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55
55화 라고시안 갤러리가 어디인데?
“그럼! 이 할애비는 어디 아픈 곳 없단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지 뻔히 알면서 이런 말을 하시다니. 일부러 난 콕 집어서 말문을 열었다.
“저 다 봤어요. 할아버지.”
“흠흠.”
연신 헛기침을 하시는 할아버지를 난 빤히 바라보았다.
“…….네 엄마에게는 비밀이다.”
보호자 자격으로 내 옆에 계신 할아버지를 뺀 나머지 가족들은 저 뒤편에 앉아 있었다. 그랬기에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시는 것이었다.
“네에. 원래도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비밀로 해 드릴게요.”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난 순수하게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근데 진짜 왜 우신 거에요?”
“운 적 없대도!”
“…….”
“흘흘. 그냥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구나.”
여러 가지 생각이라니. 내 의문어린 얼굴을 본 할아버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셨다. 어쩐지 개운하신 표정이셨다.
“늘 우리는 쫓아가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상을 받을 것이라 여긴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야.”
“그래요?”
“그래. 오죽하면 제대로 된 통역도 없지 않니.”
무려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에도 통역이 없는 것. 난 별 생각이 없었는데, 할아버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집어내셨다.
“그만큼 우린 이들에게 변방이라서 그렇다. 미국도, 서유럽도 아닌 한국의 미술이 세계에서는 딱 그 정도거든.”
그 씁쓸한 어조에 난 과거가 떠올랐다. 과거에도 비슷했다. 조선보다는 저 먼 대륙의 예술이 더 인정받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윤성이 네가 상을 받았으니, 그 시선은 점점 달라질 게다. 그걸 생각하니, 이 할애비는 기쁘더구나.”
“겨우 제가 상 받았다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 걸요.”
과거에도 그랬다. 조선에도 뛰어난 화가가 많았음에도 그 시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문화의 흐름이란 게 그리 쉽사리 바뀌는 게 아니었다.
“아니, 달라질게야. 우리 윤성이는 젊고, 앞날이 무궁무진하니 말이다.”
내가 할아버지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좀 진정되신 듯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잠시 대화를 멈춘 나와 할아버지는 박 선생님을 반겼다.
“죄송합니다. 신 작가님. 제가 인터뷰하기로 해 놓고 이랬네요.”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 덕분에 외워 온 말도 하고 좋았습니다.”
“역시 작가님은……”
잠시 말끝을 흐리시던 선생님은 나와 눈높이를 맞추셨다.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 기색이셨다.
“아까 저 위에서 한 감사 인사는 작가님에게 드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제가 이런 상도 받았으니까요.”
“그게 왜 다 제 덕분이에요. 우리가 같이 잘한 거죠.”
“전 작가님께서 하자고 하는 대로 한 것 뿐인걸요.”
“이 선생님이 큰일 날 소리 하시네요. 본인도 의견 내시면서 만드셨잖아요.”
이건 한 톨의 의혹도 없는 진실이었다. 내가 한 건 간단한 의견 제시 정도였다. 그 의견을 바탕으로 지금의 작품을 만드신 건 선생님이셨다.
‘확실히 세련되게 표현하실 줄 아시더라고. 괜히 연미 아줌마가 칭찬한게 아니었어.’
선생님과 2년 가까이 작업을 하면서 연미 아줌마와도 왕래가 많아졌다. 그로 인해 난 종종 그녀가 선생님에 대해 평하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진짜로 톡톡 튀는 작품을 잘 보여주셨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난 이런 마음을 겉으로도 표현했다.
“애초에 제가 준 건 그냥 간단한 실마리뿐이었는 걸요. 그걸 이렇게 작품으로 멋지게 만든건 선생님이세요.”
“작가님은 그 큰 그림들을 다 혼자 그리셨잖아요……..”
내가 한 칭찬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진짜로 나 혼자 그 그림을 다 그린 것이니. 이에 대해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거기다 제가 만든 작품에 맞춰서 그리시기까지 하셨으니, 저보다 더 시간도 없으셨을텐데……..”
이것도 맞는 말이었다. 처음 시작과 끝이 내 작품이었던 만큼 내게 주어진 시간은 더 촉박했다.
그럼에도 내가 해낼 수 있는 이유. 물론 내 손이 빠른 탓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건 이 시대의 발전된 문물 덕분이었다.
“요즘은 도구가 참 좋더라고요. 쓸 수 있는게 워낙 많아서 가능했어요.”
간단하게는 붓의 크기부터 시작해 많은 것이 달랐다. 색도 내가 이전에 쓰던 것과 달리 훨씬 세밀해졌다.
그 때문일까. 내가 손을 대야 하는 부분들이 현저히 줄었다. 예를 들면 색의 농도를 조절하거나, 선의 굵기를 더 미세하게 바꾸는 것 말이다.
“그냥 저희 둘 다 잘한 거로 하죠. 헤헤.”
생각해 보니 한 명만 은사자상을 받은 것보다 이렇게 같이 받는 게 훨씬 좋았다. 어쩌면 그걸 알고 여기서도 황금사자상을 우리에게 준 걸지도 몰랐다.
둘 다 잘한 거로 하자는 내 말에 선생님은 더 감동 받았다는 눈빛이 되셨다. 그러더니 내게 작은 목소리로 살짝 입을 여셨다.
“작가님 저희 다음번에도 같이 전시회 하시죠.”
이번 비엔날레만 기회가 아니었다. 앞으로 초대전이며, 기획전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저야 좋죠. 선생님과는 궁합도 확실하게 좋은 것 같으니.”
난 활짝 웃었다. 황금사자상. 세계적인 상을 받은 것도 물론 좋았다. 그러나 더 좋은 건 내 작품이 이 시대에 확실하게 통한다고 확인받은 것이었다.
단순히 이 한반도 내에 국한된 협업이 아니었던 만큼, 이번 일은 내게도 얻은 게 많은 공부였다.
그 순간 온통 외국어로만 가득한 이곳에서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말하는 한국어가 들려왔다.
“확실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가님은 남다르시네요.”
슬쩍 우리의 옆에 다가온 사람. 그는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박현민 선생님까지. 셋의 시선이 쏠렸음에도 상대는 태연하게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실례했습니다. 두 분의 모습이 보기 좋아 그만. 아, 제 소개부터 해야겠군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국어는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음. 어딘가 상인을 떠올리게 하는데.’
잘 차려진 옷차림에 환한 미소. 끼어드는 솜씨가 수준급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는 자였다. 과거 내가 본 상인을 떠올리게 하는 말솜씨. 아니나 다를까 그는 우리 셋 모두에게 명함을 건냈다.
“안녕하십니까. 작가님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한 나는 내게도 주어진 명함을 들여다 보았다. 어린 아이에게도 명함을 직접 조심히 건내주다니.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고….시…안?”
모르는 이름이었다. 애매한 얼굴이 된 나와 달리 할아버지는 익히 아시는 모양이셨다.
“라고시안 갤러리? 설마 그 라고시안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민철 작가님.”
“라고시안이 왜 우리에게…….”
박현민 선생님의 의문 어린 물음에 그는 아주 상큼하게 웃으며 답했다. 마치 준비해 온 것처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 법이죠.”
무려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음에도 난 여기서 통역사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내 앞의 남자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하고 있었다.
이건 무조건 우리를 위해 준비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눈치 없는 나라도 이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국말 진짜 잘하시네요.”
한때 왜의 말을 배웠고 지금 영어를 배우고 있는 나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만큼 눈앞의 남자가 상당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작가님을 뵈러 왔으니, 한국어는 당연히 잘 해야죠.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출장을 왔습니다.”
한국어를 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어투였다. 우리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사이. 그는 시원시원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 갤러리는 한국 작가들과 인연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 내용이 난데 없는 갤러리 홍보라는 것에 있었지만.
“한때 비디오 아트로 유명하신 박남준 선생님이 저희와 전속 계약을 하시기도 하셨죠.”
왜 저런 말을 여기서 한다는 말인가. 이런 내 의문은 곧 해결 될 수 있었다. 그가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기에.
“아마 저희와 전속 계약을 하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것을 약속 드릴 수 있습니다.”
전속 계약. 할아버지가 속해 있는 곳에서도 내게 종종 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여기 베니스에 참가하기 직전까지도 그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그러고 보니 제임스도 그 이야기했지.’
제임스 킴. 그도 내게 전속 계약을 권했다. 만약 본인이 미국에서 총기 사건 때문에 병원에 가지 않았다면 난 더 시달렸으리라.
“음, 전속이요.”
난 저 전속이란 걸 함부로 할 생각이 없었다. 할아버지나 다른 분들을 보면 언젠가는 해야겠지만.
내가 아직 이 시대에 대해 잘 모르는게 많은 이상 섣불리 정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전 이미 전속을 한 갤러리가 있어서…….”
“아쉬운 말씀입니다.”
박현민 선생님은 진짜로 아깝다는 얼굴이셨다. 선생님의 표정을 보니 이 갤러리가 좋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선생님과 달리 그렇게 말한 상대는 별로 아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한 번 그냥 말해 봤다는 것처럼. 그야말로 예의상 권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런 내 의심은 그의 다음 말에 반쯤 확신 할 수 있었다.
“아, 물론 이민철 작가님께서도 이미 소속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거도 저희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죠.”
박현민 선생님과 달리 이 말에는 미약한 진심이 들어있었다. 정말로 아깝긴 하다는 얼굴이었으니까.
‘할아버지가 대단한 화가시긴 하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이었다. 할아버지의 나직한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온 것은.
“…….쯧. 이제보니 진짜는 윤성이를 노리고 왔구만?”
“딱히 그건 아닙니다만, 여기에 현재 전속이 없으신 작가님이 한 분뿐이시군요.”
정답이라고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혀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당당함이 풍겨왔다.
“라고시안이 신인 작가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특이하긴 한데.”
할아버지는 턱을 쓰다듬으며 신기해 하셨다. 이쯤되자 나도 궁금해 졌다. 대체 라고시안이 어디길래?
“할아버지. 여기 큰 데에요?”
“…….”
“…….”
난 진짜 몰라서 물어봤다. 하지만 이런 내 질문에 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어지간히 대단한 곳인가 본데.’
특히나 박현민 선생님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내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하시는 기색이 역력하셨으니까.
‘아니, 어느 정도길래?’
“신 작가님. 그, 아마 작년에 작품 판매 매출이 1조는 되는 곳인데……어, 이렇게 말해도 모르시려나요.”
선생님은 내게 귓속말로 작게 속삭이셨다. 최대한 상대방에게 안 들리게 말하려다 보니 이렇게 하시는 것으로 보였다.
박 선생님이 이곳에 대해 내게 최대한 알려주려고 하는 사이. 할아버지는 그를 상대했다.
“보다시피 우리 윤성이가 아직 어려서 이쪽을 잘 몰라요. 그래도 전속으로 데려가고 싶은지 궁금하긴 하네. 흘흘.”
언제 눈물을 보이셨냐는 듯 할아버지는 특유의 의뭉스러운 얼굴을 하셨다. 그러더니 툭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게 아닌가.
“저희는 가능성 있는 신인 작가님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꽤나 멋진 말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상대의 반응에 코웃음을 치셨다.
“지금 내 앞에서 무슨 거짓말을 하는 건지. 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거짓말을 하다뇨.”
“라고시안 갤러리가 신인 작가들 전속 계약 안 하는 건 이 바닥이 다 아는 일이거늘. 지금 그 소리를 나보고 믿으라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