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57
57화 오늘 무슨 날인가?
신인 작가에게는 계약서도 내밀지 않는다는 라고시안.
그런 라고시안 갤러리가 특약까지 넣어가며 신윤성 작가를 잡은 것이었다.
언제까지 작품을 줘야 한다거나, 최소한의 전시회 기준도 없는 계약서. 그야말로 작가에게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시대로 했으니, 꾸지람을 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
상사의 눈치를 보며 비서는 입을 열었다.
원래 신윤성 작가와 하려던 계약과 미묘하게 달라진 전속 계약서. 그에 대한 이유를 이참에 설명한 것이었다.
“그랬지. 그러니 결국 그쪽도 우리랑 전속 계약을 맺은 것 아니겠나? 비록 그 기간은 짧지만.”
여러모로 수정된 계약서였다. 라고시안이 불리한 이야기가 몇 있는 만큼 비서의 말투는 조금 빨라졌다.
“말씀하신 것처럼 작가 신의 기대치는 어마어마합니다.”
신인 작가는 말 그대로 신인이었다. 그렇기에 위험성이 존재했다. 지금 괜찮아 보이는 작가여도 몇 년 뒤에 고꾸라질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이미 성공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들은 남들이 이 꿀단지를 눈치채기 전에 잡아야만 했다.
“그렇겠지. 어린 천재 작가 아닌가.”
“예. 그 나이에 벌써 작품이 수집가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게 거론되고 있으니까요.”
한 번 형성된 이름값은 어지간해서는 떨어지기 쉽지 않았다. 만들기가 어려울 뿐. 일단 만들어졌으면 그걸 유지시키긴 훨씬 수월했기에.
수집가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이름이 살살 알려주는 중이었다. 한국의 어떤 화가의 그림이 심상치 않다고.
지금 사두기만 한다면 앞으로 그냥 저절로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말이다.
“저희가 매니지먼트만 제대로 한다면, 동양쪽에선 그야말로 따라올 자가 없을 겁니다.”
“당연하지. 그걸 기대하고 우리도 계약하자고 한 거 아닌가.”
중국의 장쯔만, 한국의 이민철 등 살아있는 화가 중 이름을 날리는 화가는 꽤 있었다.
하지만 그 화가들보다 이쪽의 가치가 월등하다는 것이 라고시안의 판단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나이와 화풍. 그리고 작가 개인이 가진 그 특색까지. 라고시안이 추구하는 작가진에 적합한 화가였다.
그렇기에 신인 작가는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라고시안이 베네치아까지 날아가서 낚아채온 것이었다.
‘작가 신의 미래가치. 앞으로 한참이지.’
그는 생각에 잠겼다. 보고서와 각종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아무래도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 같았다.
“좋아. 결정했다. 한국에 우리도 진출 좀 고려해 봐야겠어.”
“예? 한국에요?”
비서는 당황했다. 고작해야 신인 작가의 계약에 불과한 일이 왜 여기까지 확대된다는 말인가.
다른 국가에 갤러리가 진출하는 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다. 한 명의 작가 전속 계약에 비해 훨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유럽 쪽을 메인으로 살피고 있었습니다만.”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에서 이미 재미를 많이 보고 있는 라고시안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다음 목표 또한 현재 까지는 유럽이었다.
아직 거기서 뽑을 수 있는 수익이 무궁무진했으니. 그러나 비서의 말에 그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울은 나쁘지 않아. 구매력도 좋은 편이고.”
“그렇긴 하지만, 아시아 쪽 시장 공략이라면 홍콩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미술품 거래 시장에서 아시아는 꽤 큰 손이었다. 그 중 제일은 아무래도 중화권 쪽이었기에. 홍콩에 괜히 많은 갤러리들이 진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알아. 그쪽이 더 크다는 건. 다만 미래의 잠재 가능성을 보자는 거지.”
현재의 구매력만 비교해 놓고 보면 홍콩을 따라올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 격차는 좁혀지지 않으리라.
그러나 경쟁자들까지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쪽은 아직은 블루오션에 가까웠으니.
“홍콩과 달리 서울에는 그다지 큰 갤러리가 없잖아?”
“최근에는 몇몇이 들어가긴 했습니다.”
메이즈가 대표적이었다. 라고시안과 늘 쌍벽을 이룬다는 그 갤러리가 이미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명성에 비해선 아직 한 일이 별로 없었다.
“거긴 한국 쪽 갤러리들이 워낙 꽉 잡고 있다 보니, 아직은 그 힘이 강하진 않아 보이더군요.”
비서의 말에도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아예 결심한 듯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이참에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 보자고. 우리 라고시안의 다음 갤러리로 한국이 어떤지.”
한국은 안정적인 투자처였다. 미래의 대박을 위해 지금 씨를 뿌려두는 일. 라고시안이 이 방법으로 유럽에서 대박을 쳤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다음 분기 보고서에 진지하게 검토해서 올리도록 해.”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만 신 작가는 좀 놀게 두자고. 초대전 몇 번이면 이름값은 유지 시킬 수 있으니.”
지금의 라고시안이 있게 만든 신화적인 대표의 말이었다. 비서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지시를 따르겠다는 뜻을 전했다.
***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후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무려 9년. 어지간한 강산도 바뀔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으니. 내가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 지 벌써 어언 18년이었다.
‘이전이라면 이미 혼인도 했을 나이긴 하지.’
혼인이 뭔가 조선에서는 이맘때 이르면 아이까지 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그야말로 아이가 애를 낳는 격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니 이런 부분에 있어선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물론 이 시대만의 가장 큰 차이가 있었으니.
“자! 이제 너희들도 이번 방학 끝나면 고3이야!”
“우우우.”
“야유할 것 없어. 엄연한 현실이니. 다들 이번 방학 때 준비 잘하고.”
고등학교 3학년.
다시 태어난 내 모국 대한민국에서 상당히 중요시하는 인생의 분기점. 나 또한 그것을 맞이할 시기가 왔다.
“내가 내년에 고3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진짜.”
선생님이 나간 뒤 가방을 싸며 친구들은 서로 한탄 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 쭉 친하게 지낸 아이들. 그렇기에 애들이 내게도 다가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짜 부럽다. 신윤성. 넌 대학 어디 갈까 이런 고민 안 하지?”
내가 뭐라고 답하기 전 나보다 다른 애들의 답이 더 빨랐다.
“안 하겠지. 윤성이 정도면 오라는데 많지 않을까?”
“그것도 몰라. 윤성이가 딱히 무슨 공모전이나 대회를 나가진 않았으니까.”
“그건 그렇겠다. 내가 아는 애도 무슨 그림 대회 같은 거 막 준비하던데.”
내가 다니는 이 고등학교는 예고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림 쪽 진로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적었다.
적었기에 오히려 내 경우는 막연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듯 했다. 딱히 경쟁자라고 하기 어려웠으니.
이 어설프지만, 한편으로는 날 걱정하는 대화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참 재미있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아직은 고2 잖아. 대회 나가서 상 쓸어오기 늦은 건 아니지.”
서로 떠들던 친구들의 시선이 그제야 내게 쏠렸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할아버지의 말을 전할 뿐이었다.
“난 그런데는 나갈 생각 없어. 할아버지도 말리셨고.”
“아니, 왜 말리신 거야? 네가 나가면 1등은 따 놓은 당상 아니야?”
“나도 모르지 할아버지의 뜻이니까.”
이렇게 말해도 짐작은 갔다. 지금 내게 그런 대회는 의미가 없었기에.
공모전을 준비하고 대회를 준비하는 화가들. 그들은 그걸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러나 지금 내게 그게 필요한지는 의문이긴 했다.
물론 난 이런 구체적인 면을 말하는 대신 적당히 할아버지의 뜻만 전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말에도 친구들은 굴하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야야. 몇 년간이나 비엔날레도 안 나갔잖아. 이번에야말로 나가서 본때를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지도?”
“그것도 좋지. 윤성이가 상 받아온 뒤로 아주 난리도 아니었는데.”
확실히 당시에 곳곳에서 호들갑은 있었다. 각종 주요 언론사에 기사로 나왔으니까. 나야 당시 아직 어려서 가만히 있었을 뿐.
박현민 선생님은 온갖 군데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 뭐해. 그 뒤로 줄줄이 특별상도 못 받았잖아.”
“참가하는 곳이 8, 90개 국가는 되는데, 그중 상을 못 받는 데가 더 많아.”
“그래도 윤성이 네가 나가면 또 받을 수 있을지도?”
“넌 왜 이렇게 비엔날레에 집착하냐?”
“원래 올림픽은 국뽕으로 응원하는 맛이 있거든.”
나 때문에 미술에 대해 조금 더 아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내가 상을 받아왔다고 하니, 그 뒤로도 비엔날레에 대해 열심히 찾아본 모양이었다.
기대하는 친구들에게 어쩐지 찬물을 뿌리는 기색이라 미안하긴 했지만.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무리. 이번에는 진짜 입시에 전념해야 할 것 같아서.”
“뭐? 왜?”
“어지간한 건 다 깨어있는 우리 할아버지도 입시는 꽤 중요하게 여기시더라고.”
요즘 들어 할아버지는 내가 작업실에 갈 때마다 은근슬쩍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나도 입시란거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뭐? 너도?”
의외라는 주변의 반응들이었다.
‘일단 들어가 봐서 나쁠건 없지.’
간단한 예시로 그가 전생에서 때려치운 도화서. 마음에 들지 않아 나오긴 했지만, 들어가 본 경험이 그의 인생에 도움이 된건 사실이었다.
하물며 양반들도 그토록이나 성균관을 비롯해 좋은 자리 찾아가려고 했다.
그걸 아는 난 알고 있었다.
나올 때 나오더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남들이 좋다는 곳은 한 번 들어가 봐야 한다는 것을.
***
“할아버지. 저 왔어요.”
이미 따로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그래도 종종 난 여전히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평소라면 자연스럽게 날 반겨주셨을 할아버지. 그러나 오늘은 좀 달랐다.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날 반기시며 정보를 주셨기에.
“어? 윤성아. 네 할아버지 너네 집 갔는데. 혹시 연락 못 받았어?”
살짝 난감해진 난 얼른 스마트 폰을 들여다 보았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오느라 놓친게 있는 모양이었다.
[할애비 너네 집 간다. 너도 끝나면 그쪽으로 와라.]할아버지 성격답게 무척이나 간단한 내용이었다. 잠시 한숨을 내쉰 난 일단 답부터 했다.
[문자 이제 봤습니다. 저 지금 할아버지 댁이에요.]내가 이 말을 치기 무섭게 다시 문자가 날라왔다. 폰을 붙잡고 있으신 게 분명했다.
[아이고. 엇갈렸구나.] [걱정 마세요. ^^ 저 바로 갈게요.]답을 끝낸 난 다시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도착하게 된 우리 집. 그곳에서 난 무척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이고. 윤성아. 이제야 왔구나.”
“이게 뭔…….”
내가 두 눈을 끔뻑이는 사이. 거실에 앉아계신 식구들은 하나같이 날 반겨주셨다.
“윤성아. 너 빨리 손 씻고 이쪽으로 와봐. 네 의견이 제일 중요하니까.”
“애 놀라게 뭘 그리 서둘러? 윤성아. 천천히 옷 갈아입고 나오거라. 흘흘.”
할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난 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선생님도 난데없이 고3이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이런 모습도 보게 되었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