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6
6화 재능이 심상치 않다
난 상당히 뿌듯했다. 남몰래 혀를 굴리며 연습한 보람이 있었으니.
‘역시 한 글자는 괜찮네.’
두 글자가 넘어가는 순간 내 혀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히 한 글자는 괜찮았다.
이제 완벽하게 발음할 수 있었으니까. 되도록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는 단어만 말하자고 마음먹었다.
“붓 줄까?”
“네!”
이대로 시간만 지나면 이제 두 글자 이상도 완벽해지리라.
엎어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이왕 이렇게 된 것 앞으로 어느 정도는 필요한 말을 해도 좋으리라.
주변에서 내 입만 보는 것이 느껴졌다. 머뭇거리던 할아버지는 나와 붓을 번갈아 쳐다보셨다.
“그…… 혹시 붓으로 뭘 하려는 거냐?”
“드림이요!”
아뿔싸. 역시나 두 글자 이상은 아직 무리였다. 받침 따위 없음에도 약간 새는 발음이 흘러나왔으니.
‘씁.’
내가 남몰래 짜증을 내는 사이. 내 머리 위에선 한창 대화가 진행 중이었다.
“허, 참.”
내 할아버지. 조금 전 도화지 앞에서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는 어이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네 혹시 나한테 온다고 애한테 이상한 거 시킨 건 아니겠지.”
‘이상한 거?’
의문을 품은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니, 아빠도 참.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래요. 당신도 봤잖아요. 방금 윤성이가 엄마라고 잘 하지도 않는 거.”
“그거야…….”
말끝을 흐리던 할아버지는 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직후 연신 헛기침을 시작했다.
“크흠. 크흠. 아이가 원하는 건 들어줘야지.”
“저, 하지만 아빠.”
시원시원하게 나온 할아버지의 대답. 그 말에 반박한 건 뜻밖에도 어머니였다.
“지금 작업하고 계신 거 아니셨어요?”
작업.
확실히 내가 방금 본 건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큰 종이를 눈앞에 두고 사색에 잠긴 듯했으니까.
“괜찮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이쪽으로 오려무나.”
결국 난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움직였다. 멀리서 본 것보다 더 많은 형태의 붓이 보였다.
‘오호, 붓의 모양이 제각각이구나.’
조선으로부터 한참 후의 미래인 대한민국.
먼 미래의 낯선 곳에서 본 반가운 물건은 내게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그야말로 환상 속에서 현실감이 든 느낌이랄까.
‘드디어.’
마침내 붓을 잡게 되나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손에 붓을 든 채 날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할아버지라고 해 볼래?”
“…….”
“그럼 이 붓을 주마.”
난 갈등했다. 지금 입 밖에 내는 단어는 분명 완벽하지 않을 테니.
‘그림을 못 그린 지 한참이야.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태어난 집에는 붓이 보이지 않았다. 전생의 우리 집안은 붓과 친한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아버지까지. 모두들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리는 걸 업으로 삼으셨으니까.
그러나 이번 생은 달랐다. 물론 내가 집을 다 뒤져 본 건 아니었기에 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전생과 달리 다시 태어난 집안은 그림을 그리는 가문은 아니란 것을.
두 분은 그림을 업으로 삼으시는 분들은 아니셨다. 그렇기에 난 이 기회를 외면할 수 없었다.
* * *
“할아비.”
“어허허. 내 손자가 말을 잘 알아듣는 게 확실하구나.”
너털웃음을 터트린 할아버지. 내게 붓 대신 다른 걸 쥐여 주었다.
길쭉한 동시에 끝이 뾰족한 것. 어떤 도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붓이 아닌 건 확실했다.
옆에 뻔히 붓이 있는데 이 무슨.
고민했다. 이걸 지금 집어 던지는 건 명백히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니.
‘어찌하면 좋으려나.’
내가 결정을 내리기 전 할아버지께선 나와 눈을 맞춰 주셨다. 이걸 준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셨다.
“아직 손이 작아 붓을 들긴 어려울 게야. 이 펜으로 해 보려무나.”
‘펜?’
난 그제야 손에 든 걸 자세히 살펴보았다. 앞쪽이 뾰족한 것이 대충 어떤 용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물건이 다양화되었나 본데.’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여긴 내가 살던 때에서 한참 떨어진 미래다.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들 또한 발전하고 많아졌으리라.
‘그럼 종이는?’
내가 두리번거리자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행동했다. 종이 한 장을 내 바로 앞에 놓았다.
하얀색의 백지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자유롭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세계였다.
‘다시 그릴 수 있어.’
심장이 떨려 왔다. 죽기 전과 달리 내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눈도 침침해지지 않았다.
아직 어린 몸. 그러나 온전히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육신.
난 정말로 다시 태어났다.
스윽―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손에 힘을 쥐었다. 가볍게 그리는 선. 모든 그림의 시작이었으니.
붓질을 했을 때 어떤 선이 나오는지 알아보는 것. 이건 그림을 그리기 전 해야만 하는 필수 과정이었다.
새로운 도구로도 이 과정은 필요하리라.
슥―
그 순간 난 놀랐다.
‘선이 균일하다니!’
이전과 달리 난 내 손끝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혀조차 굳어 말도 제대로 못 했으니.
그런데 그런 몸뚱어리로도 이렇게 바른 선을 그릴 수 있다니.
이건 전적으로 도구의 힘이었다.
난 재빠르게 펜을 들어 눈 가까이 대 보았다. 무슨 원리인지 궁금했기에.
“어허. 펜 그리 가까이 대면 위험해요. 찔릴 수 있단다.”
하지만 이는 다른 이의 손에 의해 막혔다.
“위험한 행동 하면 뺏을 거다.”
잘은 모르겠지만 눈에 대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난 포기하고 다시 선을 그렸다. 역시나 균일하기 그지없었다.
‘신기하긴 한데, 이러면 제대로 그릴 수가 없어.’
연습하면 이 펜을 가지고도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건 거짓말이었다.
장인일수록 더 손에 익은 도구를, 더 몸에 맞는 도구를 써야 했다. 그래야 최상의 작품이 나올 수 있었으니까.
하물며 장인이 아닌 사람은 더하리라.
그런 만큼 이 펜이란 물건은 지금 내겐 맞지 않았다. 장인도 되지 못한 내가 처음 쓰는 물건으로 작품을 그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당장의 느낌을 표현할 붓이었다.
탁―
난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할아버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붓!”
“응? 이게 싫은 게냐?”
펜을 한쪽에 곱게 내려놓은 날 보며 할아버지의 표정이 묘해졌다.
붓과 날 번갈아 보던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허허. 이건 아직 이르대도.”
“붓 주떼요.”
“……허허허, 거참.”
할아버지는 졌다는 듯 웃음을 지으셨다. 그 결과 난 드디어 원하는 대로 세필에 가까운 붓 하나를 쟁취할 수 있었다.
* * *
민철에게 붓을 받아 내는 아들을 본 가영. 그녀는 신기한 마음이 들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원래 이맘때 애들이 이래요?”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긴 하지.”
딸의 물음에 미숙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너도 어릴 때부터 뭔갈 그리는 걸 좋아했어. 피가 어디 안 가는 거지.”
“아하.”
“그렇다고 해도 펜 대신 붓을 쥐겠다고 할 줄은 나도 몰랐구나.”
보통 윤성이처럼 작은 아이가 붓이나 펜을 구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윤성은 펜 대신 기어코 붓을 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쥘 수 있는 붓이라고 해 봐야 제일 작은 붓이 한계였다.
붓과 제 손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아이는 입을 삐죽였다.
“뭔가 또 마음에 안 드나 본데.”
솔직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귀여웠다.
그랬기에 그는 아이가 붓을 쥐는 방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선을 그리는 건가?”
아이는 주변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어른이 자기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듯 보였다.
종이와 펜을 쥐여 주면 바로 뭔갈 그릴 줄 알았던 그들. 그러나 아이는 펜을 거부하고 끝내 붓을 가져갔다.
이제는 그 붓으로 일자 선을 그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 선이 아이가 그리는 것답지 않게 반듯하기 그지없었다.
“선을 상당히 잘 그리는데요.”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입가엔 웃음이 넘쳤다. 아이의 귀여운 행동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 일자 선이 3번이 넘어가고 나자 변화가 찾아왔다.
꽤 오랫동안 신중하게 선을 그리던 아이. 윤성은 그제야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종이의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스윽―
신중히 선을 그리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망설임 없이 그리는 모습. 그 모습은 여기 있는 어른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무슨.”
아이의 손에 쥐어진 건 진한 물감에 딱 한 번 담근 붓. 윤성이는 그 작은 손으로 붓을 거침없이 움직였다.
문제는 그렇게 움직인 붓에서 서서히 그림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앞에 놓인 거대한 네모. 네모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 그 사람의 한 손은 허리에, 나머지 한 손은 허공에 든 채였다.
“이거…… 방금 그…….”
“아버지를 그린 것 같은…….”
동시에 입을 연 가영과 주혁. 그들은 민철의 눈치를 보며 금세 입을 다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그림에선 박력이 풍겨 나왔다. 조금 전 민철의 분위기를 판에 박은 듯 이.
스윽― 슥―
아이의 그림은 끝나지 않았다. 점점 흐려지는 붓질로 윤성이는 배경까지 완성하고 있었다.
“와. 우리 손자가 참으로 그림을 잘 그리네요. 역시 당신을 닮은 건가?”
미숙은 가볍게 말했다. 그녀가 보기에 아이의 그림은 꽤 재능이 있어 보였으니까.
“조용.”
하지만 정작 민철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방금까지 아이의 재롱을 보는 눈이었건 그. 그런 그의 눈빛이 변한 채 서 있었다.
“…….”
드디어 윤성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흐리게 나오던 붓에서도 이제 하나도 뭔가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그림을 완성했다는 듯. 얌전히 붓을 옆에 내려 두었다.
“…….”
한참을 침묵을 지키던 민철. 그는 그제야 제 딸과 사위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재능이 심상치 않구나.”
“아하하. 역시 장인어른을 닮아서…….”
“농담이 아니다.”
민철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손자가 그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나이에 남들이 알아보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 해도 천재 소리를 듣는다.”
사실이었다. 윤성이는 아직 유치원도 가지 않았다. 그런 아이가 어른들이 알아볼 정도로 그림을 묘사할 수 있다니. 그것만 해도 보통은 아니었다.
“헌데, 이 아이는 그 정도가 아니야.”
하지만 민철이 정말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