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un-bok's Modern Art Studies in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71
71화 뭔가 방해하면 안 될 느낌
영상의 시작은 한 사람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 젊은 남자가 다가와서 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잡은 그는 마찬가지로 그림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장면이었다.
[무적함대의 상징 테메레르호. 한때의 최고도 불명예스럽게 끌려가는군요.] [젊은 게 다는 아니지.] [이제 발로 뛰는 시대가 아니라 머리를 쓰는 시대죠.]내가 알기로 이 전함은 한때 해가 지지 않은 나라. 즉, 영국의 상징에 가까웠다.
역사상 영국은 내가 살던 시대의 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강대국이었으니.
땅도 넓고 물자도 풍부했던 제국. 오죽하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였겠는가.
그런 찬란했던 과거를 상징하는 전함. 테메레르.
그것이 증기로 움직이는 배에 끌려가는 그림. 이건 새롭게 다가온 시대에게 자리를 비켜 주는 그림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상징하는 테메레르도, 증기 기관도 모두 영국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했으니.
‘역시 다른 이들의 작품을 보는 건 도움이 된다니까.’
이쯤 되자 다른 것들도 찾아보고 싶었다. 아예 영화에 나오는 그림들이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더 확인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내가 다시 태블릿을 조작하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칵―
할아버지와 부모님들도 종종 작업실에 오셨다. 하지만 이 시기, 그리고 이 시간에 내 작업실을 찾아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어, 왔어?”
“응, 안녕.”
그 뒤 동원이는 정말로 내 작업실을 찾아왔다. 물론 매일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주에 한두 번. 그것도 정말로 어지간해서는 거의 그림만 그리다가 갔다.
‘내 생각보다도 더 존재감이 없는걸.’
그나마도 대화는 소소한 쪽이었다. 주로 미술. 그것도 입시 미술이 주였으니까.
오늘도 잠깐의 쉬는 시간. 동원이는 내게 슬쩍 진로에 대해 물어보는 중이었다. 바로 요 직전에 한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그럼 윤성이 넌 붙으면 일찍 가는 거야? 외국은 9월 학기잖아.”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
내게 중요한 건 학력이 아니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배우는 경험과 지식이었을 뿐. 그랬기에 난 수료와 졸업의 차이를 크게 두진 않았다.
“자세한 건 부모님이 이야기하신 거로 알아. 수료 처리된다고 듣긴 했어.”
“맞을 거야. 나도 찾아봤는데, 수료로 되었다가, 대학교 들어가면 졸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었어.”
의외였다. 나보다 이 친구가 잘 아는 듯 보였으니까. 좀 신기한 기분이 든 나는 동원이를 다시 보았다.
“생각보다 잘 아네?”
“흠흠. 내 나름대로 입시 공부 많이 했거든.”
하기사. 원래 가려던 길에서 진로를 틀어 버리는 일이었다. 당연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조사는 꽤 꼼꼼히 했을 것이다.
“근데 왜 갑자기 미대에 가고 싶어진 거야?”
“나 말이야?”
“어, 솔직히…… 방학 끝나고 와서 갑자기 그런 거니까.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물론 꿈이란 건 생각보다 쉽게 변한다. 특히나 이 시기의 아이들은 더했다. 아직 채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었으니.
약관.
남자가 스무 살에 관례를 한다고 해서 붙여진 것. 바꿔 말하면 아직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내 친구들은 어린아이들이긴 했다. 이제야 꿈을 찾았다고 해도 늦은 나이는 절대 아니었으니.
내 물음에 동원이는 슬쩍 눈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게 동원이다웠다.
“있긴 하지.”
“진짜로?”
“어. 근데 말해 줄 생각은 없음.”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는 친구를 본 난 기가 막혔다. 전생처럼 성질을 부린 것도 아닌데, 왜?
“아니, 왜? 나 작업실도 내주고 하는데?”
“그건 고맙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다 말해도 넌 안 됨. 나중에 내가 죽기 전이면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당장에 듣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동원이는 마음이 약했다. 명확한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슬쩍 실마리를 주는 것을 보니.
“그냥, 뭐. 미대에 들어가면 배우지 않겠어? 더 잘 그리는 방법.”
대학의 의미가 그쪽이긴 했다. 지금까지와 달리 좀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학습할 수 있는 공간. 그게 내가 아는 대학교의 정의였으니까.
“그리고 잘 그리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을 테니. 그 안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야.”
그 안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겪어 보지 못하면 표면만 보이는 법이었으니. 이를 진작부터 알았다는 듯 동원이는 내게 확신 어린 어조로 말을 했다.
“아예 안 들어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보게 될 테니까. 난 미대 갈 거임. 너 말리지 마라?”
“딱히 말릴 생각은 없어.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가야 보이는 것도 있으니…….”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 얼핏 내 머릿속을 스친 건.
“동원아, 잠깐만.”
“응?”
“지금 떠오르는 게 있어서. 밑 작업만 해 두게.”
난데없이 끊어진 말에 친구가 어리둥절해하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런 건 일단 생각난 순간 그려 둬야 했다. 세밀한 부분은 나중에 챙기더라도 말이다.
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순간 찾아온 영감이 사라지기 전 붓으로 남겨야 했기에.
* * *
동원은 갑자기 붓을 드는 친구를 막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봤다. 정확하게는 채 막을 겨를이 없었다. 그가 본 윤성이는 그야말로 전광석화가 따로 없었으니까.
‘뭐 하는 거지?’
분명 윤성이는 밑 작업을 하겠다고 했다. 밑 작업. 그건 보통 스케치였다. 본격적으로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하는 뼈대 말이다.
그걸 만들기 제일 좋은 건 아무래도 연필이었다. 그러나 윤성이가 든 건 분명 붓이었다. 연필이 아니라.
‘연필을 못 찾은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떡하니 붓 옆에 연필이 놓여 있었다. 그것도 매우 잘 깎인 채로.
사실 신윤성으로서는 급한 김에 익숙한 걸 잡았을 뿐. 하지만 이를 모르는 동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었다.
‘음. 뭔가 방해하면 안 될 느낌인데.’
붓을 쥐고도 윤성이는 한참을 종이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서 느껴지는 박력이 만만치 않았기에. 동원은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은 옆으로 좀 가서…….’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눈치를 보던 동원이 움직이려는 그때였다. 신윤성의 붓이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은.
정말로 딱 그거였다. 춤을 추는 것. 머리 안에 있는 걸 그대로 끊기지 않고 표현하려는 듯, 윤성은 붓을 든 그대로 그려 나가고 있었다.
스윽―
원래 남이 그림 그리는 광경은 무척 지루하다.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손만 움직이는 작업이니까. 심지어 그 손도 천천히 움직이는 게 보통이었다. 끊임없이 수정하고 고쳐야 하는 게 일이었으니.
그렇기에 너튜브 같은 데서도 그릴 때 이야기를 곁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아예 고배속으로 영상을 찍거나.
그러나 동원은 윤성이가 그리는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단순히 붓을 놀리는 모습이었음에도.
‘이건…….’
분명 처음에는 화가인 윤성이 눈에 들어왔다.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인력이 있었기에.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동원의 눈에 들어온 건 하얀색의 종이 위에 그려지는 세상이었다. 한 치의 틀림도 없다는 듯 붓은 일정한 선만을 그려 대었다.
‘와. 멈추지도 않네.’
동원이도 그림을 그리는 입장이기에 알았다. 선을 그으면서도 망설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대로 그려도 괜찮은지, 이상하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윤성이는 다른 모양이었다. 이미 여러 번 그려 본 그림을 그대로 베끼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멈춘 듯 윤성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윤성이는 곧바로 일이 어찌 되었는지 알아차린 듯이 이마를 짚었다. 친구를 어정쩡하게 둔 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얼굴이었다.
“미안. 잠깐 작업 좀 하느라, 정신이 없었네.”
“어…… 아니. 그건 괜찮은데.”
동원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질문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쩐지 그건 지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동원은 가벼운 질문만 던졌다.
“근데 왜 바로 물감으로 그리는 거야? 스케치면…… 보통 연필로 하잖아?”
“아, 맞다. 요즘은 그렇지.”
자신이 들고 있던 물건이 붓이란 걸 몰랐다는 기색이었다. 윤성이는 붓과 연필을 번갈아 보며 어딘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아니, 나도 그쪽이 편리하다는 건 인정하는데. 아무래도 사람이란 게 습관이 있다 보니…… 가끔 이렇다니까.”
습관이라니. 그의 나이 또래 아이들은 붓보다 연필을 더 많이 쥐었다.
글씨를 쓸 때부터 시작해 그림을 그리는 기초까지. 그걸 모두 담당하는 게 연필을 비롯한 펜과 같은 필기구였으니까. 그런데 붓이 더 편하다고?
“쯧. 더 편리한 도구가 있는데도 이런다니까, 진짜.”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로 한탄한 친구. 윤성이는 가끔가다가 이렇게 영문 모를 소리를 할 때가 있었다.
이제는 그런 친구의 면모에 슬슬 익숙해진 동원. 그는 그런 친구를 이해하느니 다른 궁금증을 풀기로 마음먹었다.
“이거 대충은 다 그린 거야?”
“그럴 리가. 머리에 든 게 날아가기 전에 잠시 잡아만 둔 거야. 아직 한참은 더 다듬어야 해.”
언뜻 보기에 평범한 풍경화로 보이는 모습. 그걸 보며 윤성이는 미미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 *
사람의 눈은 착시를 일으키곤 했다. 눈에 보이는 걸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내가 노린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둘의 대화 사이에 그림이 일부 보이는 게 좋겠지.’
제일 먼저 확정 지은 건 그림의 크기였다. 큰 그림은 그에 따른 웅장함이, 작은 그림은 그에 따른 세밀함을 보여 주기 좋았다.
내 그림이 들어갈 부분은 주인공들의 대화 사이 장면.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크기가 딱 좋으리라.
그다음으로 정한 건 물감의 종류였다. 이건 더 정하기 쉬웠다. 내게 가장 익숙한 수채화와 인식에 좋은 유화. 이 조화면 충분했으니까.
‘재료를 정했으면 그다음은 내 손이 일을 해야겠지.’
머리로는 대강 구상이 끝났다. 친구인 동원이와 말을 하는 와중에 스친 잠깐의 생각. 그걸 구체화해야 하는 게 내 손이 할 일이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그건 다시 말해 언뜻 보기엔 무척이나 행복한 것이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표현하면 되는 일이었다.
‘좋아, 해 보자.’
의뢰를 받아서 그린 이 그림. 이걸 내가 온전하게 완성시키고 나면 내 실력도 한 단계 오를지도 몰랐다. 평소에 내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쪽으로 계속해서 사고를 하는 것. 그건 분명히 내 작품 세계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까진 우선 다른 일은 온전히 멈추기로 했다. 덕분에 난 여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작품의 완성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