 양반다리를 하는 것이 편했다.
달칵―
먼저 들고 온 작은 책가방을 열었다. 말로 열심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그려서 보여 주는 편이 나으니까.
* * *
신 작가님은 전시회 감상 태도부터가 남달랐다. 보통 이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과 달리 하나하나 작품을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셨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행동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잠시만요. 원래 이런 건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그 말을 끝으로 작가님은 가방을 여셨다. 그곳에선 줄줄이 도구들이 나왔다. 작은 연필과 얇은 공책. 딱 봐도 그림을 그리시려는 모양새셨다.
저 작은 가방에 저런 걸 다 넣고 다니시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그러나 작가님의 행동은 그게 시작이셨다.
‘뭘 보여 주시려는 거지?’
이때까지만 해도 현민은 전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작가님이 뭘 하시려는지 말이다.
“우선 간단히만 생각해 봐도 우리는 어울릴 수 있어요.”
공책을 펼친 작가님은 연필을 유심히 보셨다. 그 후에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공책에 선을 그리시기 시작했다.
“소재나 표현 기법이 달라도 공통점을 찾으면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먼저 방금 본 작품은 철로 만든 길이었죠?”
신 작가님은 말씀하시면서 가볍게 스케치를 그리셨다. 그 가볍디가벼운 동작에 작품의 특징이 온전히 들어가 있었다.
“하늘로 뻗어 가는 느낌의 철길. 좋아요. 거기에 저라면 사람을 세워 볼 것 같거든요.”
그분의 말씀을 듣는 동시에 그의 눈에는 그림이 들어왔다. 점점 구체화되어 가는 선들을 보며 현민은 멍해졌다.
‘이게 무슨.’
그림 실력에 놀란 건 절대 아니었다. 연필 소묘 정도야 이미 학부 시절에 마스터하는 게 일반적이니. 당장 그 스스로도 그리려면 그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진정으로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방금 전시를 보고 그리는 거야?’
그들이 전시를 본 시간은 짧았다. 이제 고작 초등학생인 신 작가님의 체력을 고려한 일정이었다.
고작 몇십 분. 단순하게 작품을 감상했다고 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원래 제대로 작품을 분석하고 감상하기 위해선 하나만 가지고도 몇 시간이 걸리곤 했으니까.
그런데 고작 그 짧은 시간을 보고 바로 작품을 구상한다는 말이야? 본인 작품뿐만이 아니라 남의 작품까지 고려해서?
심지어 꽤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내 그리고 계셨다. 온전히 작가인 그의 뜻에 맞게 작품을 이해하고 그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건 이해력도 이해력이지만…….’
자신만의 작품을 생각해 내는 것이야 모든 화가가 평생에 걸쳐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자마자 가장 조화롭게 자신의 작품을 구상할 수 있다니. 스스로의 작품과 남의 작품을 모두 최대치로 이해하고 분석해야만 가능한 작업이었다.
‘본인 그림 스타일을 얼마나 낱낱이 알고 있어야 저게 가능한 거야…….’
그가 속으로 경악하는 사이에도 신 작가님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그분은 이제 그림에 강약까지 둬 가며 열정을 다해 설명 중이셨다.
“다른 한 작가님과의 궁합도 봐야겠지만, 우리 두 사람은 정말로 나쁘지 않아요.”
“작가님…….”
“그러니까. 벌써부터 포기하지 말죠. 저희.”
이쯤 되자 슬슬 그에게도 확신이 생겼다.
물론 여전히 두 사람의 작품 세계가 맞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와 신 작가님은 둘 다 그리 경험은 많은 화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천재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어린 작가님이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의 앞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것처럼. 금방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 분명할 테니.
어쩌면 정말로 괜찮은 협업이 나올지도 몰랐다.
“예로부터 전심전력으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희도 할 수 있어요.”
어려운 사자성어까지 써 가며 말씀하는 작가님을 보자 어딘가 슬슬 웃음이 나왔다. 어깨에서 힘도 빠진 기분이었다.
그쯤 되자 그는 문득 둘이 바닥에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크흠, 그러고 보니 작가님. 저희 일단 다른 데로 가시죠.”
“아.”
그제야 작가님도 주변을 둘러보셨다. 난 그런 작가님이 잘 일어나실 수 있도록 일으켜 세워 드렸다.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이건 확실히 눈에 띄네요.”
기분 탓인지 저쪽에서 사진 찍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이거 다른 이들에게 민폐였겠네요.”
“그렇죠? 그러니 더 자세한 이야기는 어디 카페에 가서 하시죠. 저 뒤에 서 계시는 어머님도 같이요.”
작가님과 내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꽤 먼 거리에서 따라오고 계셨던 신 작가님의 어머니. 그런 그녀가 어느새 부쩍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우리가 제자리에서 멈춰 서 공책을 펼쳐 대고 있으니 걱정이 되신 모양이셨다.
“좋아요. 전 아이스초코를 먹을래요.”
“그건 저보단 작가님의 어머님에게 허락을 받으시는 게…… 아, 잠시만요. 전화가 왔네요.”
그는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그러더니 날 바라보며 통화를 계속하는 게 아닌가.
“어? 완전히 정해진 겁니까? 마침 신 작가님도 함께 계시긴 하는데요.”
뭔지는 몰라도 나와 관련된 통화인 것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