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56
56화 한국에 없다면서요?
라고시안 갤러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트 딜러 라고시안이 대표로 운용하고 있는 갤러리다.
미술계에서 늘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규모인 만큼 그들이 팔아치우는 그림 금액은 엄청났다.
한 해 매출만 억 단위 달러는 가뿐하게 넘기곤 했으니.
이곳의 아트 딜러 중 하나인 필립. 그는 라고시안 소속이라고 하면 달라지는 눈길을 많이 봐 왔다.
덕분에 이런 반응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는 속으론 식은땀을 흘렸지만, 겉은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 이민철 작가가 이 정도로 손자 사랑이 강할 줄이야.’
한국 화가 중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 이민철. 라고시안 갤러리도 이민철 작가에 대해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한국 갤러리와 전속이 끝나면 한번 컨택해 볼 의지가 있었기에.
그렇기에 이번 베네치아에서의 만남을 좋을 기회라고 여겼다. 원래 목표로 하던 신윤성 작가를 비롯해 이민철 작가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 이민철 작가의 반응이 까칠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라고시안은 신인작가에겐 꽤 가혹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신인 작가님들과 전속 계약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아직 저희 눈에는 가능성 있는 작가가 많이 없었을 뿐이지요.”
라고시안이 이미 거장들만 좋은 조건으로 주로 데려간다는 건 어지간한 업계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분위기에서 그걸 인정할 수는 없었다.
“흘흘. 여기 큰 데냐고 물어봤지 윤성아?”
필립의 말에 이민철 작가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손자인 신윤성 작가를 향해 슬쩍 말을 돌리는 게 아닌가.
“네에. 근데 반응을 보니 알겠어요. 꽤 큰 데인 모양이네요.”
꽤 큰 곳이냐니. 진짜로 신윤성 작가는 우리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세상일은 정말 알 수가 없네. 이 명함 한장에 벌벌 떠는 작가가 한 둘이 아닌데.’
몇몇 작가들은 말했다. 라고시안에서 선택한 작가는 성공 가도를 달린다고. 그들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라고시안 갤러리 소속 작가란 건 앞으로 그림 가격이 비싸질 작가라는 소리와 다름없었기에.
이런 필립의 생각과 달리 이민철 작가는 손자를 향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뭐. 작은 곳은 아니다. 지난 번 할애비가 메이스 갤러리 이야기 해 준 적 있지?”
메이스 갤러리. 라고시안의 라이벌 격인 갤러리였다. 둘 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갤러리로 매출이 엇비슷했으니까.
“네에. 이야기 해주셨어요. 한국에 제일 빨리 들어온 갤러리 중 하나라고…….”
이 말을 들은 필립은 속으로 신음성을 삼켰다. 라고시안은 아직 한국에 갤러리가 없었다. 그들의 주요 활동 지역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이었기에.
잘못하면 저게 발목을 잡게 생겼다.
‘혹시 메이스 쪽이 먼저 컨택을 한 건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시안이 주목하는 화가를 메이스라고 해서 놓칠 리가 없으니.
하물며 방금 말한 것처럼 메이스는 한국에 갤러리가 있었다. 신윤성 작가와 접촉하기에 라고시안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는 게 사실이었다.
‘당장 대표님에게 보고부터 드려야겠군.’
그가 속으로 결심한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민철 작가가 필립에게 대놓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메이스보다는 좀 작은 데긴 하지. 더 최근에 생긴 곳 이기도 하고.”
“……안 작습니다. 작년 저희가 판매한 금액이 메이스보다 큽니다.”
결국 필립은 그 대화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들었기에.
“라고시안이 더 뒤늦게 생긴 건 맞지 않나요?”
“그만큼 저희의 성장이 빨랐던 거죠.”
여기까지는 잘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팩트로 들어오니 필립은 한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라고시안은 한국에 안 들어왔잖나.”
“……그래서 최근에는 아트페어 등을 통해 더 많은 접촉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이민철 작가는 저 나이에도 업계 사정에 환했다. 그는 상대가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전, 강점부터 드러냈다.
원래 협상은 약점은 감추고 강점은 드러내면서 하는 것이었으니.
“작가님 저희와 계약하시게 되면 정말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조건도 절대 신인 작가 답지 않게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이민철 작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잘만 하면 오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늘 변수는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오는 법.
“음, 일단 계약이란 건 신중해야 한다고 배웠는데요.”
이제 고작 8살. 그 어린 나이에도 신윤성 작가는 괜히 베니스 비엔날레의 수상자가 아니라는 듯 똘망똘망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애늙은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명확하게 본인 의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그런 어린아이의 똘똘함을 보호자가 완벽히 받쳐주고 있었다.
언제 얼굴이 풀어졌냐는 듯 다시 단단한 눈빛을 한 이민철 작가였다.
“우리 윤성이는 여기서 황금사자상까지 수상한 작가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연락이 올 수 있지요. 암.”
“메이스는 작가님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겁니다. 거긴 이미 한국 작가가 몇 명 있어요.”
이미 진즉에 한국에 진출한 메이스. 라고시안과 달리 거긴 원래부터 신인작가들도 종종 전속 계약을 했다.
비록 그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거기도 발전 없는 신인 작가를 기다려 주는 곳은 아니었으니.
“꼭 메이스가 아니어도 윤성이가 갈 수 있는데는 많지요.”
이민철 작가는 필립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되묻기까지 했다.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이 아이는 일반적인 아이와 다르다는걸.”
“…….”
“평범한 화가야 갤러리의 전속에 혹하겠지만, 내 손주는 다르지요.”
보통 화가가 갤러리 전속에 목을 매는 이유는 간단했다. 갤러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팔 수 있는 방법이 적었으니까.
괜히 갤러리들이 작가 그림 가격의 절반을 수수료로 가져가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작가 입장에서는 갤러리는 판매를 하기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정말 신윤성 작가가 기이하게 큰 작가긴 하지.’
작가 신윤성.
이제 고작 초등학교 학생인 그의 그림이 이렇게 주목 받으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도 그럴게 나이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건 하늘이 내린 천재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천재라고 불리는 어린이들은 하나를 잘했다. 추상화면 추상화를 정물화면 정물화를 말이다.
대부분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천재였다.
하지만 신윤성 작가는 기술적인 면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욕망을 어찌나 잘 건드리는지. 한 번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다음 작품을 절로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 작가가 전속이 없다니, 다들 군침을 흘릴만 하다는 게 문제야.’
보통은 특정 갤러리에 전속이 되고 나서야 빛을 보는 작가가 많았다.
일단 홍보가 되고 사람들이 작품을 접해야 작가의 위상이 올라갔다. 그렇게 유명세를 타는 게 자연스러웠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이 어린 작가는 그런 평범한 루트를 밟지 않았다.
이민철 작가가 말하는 신윤성 작가의 특별함. 그걸 알기에 필립이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이었다.
그가 좀 더 라고시안의 좋은 점을 어필하려고 할 때였다. 신윤성 작가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한 손에는 그가 준 명함을 든 채였다.
“저기요. 여기 라고시안이요. 한국에 없다면서요?”
“예.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저희의 매니지먼트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는 장담할 수 있었다. 라고시안은 전 세계적으로 최고였으니까. 신윤성 작가가 기대되는 신인이라고 해도 이건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확신 어린 대답에 신윤성 작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아닌가.
“아뇨. 문제 있을 거에요.”
“예?”
문제라니. 역시나 다른 갤러리가 먼저 좋은 조건을 제시한 게 분명했다. 작은 갤러리면 이제 막 떠오르는 이 작가의 작품이 황금으로 보였을 것이니.
하지만 신윤성 작가의 말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가 당분간은 한국에서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예? 그게 무슨.”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저랑 전속 계약이요.”
“…….한국에서 나가지 않으시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작가님.”
이게 중요했다. 뭔가 작가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면 이쪽도 계약에 대해 다시 고려를 해야 했으니까.
“흐음. 우리 자세한 거는 이 자리가 아닌 다른 데서 하는 게 어때요?”
신윤성 작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신 작가의 말처럼 몇몇 사람들이 유난히 이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슬슬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많이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신윤성 작가의 말이 맞았다.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좀 더 조용한 장소에서 하는 것이 좋으리라.
“좋습니다. 작가님. 자리를 옮기시죠. 시상식도 끝났으니, 나가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 없을 겁니다.”
“네에. 근데 잠깐 부모님께 말하고 와도 되죠? 저 뒤에 계셔서요.”
“이참에 다 같이 가시는 것도 좋겠군요. 제가 마침 이 근처에 있는 아주 괜찮은 집을 하나 압니다.”
이미 신윤성 작가의 부모에 대한 조사도 완료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만만하게 모두를 초대할 수 있었다.
***
라고시안은 오랜만에 올라온 전속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그 전속 계약서와 함께 올라온 보고서. 이를 꼼꼼히 살핀 그는 안경을 벗었다.
탁-
태블릿을 내려놓은 라고시안은 안경이 누른 코를 주무르며 질문을 던졌다. 글로 보는 것도 좋지만, 정확한 일은 원래 말도 함께 들어야 했다.
“흐음. 작가 윤성 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거지? 한국에 당분간 있겠다고?”
“그렇습니다.”
“아직 어리긴 하군. 그 좁은 물에서 있으려고 하는 걸 보니.”
“이해는 갑니다. 나이가 어리니, 모국에서 이것저것 배우고 싶은 것 같더라고요.”
“쯧. 학교는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도 다닐 수 있는데 말이지.”
신윤성 작가가 당분간 한국에 있겠다는 이유. 그건 가족들 옆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의지가 컸다.
“왜 그렇게 학업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네. 이미 이쪽 길이 탄탄한데 말이지.”
어지간한 화가들이 꿈에 그리는 걸 벌써 이룬 작가였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가 보기에 신윤성 작가는 특이한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필립 말로는 다양한 걸 알고 배워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했다더군요. 확실히 애 같지는 않네요.”
“왜 요즘 좋은 프로그램 많지 않나. 유학이라던가. 해외 연수 같은 거도 있고.”
“그걸 안 물어보지 않았답니다. 본인 말로는 딱 봐도 적응이 어려워 싫다고 하더라고요.”
“신 작가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가?”
“예. 무슨 외국 생활 몇 년은 한 사람처럼 말하더군요.”
필립의 말에 따르면 아주 구체적으로 외국 생활을 어려움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음식부터 시작해 각종 생활까지.
줄줄이 튀어나오는 그 구체적인 예시에 필립은 할 말을 잃었다고 할 정도였다. 어찌나 생생한지 상대의 나이가 8살이 아니었다면 모두 겪어본 일이라고 확신할 뻔했다고 했으니.
“이제 고작 8살이 외국 생활은 뭘 해봤겠나. 그냥 엄마랑 떨어지기 싫은 거겠지. 쯧.”
“그래서 저희 측도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직접 보고서와 계약서를 들고 대표 앞에 서 있는 이유. 그건 내용적인 측면에서 꽤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