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65
65화 붓질에 이골이 나지 않은 이상 불가능에 가까운
“그거 한정하기 어려운데…… 각 계통의 디자이너부터 시작해 영화감독들까지 다녀가니까.”
디자이너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에일은 그쪽도 유명했으니까. 같은 미술 쪽이기도 했고.
그런데 영화감독이라니. 그런 사람도 여기 온다는 말인가? 여긴 영상 분야가 아니라 순수 미대 작업실 쪽인데?
심지어 지금은 학기 중도 아니었다.
“지금 에일대도 방학 아니에요?”
“맞아, 방학. 하지만 방학이라고 활동 안 하는 거 아니니까.”
대학교의 방학은 내가 아는 방학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사이 교수님께서는 내게 뜬금없는 제안을 던지셨다.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내 소개로 일해 보는 거 어떤가? 대학생이 되면 파트타임 잡을 가지는 게 큰 경험이 되지.”
교수님의 소개로 일이라니. 아직 난 여기 학생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여기 학생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그 순간 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1년간 메일을 할 때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던 리처드 교수님. 이분이 최근에서야 내게 에일에 올 것을 권했다.
“설마 이거 때문에 에일에 오라고 하신 거예요?”
일자리 주선을 위해서? 대학교도 모자라 일할 거리까지 주려고 하다니. 어쩐지 보이지 않는 손이 날 붙잡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착각이겠지만.
“후후, 파트타임 자리를 주선하기 전에 얼굴은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전 면접 때문에 직접 보자는 줄 알았는데요.”
하긴 생각해 보면 시기가 안 맞긴 했다. 교수님과 내 만남은 내가 지원서를 쓰기 전부터 계획이 되어 있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리처드 교수님께서는 의아한 눈빛이 되셨다.
“면접이라니? 무슨 면접?”
“에일대학교 입학 면접이요. 보통 교수진이나 해당 학교 졸업한 선배가 한다고 들어서요.”
“아하하, 이거 오해하게 할 만했는데. 미안하지만 난 거기 관여 안 한 지 좀 되었거든.”
내가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난 재빠르게 말을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원한다면, 말 보태는 정도는 할 수 있긴 한데…….”
“그것보다 그 일이라는 거요. 뭔가요? 빨리 설명해 주시죠. 궁금하네요.”
내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을 아셨기 때문일까. 교수님께서는 이번만은 넘어가 주신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여셨다.
“별건 아니고. 내가 아까 얼핏 말했지? 여기에 영화감독도 온다고.”
“네, 그러셨었죠. 아까 작업실 앞에서.”
내가 신기하게 여겼던 점이기도 했다. 디자이너도 아닌 영화감독이 여기까지 오다니.
“설마 제게 배우를 하라는 건 아닐 테고.”
“신 작가가 잘생기긴 했지만. 자네의 경우는 얼굴보다 손이 더 귀하지.”
“……얼굴도 귀한데요.”
이 몸이 이래 봬도 한때 기방에서도 인기를 날렸던 몸인데. 심지어 이번 생의 얼굴은 전생보다 더 좋았다.
잘 먹고 잘 자란 탓일까. 키까지 작은 편이 아니었으니. 외적인 면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불퉁한 대꾸에 교수님께선 미소를 지으셨다. 그러더니 내게 미끼를 던지시는 게 아닌가.
“영화감독 이야긴 안 궁금한가 보지?”
“아뇨, 궁금합니다. 배우가 아니라면 뭔가요.”
“아까 거길 오는 감독 중 하나가 날 찾았거든. 작가 한 명 좀 찾아 달라고.”
교수님을 따라 걸으며 난 그분의 입에 집중했다. 다시 태어나 수많은 영상을 본 나지만, 영화에 대해선 문외한에 가까웠기에.
“극 중 미장센이 될 만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 그런 사람 좀 소개를 부탁하더라고.”
“미장센이면…….”
“그림이 영화를 관통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그걸 잘 그리는 화가는 많지 않거든.”
미장센. 저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영화 내에서 등장하는 주제를 단번에 보여 줄 만한 그림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정말 잘 만든 미장센은 꽤 찾기 어렵지. 대부분은 영화에 얹어 가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래도 이미 그림은 많을 텐데요?”
세상에는 수많은 그림이 있었다. 그중에서는 명화라고 불리는 그림도 많았다. 감독의 의도가 어떤 것일지 모르겠지만. 아예 찾을 수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건 딱 맞춤 그림은 아니지 않나. 내가 아는 그 친구가 욕심이 좀 많거든.”
이 정도 일이면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을 듯 보였다. 그런데 나보고 일을 하라니.
내가 속으로 한 생각을 읽으신 듯 교수님께서는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다른 사람보다도 난 이왕이면, 자네가 했으면 하거든. 이 일은.”
“어…… 뭔가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실은 그 친구 덕분에 우리가 이메일도 하게 된 거야.”
“예?”
드디어 난 이메일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난데없이 에일대 교수님인 리처드 교수가 생판 모르던 내게 메일을 한 이유를 말이다.
“이런 스타일의 작가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보여 준 게 신 작가 그림이었거든. 라고시안에 걸려 있는.”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알다시피 뉴욕과 여기가 먼 건 아니니. 주말에 직접 가서 봤지 뭔가.”
“주말에요?”
“그래, 그리고 그림 자체가 아예 처음 보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는 걸 알았지.”
교수님은 알지 않냐는 듯 내게 눈을 찡긋하셨다.
“어지간해서는 유화에 묻히기 쉬운 수채화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붓질에 이골이 나지 않은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표현법 아닌가.”
과연 교수님. 정확하게 보셨다. 기름이 기초인 유화와 물이 기초인 수채화는 아예 사용 방식이 달랐다.
나야 전생에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기에 가능했을 뿐. 어지간해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능숙하게 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수채화를 좀 다룬다고 하는 작가들도 있는데, 그런 작가들은 유화 실력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서.”
역시나 교수님께서는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말씀하셨다. 둘 다 수준급인 화가는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에 능한 작가들은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유화에도 일가견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나? 후후후. 난 못 해. 내가 할 수 있었으면, 신 작가 그림을 사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굉장히 솔직한 동시에 겸손하신 말씀이셨다. 내가 아는 교수님의 그림 실력은 절대 그렇게 말하실 정도가 아니었는데.
그러나 리처드 교수님께서는 당시 본 그림을 회상하신 듯. 아련한 눈빛이 되며 입을 여셨다.
“신 작가 그림은 진짜 특이하거든. 마치 한평생 수채화만 그린 거장이 유화를 배워 그린 느낌이야.”
“…….”
“물론 신 작가 나이가 어리다는 걸 알고, 말도 안 되는 가설이라고 여기긴 했지.”
그림을 그리는 기술. 물을 다루고 농도를 조절하는 방법. 모두 내가 이미 전생에서부터 습득한 것들이었다.
이번 생의 수채화보다 더 다루기 어려웠던 먹과 붓. 그리고 색이 있는 안료까지. 그걸 다뤄 본 나에게 쓰기 편하게 발전한 미술용품들은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웠다.
“한국에서 입시를 위해 주로 수채화를 한다고 듣긴 했는데, 그런 환경 속에서 나온 건지도 모르지.”
이미 우리나라의 미대 입시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듯 교수님께서는 작게 중얼거리셨다. 아무래도 진실과 별개로 교수님께서는 나름대로 납득하신 듯 보였다.
전생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었으니. 나 또한 이 방향이 나았다.
“한국 입시가 주로 그쪽을 다루긴 하죠.”
“안 그래도 다루기 힘든 게 수채화 아닌가? 수정도 어려운데, 농도는 물로 조절해야 하는 데다 종이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라지니, 원.”
그렇기에 수채화의 고수가 유화까지 잘하긴 어려웠다. 아예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많이 달랐으니까.
하물며 수채화는 유화나 아크릴에 비해 지속력도 안 좋은 편이었으니. 더더욱 최근의 전문 화가들은 이를 가까이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때 제 그림이 눈에 들어오신 거군요.”
“내가 아예 처음 보는 스타일의 작가를 대체할 사람을 어찌 찾나? 그냥 본인에게 연락해 보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지.”
그게 이메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제야 지난 1년간 메일을 하게 된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납득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교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셨다. 그러더니 날 돌아보시며 질문을 던지셨다.
“아, 혹시 남의 요청에 따라 그리는 그림은 못 그린다는 타입인가?”
전생에서도 작가 중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다. 본인의 주장이 너무도 확실해 다른 이가 부탁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사람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은 아예 도화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조선의 도화서는 왕의 명령에 의해서 그림을 그리는 곳이었기에.
“그건 아닙니다.”
난 그쪽은 아니었다. 애초에 조선에서 나고 자란 화가들은 그쪽일 수가 없었다. 가장 남의 말을 듣길 싫어했던 나조차 의뢰받아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으니까.
‘오히려 가끔 생각도 환기되고 좋았지.’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하는 것. 그것만 해서는 실력이 늘래야 늘 수가 없었다. 매번 똑같은 짓만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새로운 형식의 그림도 배우고, 다른 사람의 말도 들으며 그려 보고 해야 더 빠르게 실력이 올랐다.
순순한 나의 대답에 교수님께서는 안심하신 듯 멈춰진 걸음을 다시 옮기셨다.
“그거 다행이구만. 역시나 내 생각대로 아주 담백해.”
“담백이요?”
“에일대에 들어오는 많은 학생이 아직 기름기를 머금은 채 들어오는 경우가 많거든.”
“기름기라니.”
표현이 재미있었다. 난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젊은 화가들이, 아니 정확하게는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그림쟁이가 가지기 쉬운 마음이었기에.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고 불리니, 여기 온 자신들의 적수가 없는 것으로 느껴지겠지.’
요즘 말로 허세라고 하던가. 예술가 특유의 기질이 잔뜩 물든 채 온다는 소리였다.
“근데 자네 라고시안과 무슨 일 있나?”
순간적으로 훅 들어온 물음. 작은 꿍꿍이속이 있는 난 뜨끔했다.
에일대 교수쯤 되면 남의 계약 사정에도 밝아진다는 말인가.
“무슨 일이라니요?”
“아니. 보통 갤러리는 그림을 팔려고 하지, 수장고에 보관해 두려고 하진 않거든.”
그러나 교수님의 물음은 내가 예측하던 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소속 작가와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그런 경우는 잘 없으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라네.”
“그건…….”
“물론 이건 절대 내가 그림을 사지 못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라네. 오해하지 말도록.”
“…….”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이쯤 되면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교수님께서는 내 그림을 사려다 실패하신 모양이셨다.
* * *
“교수님! 리처드 교수님!”
윤성 신 작가와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 리처드. 그는 뒤에서 본인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헉― 헉―
“나 어디 도망하지 않으니, 호흡 좀 잘 고르게나. 보나필드 학생. 그러다 숨넘어가겠네.”
뒤를 돌아본 리처드 앞에 뛰어온 사람은 익히 잘 알고 있는 학생이었으니.
루시아 보나필드. 현 에일대 석사 과정 학생이자 현업 화가이기도 했다.
“교수님, 그건 제가 진짜 하고 싶었습니다.”
다짜고짜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리처드는 그녀가 하는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걸 다른 학생에게 주시려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건 조금 잘못된 정보군. 이미 준 상태네만.”
“헙. 이미 주셨다니요.”
숨을 들이켜는 그녀를 보며 리처드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학생에게 찬찬히 설명하는 교수 특유의 어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